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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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ㆍ2012-01-0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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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가 가까워옴에 따라, 거짓 선지자들이 활개를 치는가 하면, 이곳저곳에 선지(예언자)학교라는 특수 학교가 세워지고 자칭 사도들, 예언자들, 선지자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현재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선지(예언자)학교와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좀 더 좁혀 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이란 어떤 것이며 예언자의 자세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란 사각지대(死角地帶)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벨리알의 사람이냐, 둘 중 하나, 영생의 길이냐, 영벌의 길이냐로 갈라지기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검증이란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예언의 정의:
예언이란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예언(豫言)과 동음어인 예언(預言) 이 두 단어의 뜻이 모두: ①앞에 올 일을 미리 말함 ②또는,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신의 말을 듣고 신의 의지(意志)를 사람들에게 전(傳)하는 일 ③또는, 그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예언’은 한자로 보면 예언(豫言)이 아니라 동일한 동음인 ‘預言’ (예언)을 뜻한다. 또 영어 'predict’ (prediction)이라는 단어와 'prophesy'(prophecy)라는 단어는 같은 뜻 같으나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predict’란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의미의 단순 예언(預言)을 뜻하며, 'prophesy’란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로서의 예언 (預言), 신탁(神託)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말씀 언(言)자에 맡길 예(預)자를 사용한 말이다. 인간의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맡겼다는 뜻이다.
(預言)자의 개념:
하나님의 선견자(先見者) ‘로에’ 와 대변자 (代辯者), ‘나비’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대변자’, 선견자란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말은 그 자신들의 영(spirit)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Holy Spirit)에 의해 말하게 한 대언이었기 때문이다(삼상 9: 9, 렘 23: 16, 겔 13: 2절 참조). 구약 시대에도 선지 학교가 있긴 있었다. 선지 학교는 사무엘시대 이후부터 세워진 기록이 있고, 아마도 사무엘이 좋은 선지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지 학교를 세운 것 같다. 그 후로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 세워진 선지 학교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혹은 동리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받으며 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선견자(대선지자, 소선지자 포함)들은 선지 학교 출신들이 아닌, 평민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골라 특별히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선견자나 선지자, 예언자의 특성상, 인위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닌, 전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탁에 의해 주어진 말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주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대언 자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신구약 성경이 완성, 정경으로 채택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교훈도 하시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인 제사장’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만인 대언자’가 될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대언이 어떤 특정인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삼스럽게 인위적인 방법의 선지 학교나 그곳에서 배출된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진정한 예언= 우리에게는 오직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서인 신구약 66권 외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계22:18-19절).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서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다. 가장 확실한 예언은 성경 말씀이다 (벧후 1:19-20).
3.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령한 예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대언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보혜사 성령님께로부터 성도가 신앙생활을 더 잘 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써, 때로는 예언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말씀을 레마로 주시기도 한다. 곧 모든 양이 그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직통계시적 형태를 취하는 태도를 삼가야 한다. 우리(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활이시요, 사용되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안에 있어야만 한다. (행27:22-25)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몇 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특별계시(예수 그리스도), 혹은 기록(문서)계시(성경), 일반(자연)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문서 계시인 성경 말씀 역시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롬1:19-20절 참조)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 계시, 혹은 문서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계 22:18-19절 참조),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 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기록계시 속에서,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해석돼야 한다. 성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손에 이미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따로 선지(예언자)학교가 필요치 않다고 본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14;26).”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대언의 영으로 주시는 말씀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a) 은사로서의 예언:
권면 하며 안위하며 덕을 세우기 위해서 대언의 영으로 증거(예언)할 수 있으나, 반드시 교회와 사람(개인)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고전14:3절, 계시록19:10절 참조.) 사업이 잘될는지, 자녀가 학교에 입학 가능한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혼은 어떤지...등등, 이런 류의 점치는 형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b)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신명기18:18-22 ):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말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 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c)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을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d)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이때 들려지는 말씀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절하반절)".
e)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레마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4:26절)
f)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1:41-45절)
g) 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절)”.
결론적으로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악한 영에 미혹 받지 말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잘 인도되고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는 것 없고 내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변하지 않고 온전하신 말씀 안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겸손하게 주와 동행하는 성도가 복된 성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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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설명:
개혁교의 대표적인 분들(죤 칼빈, 마틴 루터, 벤저민 휫필드. 죤 매카터, 리처드 개핀, 대니얼 월리스) 등, 그분들은, 초대 교회 이후, 은사중단론을 지지한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중단설(cessationism)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초기교회 이후 방언, 신유, 은사, 계시 등이 끊겼고 사라졌다는 주장입니다. 그 이유로는 성경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모든 은사들이 필요하였고 그에 따른 임무(성경이 완성)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많이 읽기 전에는 그것이 그런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 14: 26 말씀이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도 필요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밝히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을 하게됩니다.
믿는 자는, 새 방언을 말할 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부터...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하심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방언이 우리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외국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 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배워서, 학습으로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인지....그러나, 그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댓글로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분 중에 어릴 적 부모를 여이고 천애 고아로 성장하신 여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후, 첫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와 주신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가긴 해야겠는데, 말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그분은 미국인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미국 교회에 나가니, 영어로 찬송도 불러야 하고 말씀도 들어야 하고...너무나 힘이 들어서 고통 하던 중, 영어 성경을 읽어보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어 성경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읽는 것이 아니라, "I n t h e b e g i n n i n g 이렇게 알파벳을 한자씩 소리내어 읽었다는 군요.)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읽고...틈만 나면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녀의 입이 갑자기 열려서, 알파벳으로 끙끙거리던 그 말씀이 문장으로 줄줄 이어지고....
