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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주고 바알을 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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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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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는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학문적 연구를 통해 그런 안목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을 통해 그런 안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의 그런 안목은 동시대의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역사인식에 동의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동시대의 이념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타고난 성품이 감성적으로 예민했던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자적 안목과는 이질적인 동시대인의 삶의 정황이 안타까워 너무나 많이도 울었기에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소위 관료주의적인 의식으로 산 것이 아니라 어느 시인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것처럼 여리고 예민한 의식으로 산 것이 분명합니다. 시인 김사인은 그의“별을 보며”라는 시에서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에게는 어떻게 보면 이 시인의 소심증과 결벽증 환자 같기도 한 예민함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들을 책망하였지만 그 자신이 세상이나 사람들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덜덜 떨며 살았던 것 같은데 비해 나는 무지의 용맹으로 사는 것 같아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 질 때가 많습니다.

유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은“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2)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로마서 1:20-23절에서 지적하였습니다.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주고 바알을 샀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예레미야 자신에게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백성의 이런 경향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경향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한 이후 계속되는 경향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너무 무심하여 이러한 우리의 형편과 수준을 지적하는 말씀에도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을 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과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생명과 구원이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고 가치이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생명과 구원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구원보다 더 큰 상위 개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리문답 제1문에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구원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개인적으로든지 집단적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면 본래의 존재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을 곧 죄라고 합니다. 요즘 개념으로 말한다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실패의 전형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대한 단순한 고발 차원이 아니라 그런 전형을 통해 인류가 그 존재 목적에 얼마나 역행하여 사는가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여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유대의 참담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조국의 운명이 그와 같은데도 그 심각성을 감지하거나 눈치 채지 못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조국 유대가 처한 상황을 인하여 한 없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백성들을 인하여 그는 한 없이 울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인데 누가 감히 건드리겠느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유대가 바벨론에 포로가 된다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믿을 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 까다로운 엉터리 선지자라고 취급하였습니다. 늘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지적하는 못된 선지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선지자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 외롭고 고독한 선지자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바벨론의 간첩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늘 테러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참 불운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유대인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나라가 이지경이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너희 조상은 나를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 행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헛된 것이란 풍요의 신 바알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고 선지자는 바알이 약속하는 것을 전하고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일체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도 없고 바알의 약속만 좋아하고 전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백성들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바알이 주는 것을 좋아했고 지도자들이 그것을 가르쳐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형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늘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가 볼 때 이것은 개인적인 악일 뿐 아니라 집단적이고 종교적이고 문화적이고 윤리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악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유대 백성들에게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절기도 잘 지켰습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도 대단하였습니다. 비록 시국이 어렵고 경제적으로 불황이고 국제 정세가 어수선해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레미야의 설교는 공연히 트집을 잡는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유대 백성은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처럼 헛된 것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염려하셨던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경험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광야에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시시하다고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경험이 아무리 대단해도 현실적으로 가나안 땅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홍해를 건너야 할 필요도 없고 만나를 내려주신다고 해도 전혀 고마울 것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에는 광야에서 그들의 생존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가나안에는 그 동안 그들이 맛보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과수를 재배하고, 목축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한 만큼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온갖 종류의 문화와 축제 같은 발전시켰으며 그것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가나안 사람들의 삶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60,70년대에 미국을 부러워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 당시 미제는 무조건 좋은 것이었습니다. 재래식 변소에서 수세식으로, 달구지에서 자동차로, 라디오에서 컬러텔레비전으로, 연탄불에서 기름보일러로, 석유곤로에서 가스레인지로, 공동목욕탕에서 집 샤워시설로, 마을에 한 대 밖에 없는 전화기에서 007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나 가지고 다니던 스마트폰으로의 진보와 발전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문화뿐 아니라 그들의 종교도 받아들였고 문화와 가치관도 받아들였습니다.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 신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도 섬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한 곳에 바알 신상을 세워 놓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바로 그런 형국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돈도 섬깁니다. 교회 안에 바알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을 지적하면 그게 뭐가 잘못이냐고 반발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물질적으로 복을 받아 잘 사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라고 합니다. 잘 살고 싶은 건 모든 인간의 꿈입니다. 그런 욕구와 꿈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문제는 풍요가 너무 좋아 거기에 빠져들어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듣고 싶은 설교나 간증은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배 회복이니 말씀 중심이니 하는 것은 거의 눈 감고 아옹 입니다. 온갖 그럴듯한 말은 다하지만 메시지의 결론은 풍요의 추구와 보장과 약속입니다. 많은 설교에서 하나님은 서론이고 결론은 바알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은,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풍요에 기울어진 영혼은 형식적으로나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할지 몰라도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에 대해 완전히 초연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이 없이는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영혼이 그 물질에 천착(穿鑿)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그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알과 바꾸면 안 됩니다. 그런데 모두가 바알을 숭배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모든 우선권을 두고 사는 것은 매우 불편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반면에 사람이 물질에 천착하여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뿐 아니라 오늘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라는 사실은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가리켜 헛된 것이며 무익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헛되고 무익한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무엇을 움켜잡기 위해서는 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헛되고 무익한 바알 즉 풍요를 움켜잡기 위해 하나님을 놓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헛되고 무익한 것과 바꾸었다고 합니다. 돈을 주고 좋아하는 물건을 사듯이 하나님을 주고 바알을 산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에는 우리 영혼이 만족할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찾아갔던 부자 청년이나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에서 그 교훈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세상적 표현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 문화적으로 세련되게 사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경쟁력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심지어 목회자를 구할 때도 그런 기준에 의해 목회자를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을 풍요에서 찾는 것은 하나님과 바알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었고 경험하고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십자가와 부활은 생명을 얻고 누릴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풍요와 능력과 지혜와 사상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이 거기서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구속의 사실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무엇이 헛되고 무익한 것인지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헛되고 무익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무조건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헛되고 무익한 것은 그것의 수준과 가치에서 받고 처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혼을 걸지 말고 인생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삶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결심이나 능력으로 안 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성령님으로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 놀라운 생명에 참여하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풍요의 매력에 영혼을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을 주고 바알을 사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 렘 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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