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윤리는 하나다 > 지난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페이스 상패 제이미 제이미혜택



이곳은 2017년 이전에 올려진 아멘넷 오피니언 칼럼 글입니다. 이름으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황상하 | 김동욱 | 최송연 | 허경조 | 이수일 | 송흥용 | 김정국

지난 오피니언

교리와 윤리는 하나다

페이지 정보

황상하2014-01-11

본문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교리와 윤리는 마치 서로 다른 것처럼 오해되었던 일이 많았습니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서도 교리를 강조하는 이들은 윤리를 소홀히 취급하고 윤리를 강조하는 이들은 교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중에 교리를 중시하고 윤리를 무시하는 이들이 비교적 많고,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기독교인들 중에 교리를 무시하는 이들이 많은 편입니다. 정통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것이고, 윤리는 곧 사랑입니다. 윤리를 윤리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쉽게 설명하면 남에게 잘 하는 것이 윤리인데, 성경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윤리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산상수훈에 많이 나타나는데, 그 가르침이 곧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고 그 원리가 곧 사랑입니다. 교리의 핵심인 구원이 은혜라는 사실이 곧 하나님의 사랑인데, 그 하나님의 사랑에는 은혜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실천할 사랑의 방법과 목적과 능력까지가 패키지로 묶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는 분이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은 이 사랑을 단순한 윤리적 차원에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참된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고 진실한 성도를 비웃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거짓 가르침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이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역사적 타당성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설명이 논리적으로 아무리 탁월하고 진정성이 있어도 그것만 가지고 참 복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온 정성을 다하고 자기 몸을 희생하는 진정성이 있고, 누구나 들으면 감복할만한 설득력과 감동이 있고, 사상과 학문적 깊이가 있어도, 그런 것들이 사랑을 실현하고 사랑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가짜라고 하여 사랑을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을 분별하는 시금석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사랑에 대해 바르게 배우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진리와 거짓을 가려내는 시금석이기 때문에 그 사랑 자체가 잘못된 것이면 복음과 진리의 진위를 가릴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법정에서 재판을 하는 판사가 사상이나 인격에 문제가 있다면 올바른 판결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과 진리의 진위를 가리는 시금석으로서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거짓되거나 왜곡된 사랑으로는 복음의 진위를 가릴 수 없습니다. 왜곡된 복음으로 혼잡하게 된 지금의 교회의 형편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생각입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에 따지거나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것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나 노회나 총회나 심지어 가정에서도 법과 질서와 원칙을 강조하면 사랑이 없다고 비난 받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교리와 신학이 교회에서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목사님이나 은혜 받았다는 교인들 중에 교리나 신학이나 법이나 질서를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도 물론 사랑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부인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원인은 은혜와 사랑(교리와 윤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을 도덕적 혹은 윤리적 차원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들이 댄다면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태도요 크게 실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사랑이 없어!”라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의 기준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도 그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는데,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한 것은 곧 “하나님은 오래 참고”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만이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그 사랑을 우리의 능력에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신분에 명령하십니다. 참 하나님의 자녀는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존재이기에 그 사랑을 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은 우리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순종으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으로 행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뉴욕에서 백악관을 찾아갑니다. 물론 GPS가 없을 때입니다. 백악관 근처까지 갔는데 길을 잘 모릅니다. 그곳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길을 물었습니다. 친구가‘현재 네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현재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그에게 근처에 무슨 빌딩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무슨 빌딩이 있다고 하니까 그 건물을 오른 쪽에 끼고 우회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좌회전 또 우회전 직진.... 뭐 이런 식으로 해서 겨우 백악관을 찾아갔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뭐가 사랑인지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사랑이라고 하기는 했는데 사랑에 역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나는 사랑으로 잘 한다고 했지만 상대방에게는 전혀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나 자신이나 상대방이나 사랑을 실천하기에 기본적으로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문제로 서로를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사 모든 것이 이 사랑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랑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심각한 사랑에 대한 오해는 사랑을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가 아니고 모든 은사의 원천이고 최종 목표입니다. 어떤 은사도 이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사랑을 지향해야 하며 사랑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은사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의 그 어떤 교리도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사랑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복음도 사랑이고 하나님도 사랑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사랑은 하나님이다”로 확대 해석하면 안 됩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교리와 사랑이 하나라는 사실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일 4장 12절에“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라고 하였고 15절에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이고 고백하는 것은 교리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서로 다른 이중적 원리가 아닙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같다는 뜻입니다.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사랑과 고백이 동원되고 있지만 그 둘은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의 표현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는데, 여기“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은 교리의 내용이고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윤리적 명령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를 “보지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벧전 1:8)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형제를 어떻게 대했는가로 주님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카운터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마 25:31-46). 하나님과 예수님께는 교리와 윤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연락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