깜짝 놀란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음성을 듣고 있던 (재혼한 일본인 2세)남편이 놀라서 소동을 하고요....이렇게 배운 적없는 외국어도 가능합니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는....
또 고전 14: 2절의 영언(비밀)의 체험 사례: 그야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교회로 빌려서 사용하는 건물에서 몇 몇 성도님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룁니다. 그날도 우리가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의 이름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저의 혀가 구르면서 내가 평소에 쓰지않던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뜻이 연달아 깨달아지는데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를 침상에 내어 던지리라!" 저는 너무도 놀라서 울며 불며, 조금만 더 참아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십사...아마도 저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입니다. 저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마저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치유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일으켜주십니다. 그런데,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여서, 자신이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우월하다던지....이런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사단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충동질 하기 시작하지요. "너는 신령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기도해 주면 병도 낫는다." 등등. 그런 사단의 속삭임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감지해 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화시켜서 모든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삯군이요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졸개일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자신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보이지가 않습니까?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치지요)이 말은 표현적으로 잘못되었기에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개혁교회(다는 아님)중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중 방언과 예언은 중지되었다고 가르치지요. (아래 참조를 올려두었음)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체험했지요.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나요?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정통 개혁교회의 입장:
다음은 개혁교회의 입장에 관한 간추린 도움말입니다.
" 개혁주의가 중단되었다고 보는 은사는
1. 사도의 은사(the gift of apostle)
->예수님이 그냥 사도를 임명했다고 보기보다는 예수님이 부르셔서 사도의 사명을 주시고 감당하도록 사도의 은사는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 예언의 은사(the gift of prophecy)
->선지자의 은사와 동일한 뜻으로서 예수님이 직접 누구를 부르셔서 예언의 은사를 주면서 선지자로 세운다고 임명하지는 않았지만,
예언하는 사람(선지자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은 예언의 은사가 임했기 때문에 예언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3. 방언의 은사
4. 방언 통역의 은사
->이 두가지 은사도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을 교회에 전달하는 것과 관련된 계시의 은사로 봅니다. 개혁주의에서는
이상의 네가지 은사가 이제 없다고 봅니다. 개혁주의 안에서 방언을 계시의 은사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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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2012-01-22 10:34
69.xxx.142
JuNick님,
JuNick님이 링크하신 "중지론" 위키에 달린 참고자료에 나오는 사람, 나무님이 지적하신 Poythress 교수(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세대주의에 대해 세미나하는걸 직접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얘기할땐 말이 많아서 저같은 사람은 뭔소린지 잘 이해가 안가던데, 이분은 비교적 알아듣기 쉬웠습니다!^^
http://www.frame-poythress.org/Poythress_books/bdisp/bd0.html
이분이 하버드에서 수학 학위를 갖고있는 사람인데, 신학을 공부하여 성경 원문을 번역하는데도 관심이 많은 분입니다. 예전에 The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에 나온 글을 보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어떻게 생겼나도 볼겸^^ 거기서 공부하던 전도사(제가 교사할 때 유스그룹 전도사 하다가 지금은 한국의 어떤 신학교 교수)와 세미나하는데 참석한 기억이 있습니다.
http://www.etsjets.org/
이런 저널은 저희동네 프린스톤 신학교에 6개월에 얼마 내면 언제든지 가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아멘넷 독자들께서도 혹시 가까운 (신학)대학 도서관을 찾아보시면 일반인들을 위한 사용이 open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왕에 링크하신 중지론 위키에 달린 Poythress 교수님의 글을 조금씩 번역해서 올려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저도 적극 참여하여 관련된 참고내용을 부족하지만 능력이 닿는데로 붙여보겠습니다.
<Modern Spiritual Gifts as Analogous to Apostolic Gifts:
Affirming Extraordinary Works of the Spirit within Cessationist Theology>
http://www.frame-poythress.org/poythress_articles/1996Modern.htm
잘 맹글어진거 하나를 자세하고 완벽하게 분해해서 이해하고 재조립하는게 광범한 내용을 이것저것 훑는거 보다 나을거라 사료됩니다!
다시한번 올려주시는 자료들과 JuNick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나무 토마스님 그래주시면 너무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 선물들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고, 그 선물들을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나눌 마음들을 주시고, 또 그 선물들을 통하여 주님의 백성들을 건강하게 세워가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궁금한사람
2012-01-21 12:06
173.xxx.75
《Re》JuNick 님 ,
(discuss 이것저것 검토하면서 논하다, 화제로 하여 검토하다. argue 사람을 설득하기 위하여 조리있게 논하다. debate (공식 석상에서)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다. dispute 주로 반대하기 위해서 논하다, ...에 이의를 제기하다. ) 연구를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 JuNick님은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원하지 않으면 답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른 뜻은 없고, 저는 별똥별님의 글과 여러분의 토론에서 배울 것이 많기에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궁금증이 생겼을 뿐입니다.
교제 <이르시되 기도 외의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신자가 있고 신자의 믿음으로 드려지는 기도가 있고
기도에 응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일하시고 계시는데 병고치는 성령의 은사(선물)와
능력을 행하시는 성령의 은사(선물)는 사도들에게만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니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에는
중단되었다라...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만 병을 고치시고 능력을
행한다는 소리인데 성경은 그리 교훈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20 20:54
24.xxx.86
교제 바울사도가 자신의 약함을 고치지 못했다고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사도시대 그 당시에 교회에 병고치는 은사와
능력의 은사가 중단되었다 할 수 있는지요?
하나님께서 신자(예- 70인 ,12사도, 전도자
빌립(집사), 장로,믿음으로 사는 의인 )에게
약속된 은사를 주시어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시는
도구로 사용하실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은사인 것이지 도구로 사용되는 자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대상에게 항상
그런 능력을 보이게끔 역사되어져야 할 은사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제한하지 않은 시기를 인간적인 이론으로
제한하는 우를 범하느니 믿음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지혜,
epistelchristi
2012-01-20 05:20
79.xxx.134
이렇게 열심히 외치는데도
아직도 예언이랍시고
<몇년 몇월 몇시에 어떠니 세상 모든것 다 내게 가져다> 바치라는
미친사람의 소리를 예언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니
우짜면 좋을까요!!!
교회에서 <그날은 오로지 아부지만 아는기라>는
예수님의 고백을 들려줬다면, 쉽게 판단이 날 건데,
아직도 도처에 거짓예언으로 미혹하고 있으니....
<카터라>....<아니면, 가져다 바친 넘이 바부>하는
막가자판 목회자들이 언제 이 땅에서 사라질지...
기다림...
2012-01-19 22:56
128.xxx.193
7살 정도의 아이와 엄마의 대화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사랑이 뭐야?"
엄마가 잠시 생각한 후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사랑이란 네가 너무 좋아하는 캔디를 네 동생에게 양보하는 거란다..."
1) '사랑'이란 7살 짜리가 표현하기는 너무 힘든 단어지요.
2) 어린아이에게 어머니가 그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 주셨네요.
3) 어린아이는 '사랑의 실체'를 모르지만...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알고 싶어 했네요.
셋 다... 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별 사모님의 수고에 언제나 감탄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며 갑니다.
또한 수준 높은 아멘넷 논객님들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별똥별
2012-01-19 12:51
98.xxx.205
지금껏 많은 분들이 힘을 다해서 좋은 토론을 이끌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운행하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실, 신학적인 문제는 세기를 두고 내려오면서 유능한 신학자님들이 그토록 피 터지게(?) 싸우며 나왔지만 해결보지 못하여서 각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논객님들의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로 많은 지식적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음은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비록 나와 약간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로 맺어진 한 형제 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실되고 참된 일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겸손하듯 겸손한 영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겸손이란 가르치는 은사가 없다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르치는 은사를 주신 분들, 잘 가르치는 것도 성령님의 은사로 충만하신 은사 자들이기에 그분들을 배나 존중할 자로 여기라고 바울 사도는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각 분야에서 자신의 받은 은사대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주력하되, 그분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힘입고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하신 바울 사도의 믿음을 본받고 싶습니다. 참된 겸손은 "내게 능력주시는 분이 누구 신가?"하는 사실을 인지하는 그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신 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내가 체험하지 못한 비밀한 일을 체험한 형제 자매도 있다고 믿는 것이고 칼빈 선생님도 가짜들의 이적과 기적놀이에 질린 것 같지만 그분의 말속에는 항상 주님의 영으로 모든 것이 가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제가 보는 칼빈선생님은 과연 대 학자요,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의 사람이십니다.
우리가 사단의 장난질, 주절거림의 방언이나 거짓 은사자들, 삯꾼들, 그리고 자신이 능력 자라고 사람들 앞에서 나팔 부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하셨습니다.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무리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씀에 있는 것이라면 단 일회적으로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내 지식의 틀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제한시켜 가두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서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주께서 내게 보여주신 만큼만 믿되,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날, 주께서는 제게 성령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ability" 즉,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은 곧 그분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시간에, 그분이 깨닫게 도와주시는 때,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의 능력을 체험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졌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내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세워나가시는 우리 독자님들이 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토론을 이끌어나가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기자석
선생님의 말씀에 저는 언제나 agree 합니다.
별똥별
2012-01-18 18:01
98.xxx.205
교제님께서 수고하여 주신 덕분에, 주소에 들어가서 읽어본 결과,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 선생의 입장을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보다 더욱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즉, 칼빈 선생님의 뜻이 해설자들의 말에 의해서 호도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가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잘 정립해주고 있는 분은 역시 칼빈 선생님이시란 생각입니다!
1. 기독교 강요
1) Inst 1536.
((그들은(여기서 그들이란, 거짓 기적을 조장해 내는 현대판 신사도 파와 같은 천주교회를 지칭)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 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 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시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칼빈
여기에서, 현대는 사도 시대와 같은 기적(동일한 능력,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다던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병들어 죽은 사람 살렸다는 말은 모두 거짓 사도들이 꾸며낸 말일 뿐, 인간의 생명은 유한한 것, 주께서 오라고 하시면 오늘이라도 가야합니다. 잠시 잠간의 기적으로 인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신사도 파, 아이홉 파처럼 날라리 사이비(토마스님의 표현을 빌렸슴다.^^)가 그때 당시도 횡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거짓 기적, 사단의 장난질을 경계하자는 단호한 의지가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구분되고 우리(개혁교도들)에게도 성령님에 의한 참된 기적이 있고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 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붉은색이나 밑줄을 그을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 칼빈 , 아멘!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거짓과 참을 구분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칼빈 선생의 위 문단이 저, 별똥별이 지금껏 힘을 다해 증거하고자 하는 내용과 어쩌면 이토록 합일한지, 성령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참된 성령의 역사로서의 기적은 옛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처럼 그렇게 큰 능력으로 임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주께서 그들을 사용하신만큼의 기름을 부어주시지는 않지만, 세기를 두고 주님의 뜻에 따라서 여전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은,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거짓 영, 거짓 기적을 성령의 능력으로 분별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장난에 휩쓸려 넘어갈 뿐아니라 거짓 삯꾼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어간다!! 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 목사님들도 칼빈 선생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을 약간씩 뒤틀어서 이해하지 마시고 '아', 와 '어', 가 다름으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아래 Thomas님처럼 바른 이해를 가짐으로써, 맡겨주신 주님의 양떼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교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은 개혁주의 선배들이
모두 토마스님이나 별똥별님처럼 해석하였더라면
기존의 은사중단론의 방향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건덕성 은사라 설명하며 사모하고
금지하지 말라 교훈되어졌던 방언, 방언통역,예언
은사, 교회에 교사 다음으로 세워진 능력이나
병고치는 은사 중단등으로 나아가지 않고 은사
중에서 계시성과 사도성을 가진 것과 관련된
은사인 사도 선지자 직임은사중단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신사도 아이합
선지자들처럼 직통계시를 받아 예언의 말씀을
낸 사도 선지자의 직임을 이어받아 사도
선지자 사역을 한다는 거짓 무리들을 좀 더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분별 경계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 봅니다.
1/18 18:47
24.xxx.86
교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치우침 없이 조정하여 글을 올리신 사모님의
수고에 감사드리며 이 글을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기를 바라구요^^
1/18 18:51
24.xxx.86
별똥별 독해력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
원어나 외국어에 약한 선배님들도 계실 것이구요.
주님께서, 그리고 천국에 계신 칼빈 선생님께서
올매나 답답하셨을까요....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졸개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어리석고 무식하며 연약한 영혼들이
날이면 날마다 사단의 덫, 거짓 사도의 품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교제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피곤하면, 포기해 버리고 마는 유약한 성품이기에...
주님께서 교제님과 Thomas님처럼 유능한 인재님들을 붙여주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토론장을 열어주신 아멘넷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Praise the Lord! 1/18 19:05
98.xxx.205
댓글목록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교제
2012-01-18 17:36
24.xxx.86
막 16:17-18절과 고전 고전 14:28에 대한 칼빈의 견해가 중단인지
지속인지에 대해서 지금까지 토마스님께서 찾아낸 내용들이 거의
들어 있는 사이트를 찾았기에 정리하여 올립니다.
[But the gift of hearing disappeared with the other miraculous powers
which the Lord was pleased to give for a time, that it might render the
new preaching of the gospel for ever wonderful.
그렇지만 주께서 당분간만 나타나게 하셨던 다른 이적들처럼,
신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전파가 계속적으로 놀라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사라졌다-기독교강요 1536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 되었다.그런 일들이 한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선포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는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비상한 기적들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확대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1559 4권 19장 ]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임시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그의 교회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은사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새롭고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던
복음을 밝히 드러내는 뜻에서 그 당시만을 위해서 기적이
약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물론 이 세상은
배은망덕 때문에 이 특권을 상실한 것이지만 이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출발점에 있는 복음의 교훈에 충분한 보장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보겠다. 물론 이러한 기적의 용법이 그 후에 있어서
중지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러한 실례가 아주
희귀하게 되어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공통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 마가복음16:17-18 주석 중에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ychoi408&logNo=50097082910
시대적으로 로만 카톨릭,재세례파를 모두 대적으로 보고
변론해야했던 칼빈의 상황을 고려하며 읽는 분들이 교사 다음으로
세워진 "능력"이나 "병고치는 은사"에 대한 칼빈의 은사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thomas
2012-01-18 12:39
69.xxx.142
찾았습니다! 4권 19.18 마지막 단락에 나옵니다. 그러나 옮겨진 내용 중,
((이제 치유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다))
<--이건 완전히 틀렸습니다. 악의에 찬 위조입니다.
"사도들이 집행했던 <도유>는 이제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듯하다. 그런 사도들의 능력은 우리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로 쓰였습니다.
http://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toc.html
<Therefore, even were we to grant that ANOINTING was a sacrament of those powers which were then administered by the hands of the apostles, it pertains not to us, to whom no such powers have been committed.>
"도유" 또는 기름부음은 요즘 IHOP 신사도 날라리 사이비가 입에 번지르르하게 달고 다니는 그 뱀기름 anointing으로서, 그당시 카톨릭이 행한 다섯 가지 소위 "성례"라는 것들 중에서 "종부성사" 굿판에 등장하는 (1) 기름 (2) 기름부음 (3) 사제의 안수에 대한 칼빈의 비판 말미에 결론적으로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앞에 쓰인 말의 엉터리 인용:
((한동안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선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But the gift of hearing disappeared with the other miraculous powers which the Lord was pleased to give for a time, that it might render the new preaching of the gospel for ever wonderful.>
뉴앙스가 상당히 다르죠? 그래서 앞뒤를 계속 읽어보았습니다. 그걸 찾으며 읽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주석에서 발견한 관련 내용의 일부입니다.
같은 19.6에
<It pleased the Lord that those visible and admirable gifts of the Holy Spirit, which he then poured out upon his people, should be administered and distributed by his apostles by the laying on of hands.>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visible and admirable하다고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넘치도록 부어주신걸 주님께서 기뻐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또한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사도들의 안수에 의해 나누어지고 사도들에 의해 관리/집행되어져야 함을 주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하면서, 사도직의 특수성을 도처에 언급합니다.
여기서 <안수>는 impartation이란 뜻이 아니고 세례를 할 때와 같은 일종의 상징적인 인증, 제스쳐.. 그런 것입니다.
칼빈시대의 카톨릭은 종부성사에서 <기름 자체>와 <기름부음의 행위>와 함께 동반되는 <사제의 안수>에 어떤 실체적 의미를 두었습니다.
요즘도 아픈 교우와 함께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손을 얹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런거까진 괜찮을지 모르나, 그걸 가지고 자기 손을 통하여 어떤 능력이 전달된다고 착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당장 때려치시기 바랍니다. 그런거에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딴짓하는 자들이 영지주의 전통에 있는 자들입니다.
칼빈은 이어서 (강요 IV.19.6)
<Assuredly the Holy Spirit is still present with the people of God 성령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계심이 분명하다>
이것 뿐만 아니라 기독교 강요 도처에서 성령의 역사에 관한 증거를 자세히 논증합니다.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로 알려져 왔습니다. (B. Warfield, "John Calvin the Theologian", in Calvin and Augustine)
칼빈은 그의 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어진(은사) 소명을 다한 그시대의 주님의 종입니다. 그 이전 시대에 한번도 <기독교 강요>와 같이 기독교인의 "체험"들을 건전하게 집대성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가 증거하는 크리스챤의 "체험"들 테두리 밖에서 신앙을 고백한다는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게 되어 있습니다.
365일 24시간 내내 철야 방언기도로 기름부음으로 좔좔대며 중언부언하고 구시렁대는 것보다, 주말에 한두시간씩 조용한 골방에서 <기독교 강요>를 찬찬히 읽으며 성경말씀을 상고하고 주님께 기도하며 옷깃을 여미는게, 주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백성들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며 기뻐하시는 성령님의 은사가 여기에도 임하기를 기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님의 뜻이 이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성령충만 아닐까 합니다.
여기 아멘넷에 보니까 제가 좋아하는 은퇴목사님이 이런 말을 옮기셨다고 합니다. ((칼빈이 제내바에서 종교개혁한다고 자기와 다른 사상릉 주장하는자를 13명 교수대로, 10명은 절두, 35명 화형시켰습니다.
지금 우리교회가 칼빈이 잘했다고 동의할수있습니까?))
이것 또한 전혀 facts가 아니며, 조작 왜곡된 악랄한 모함으로서, 예전에 holykang이란 사람이 비슷한 얘기를 해서 망신을 준 적이 있습니다. 정신나간 자들 외에도 알만한 분들이 이런 악의에 찬 낭설에 휩쓸려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데 사용한다는건 어처구니 없습니다.
이게 Servetus라는 사람과 관련된 아주 유명한 일인데, 최근에 발견된 칼빈의 편지를 차치하고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유일하게 칼빈이 사형집행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카톨릭 신학자라도 위에 인용된 망발을 입에 담으며 칼빈을 비난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순히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걸 개신교인이라는 작자들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 인터넷 상에서 옮기는걸 맞장구친다? 한국교회의 저열한 "영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칼빈의 고린도전서 주석을 보면
www.ccel.org/ccel/calvin/calcom39.toc.html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는 모든 것에서 나오는 모든 선한 결과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주신 것이 아니면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잊어버리고서 자신들에게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칼빈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사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오류를 교정하려고 한다고 한다. 즉, “사랑에 대해 별 고려가 없든지 전혀 생각이 없이 과시와 겉치장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런 문제요 교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신 이유는 “교회가 그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서로의 유익을 위해 그들이 서로를 돕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형제들을 세우기 위한 것”,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라고 고린도전서 주해에서 말합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교제
2012-01-18 00:04
24.xxx.86
`별똥별` 님이 선택한 글 입니다.
《Re》JuNick 님 ,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너희들에게는 또는 사도들에게는"
이라 제한하지 않고 "믿는 자들에게는"이라 하여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말씀(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의 명령인 복음전도
사명을 주님 오실때까지 수행할 의무가 있는 신자들에게도
권능과 보호를 약속하신 말씀이 적용됨을 명백히 밝혔고
그 시기를 특별히 한정하지 않으셨기에 막 16장 말씀을
사도시대 사도들에게만 해당되고 중단되었다고 해석할
근거가 성령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와 관련되어 언급된 표적과 은사는 오직 성령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나타나고 주어지는 것인데도 정욕을 위해
움직이는 거짓 사역자들이 그런 표적이나 은사가 자기들의
뜻과 계획대로 자기들이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시간에
구하는대로 반드시 되어진다 착각하며 은사 집회를 열어
사람을 모으고 쇼를 하고 이익의 재료로 삼고자 거짓을
광고하여 미혹하기에
말씀의 반석위에 서서 행하고자 하는 신자들은 성경의
교훈대로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영을 분별하고
그들의 거짓을 드러내어 경계하여 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과 관계된 은사들이 중단되었다는 신학
이론이 아닌 진리의 성경말씀으로!
오늘날의 방언은 모두 귀신방언이다 라고 주장하는 질문님이
아멘넷에 등장하고 준익님이 그것에 때를 맞추어 방언 중단론
,무익론 관련 글들을 펌하여 올리기 전까지는 아멘넷 논객들의
경계방향은, 성경을 오해하고 그릇되이 적용함에서 나온
무분별한 은사주의(인본적으로 추구,도취,탐닉) 이론과
은사주의 아류 운동(신사도 아이합 포함)을 향해 있었습니다.
방언 은사들을 성경에 교훈된 바를 넘어서 필요이상으로
강조하고 예찬하고 필수적이라 암시하거나 인위적으로
훈련하여서라도 어떻게든 해야한다는 주장 뿐 만 아니라
성경에 교훈된 바를 간과하고 방언 은사를 필요이상으로
무시하고 격하하고 무익하다 암시하거나 사람의 이론으로
중단되었다 하여 성경의 교훈을 정면으로 거스리고자 하는
주장도 함께 경계되어져야 하기에
성도의 유일하고 참된 교과서인 성경으로, 여러 신학 이론이나
운동을 검증 분별하여 그릇된 것은 경계시키고 배쳑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는 제가 그런 견해표명을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제게 어울리는 모습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저는 시대적 현상을 통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입장이 아니라
성경말씀으로 시대적 현상을 보며 적용하는 입장에 있으니
제가 표적이 될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똥별
말씀을 토대로 펼치시는 명쾌한 논증...
귀한 은사를 받으신 분이시죠, 교제님은...^^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별똥별
2012-01-17 00:26
98.xxx.205
《Re》잠긴동산 님 ,
흔히들 신사도파들, 극단적 신비주의 자들은 말하기를, 성경에 사단의 방언이란 것이 어디있느냐? 하면서 모든 이상한 혀꼬부라짐의 소리를 다 성령의 방언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귀신의 가르침"(딤전 4: 1) 은 어떻게 전수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후, 사단이 찾아갔을 때, 그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만한 사실입니다. 귀신의 방언이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어라고 하더라도 죤 맥아더 목사님의 연구에 의하면 그 또한 이방 잡종교의 귀신들이 흉내를 유창하게 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영적 현상을 믿으면 안되고,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검증을 하되, 하나님의 음성으로 우리 속에 각인 시켜주시는 말씀이 주입될 때, 그 말씀이 설사 예언적 형태를 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성경 말씀을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경은 완성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가감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라고 할지라도!!
게시판에도 올려두었지만, 다시 잠시 정리해 보면...
내가 지금까지 접한 동영상, 예언 글, 입신상태의 말, 치유사역, 금가루현상, 그리고 초자연적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등등…,이런 현상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상태도 모두가 다 똑 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같고, 다음 몇가지의 다른 부류로 분류해 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1.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마음이 앞서 신앙양심을 팔아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희대의 종교사깃꾼들(이런 류는 과거 박태선씨, 현대 전주의 윤율리아, 그리고 벤틀리나 그 외에 두드러진 다수의 지도자 급)
2.다른 성도들보다는 자신이 뭔가 조금 더 하나님과 가깝고 신령하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착각 내지, 신앙 교만이 들어있는 일반 성도 및 직분 자들
3.‘샤머니즘’적 신앙, (무당 종교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히 많음.) 이런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강한 육신의 소원이 있어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에 교회를 찾기는 했으나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일반 목회자들은 무능해 보여서 그런 것 같고, 눈을 두리번 거리다가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강사나 집회자들의 사단의 하수인에게 꼬드김을 당해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들
4.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목사님들 중에도 말씀만 해석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딱딱해 보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든 차,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꼬드기는 말이 논리적으로 들리고 이에 더욱 높은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느끼는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접하고 본 자료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같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에는 미혹의 영인 사탄이 실제로 신비주의 자들의 요구를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방식, 영계가 보이는 듯,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금가루가 흩날리는 듯 보이게도 하고 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의 대처 방법
1.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하거나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한다는 성경 말씀의 원칙을 무시하지 말 것 (계22:18_19절, 벧후1:20절 참조)
2.이적과 기사가 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성경이 말씀했으니 그 말씀에 따라서 반드시 영을 다 믿지 말고 말씀을 토대로 검증할 것 (요1서4:1절 참조)
3.천국과 지옥도 성경에 있는 만큼만 믿고 그 이상 다른 이들의 입신체험을 성경권위 위에다 두지 말 것
4.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할 것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이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인 쳐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누군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풀이할 때, 뜨거운 감동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눅24장32절 참조)
사이비지도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입신’이란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늘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 그리고 땅을 제집 안방을 드나들 듯… 쉽게 왕래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는 말들을 간증의 형태로 올려진 것을 읽어 볼 때,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어떤 특정인의 모습과 어떤 특정 교회를 올려주고 키워 주고 세워주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체를 검증없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 상태가 꼭 ‘입신’이다 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입신’이란 단어 자체는 이방 잡종교에서도 사용해 내려오는 단어로서 구태여 성도들이 도입해서 상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모든 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모두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잠긴 동산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은 필요없는 것이 되는 건가요?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 1)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write25&command=body&no=157&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thomas
2012-01-16 23:10
69.xxx.142
치유에 대한 칼빈의 견해라고 하면서 기독교 강요에 나왔다는 다음의 말:
((한동안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선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치유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행사하라는 어떠한 위임도 받지 않았다.))
칼빈이 이걸 그의 주석이나 다른 설교에서 말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는 없는거 같습니다.
그 이유는 <치유> 또는 <병 고치는 은사>에 해당하는 gift(s) of healing을 healing으로 검색했을때 나오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위와 같은 언급이 없습니다.
<...이 가운데서 두가지는 일시적인 것이며 길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이게 전부입니다. 거기 두가지 중의 하나가 <치유의 은사>입니다.
반면 4권 19장에 gift of healing이 몇번 나오는데, 중세의 카톨릭 제도에서 healing한다고 카톨릭 교회와 사제들이 <성례>를 빙자해 기름 팔아먹으며 사기를 많이 쳤습니다.
4권 19장의 제목이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입니다.
20절 초두에: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름을 상징으로 삼아 그들이 받은 치유의 은사는 그들 자신의 권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란 것을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증거했다. 따라서 아무 효력도 없는 썩은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하는 자들은 성령을 중상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카톨릭 성례전의 허구를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기름..하니까 요즘도 사기치는 자들 생각나죠? 치유은사집회 한다며 기름부음이 어쩌구 하며 사기극을 벌이는 자들이 요즘도 횡행합니다. 이런게 한국(인)교회에 특히 심합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둘 때도 있습니다.
원래 라틴으로 쓰였고 불어로도 쓰였으니 원본을 원어로 검색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고침의 은사>는 원체 고유한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할 것입니다.
이런거 하나 주해를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붙인 한글 번역판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읽어본 사람도 없겠죠? 그걸 영어로 라틴어 원문으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해되는게 아닙니다.
이름아이콘 김성훈
2012-01-16 22:35
74.xxx.16
《Re》이선 님 ,
"전혀 연관성이 없는 개별적 사건들을 연결시켜 어떤 그림을 그리는 재능(?) 을 재밋게 관찰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름 어떤 논리가 정립이될때가 많읍니다."
-고향을 떠나 온후 이런 점에서 인정받은 것은thomas 님이후 이선 님이 두번째 입니다. ,어려서 같이 큰 친구들이야 어려서 부터 절 아니까, 이해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들리고 보이기 가 쉽습니다.
"제갈공명이 성경을 만났었더라면 어떠햇을까요? 그의 판단력에 변화가 있엇을까요? 과연 새로운(?) 은사적 지혜를얻기위해 철야기도를하고 도를닦고 교회봉사를하고 장군들을 이끌고 합심기도하고 예언기도를 구하고 했겟는감요?"
-삼국지를 그렇게 읽으시면서 , 제갈량의 '정보처리'능력과사람의 심리를 궤둫는 showmanship등, 생각 해 봐야 할 점이 많습니다.'Harry 가sally를 만났을 때 처럼
"제갈공명이 성경을 만났었더라면 어떠햇을까요? " 바람을 부리는 것처럼, 방언을 하는 '쇼'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판단력은,상황분석과 정보처리의 종합선물셋트 입니다. 시간 날때, 한 번 쓰겠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thomas
2012-01-16 12:28
69.xxx.142
자이언츠가 이겼습니다. 다음주엔 교제님 동네의 49널이들 차롑니다! 이게 다 교제님(수정적 개혁주의)과 토마스(역사주의적 개혁주의)를 아멘넷에 "게시"한 김성훈님 "표딱지" 때문입니다.ㅎㅎㅎ
오늘 별똥별님 칼럼을 다시 읽어보니 아래 쓰셨던 내용이 칼럼 본문에 올라와 있고 덧붙인 내용이 있어서 몇가지 사실을 지적합니다.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치지요>
<--교제님! ((수정적 개혁주의))에서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칩니까?
<성령의 인도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 말은 천만부당한 낭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 말씀에 의거한 체험>
<--이건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한두번 있음직한 체험입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그걸 성서적으로 소화시킵니다. 그게 별게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음성"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거지요.
그 음성이 성대가 뇌신경의 의지적 명령에 따라 신체 에너지에 의해 진동되고 혀/입/입술의 구조/모양에 따라 조절되어 공기분자를 진동시키며 longitudinal wave 형태로 에너지를 전달하여 그 파동이 듣는자의 고막을 같은 파장/주기로 진동시켜 "체험"정보가 축적된 뇌신경에 의해 해석되는 음성과 동일한 음성으로 자주 듣는다면 큰 문젭니다.
그게 일상적 음성이 아닌게 확실하지만, 그런 증상이 자주 발생하면 목사님이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서 상담해야 합니다.
***다음은 방언과 은사에 대해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온 말씀입니다. 자의적 해석에 의해 성경말씀이 왜곡됨을 사실적으로 지적하는 것이고, 무슨 "역사주의적 개혁주의"에 의한 주장이 아니니 성경에 나온 글자로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막16:17 <새 방언>=<새 방언> ≠ 영언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ㄱ) 신약성서에는 dialects가 쓰이지 않았습니다. NASB같은데를 보면 사도행전 3곳에 dialect라고 나오지만 KJV에는 그것마져도 tongue라고 나옵니다.
오히려 διάλεκτω가 행2:6에 쓰이는데, 거기 <각각 자기의 방언>이라고 우리말 개정역에 뚜렷히 인쇄된 글자가 "외국어"를 뜻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요? 그게 문제의 행2:4에 나오는 방언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행2:4의 <방언>=<다른 언어>=외국어 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ㄴ)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도 마찬가지로, 영어문법을 가지고 헬라어 단어를 끼워맞춘 이상한 헬라 단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παράξενη <--이게 아마 παρά[δο]ξενη의 δο를 빼먹은 듯한데, 그나마도 용법이 전혀 틀렸습니다.
"파라독스"라는 말은 우리말에도 거의 고유명사처럼 됐지요? "역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중요한 말이고, 여기 또 댓글로 도배해야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장자의 글을 보면 이말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솝이야기의 토끼-거북이 얘기가 바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킬레스-톨토이즈 얘기 카피본으로서 파라독스에 관한 얘깁니다.
여하간 성경에 παράδοξοσ는 "contrary to the received opinion"이란 뜻으로, 눅5:26에 쓰일 때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는게 그걸 목격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개정) <신기한 일>(새번역) 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strange하다기 보다는 "기이하다", 즉 그당시 사람들에게는 더러 존재하는 사건에 대한 평범한 해석, 그러니까 중풍병자가 침맞고 굿하여 차도가 있는 듯~말듯한 경우는 가끔 있지만, 예수님이 행한 일은 그것들과 구별짓는 유니크한게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내용 외에도 예수님이 <예수께서...이르시되>하신 말투가 어쩌면 그들에게 더욱 오펜시브하게 들렸을겁니다.
<주(יהוה)님이 말씀하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다> 이런 문장구조가 아주아주 중요한데 이건 다음에...
여하간 strange language같은 용법은 애당초 헬라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알려드립니다.
(ㄷ) 고전14: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걸 새번역으로 보면 <tongue 혀>란 말이 나와서 또 방언을 공공연히 즐기는 사람들이 홀까닥 할 수 있겠죠?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방언[다른 말(난하주)]을 하는 사람의 혀와 딴 나라 사람의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은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여기 <율법에 기록된 바>는 이사야 28장 11절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개정)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씨와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을 가르치실 것이다.>(새번역)
고전14:21에 나온 <헤테로글로싸>를 <다른 방언>으로 번역하면서 <다른 나라 말>(사28:11)로 이해합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서가 LXX에서 어떻게 쓰였고 히브류성서와 왜 다른가 문제삼기 시작하면 댓글이 정말 길어집니다. 저도 지겹습니다!^^*
(ㄹ) 사실적으로 틀린 것보다 이런식의 논리가 더 문제입니다.
(2) 사도행전 2:4 <다른 언어>(개정) <방언>(새번역) = <다른 언어> ≠ 영언/하늘비밀언어
자 여기 아무 의견 없으시죠? 문자적으로 성경적으로?
(3) 행2:4에 나오는 "방언 말하기" 헬라어 본문은, "글로싸"가 "말한다"의 목적어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tongue라고 영어로 쓰였다고 묘한 느낌을 받지 말고, mother tongue(모국어)하지 않습니까? 옛날사람들의 표현방식의 차이로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말로 "혀를 놀린다"같은 표현이겠죠?
한편 고전 14장에 쓰인 <방언>이 행2:4이나 몇몇 장소에 나온 "외국어"라고 우기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고전에는 <방언>이란 단어가 "말하기"와 한덩어리같이 사용돼서, 이럴경우에 동일한 사용 례를 그때 당시의 문서들에서 찾아 참고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때의 문서들에 그런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4) 흔히들 BDAG이라고 하지요? 보수적/진보적 가릴 것 없이 신약성서와 초대기독교 문서에 나오는 헬라어 Lexicon입니다. 거기 아주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지만 고전14에 등장하는 방언은 "an utterance outside the normal patterns of intelligible speech"하면서 관련 성구를 다룹니다.
거기도 언급되지만, 막16:17절과도 관련해서, 제가 두어번 말한 불트만의 강연집 Jesus Christ and Mythology(제목만 보아도 두드러기 나시죠?) 언급된 궁켈이 쓴
thomas 에고..(위에서 계속) The Influence of the Holy Spirit 이 책은 궁켈이란 사람이 쓴 성령의 은사에 대한 기념비적 연구입니다. 이것도 궁켈이란 이름 때문에 나무목사님께 야단 맞을지 몰라서, 그리고 몇년은 여기다 써대야 할테니 자제하겠습니다.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거 같은데 Weizsacker라는 분의 Das apostolische Zeitalter엔 좀더 많은 자료가 잘 정돈되었나 봅니다. 1/16 12:46
69.xxx.142
thomas 거기에 보면 본문비평을 떠나서 다소 이해하기 편한 역사적인 관련자료를 언급하며 헬라어 본문을 설명하며 언어학(성서?)적으로 마가복음에 나오는 <새 방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여하간 이분들의 연구업적을 어떤 류의, 또는 주의/론에 근거ㅎㅎ한 분들이 소화해내기가 쉽지 않을겁니다.
저는 이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기나온 헬라어 본문에 대한 이해나, 성서와 관련된 자료들과, 기독교적인 문화를 배경으로한 유대교와 서양문화 관련부분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어찌하였든지, 우리말 성서를 번역한 사람들이 한글과 관련된 문자적인 의미를 가장 잘 알 것이라 믿고, 그들이 우리말 성경을 번역할 때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리하였다고 믿습니다. 또한 서구의 헬라어 전문 학자 신학자들이 별 견해차 없이
1/16 12:53
69.xxx.142
thomas 상당히 분명하게 설명한 성경구절들은 그대로 읽고 이해하는게 군자의 도리라고 생각해서 몇자 적었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JuNick
2012-01-15 20:18
69.xxx.95
우리가 남이가? 이 토론이 끝나면 서로 웃으면서 각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별님이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가지만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제가 뺑덕이 역활을 할까요? 하여튼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좋은 말씀들을 올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두 분이 수고하시는데 저는 지켜보면서 고린도 전서 12-14장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The Argument of 1 Corinthians 12-14
http://bible.org/article/argument-1-corinthians-12-14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 시대의 기적이 그 후의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기적을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 전체를 통틀어서 성령과 관계된 신자를 향한 명령은 오직 다섯 부분만 있을 뿐입니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으로(안에서) 기도하라"(유 20)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을 구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존 맥아더
은사는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방언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성령으로(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방언으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기도한다면 하나님도 이해 못하실 것이 뻔합니다. 성령은 때 쓴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세에는 사단이 일어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이 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제 저는 <다 방언 말하는 자겠느냐>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찬미 기도를
하게 인도하시는 이도, 성령안에서
방언은사를 받은 자의 그 영으로 찬미
기도하게 역사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 마음이 평안해 질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1/15 20:50
24.xxx.86
교제 성경은 그 어디에도 사도시대 일어난 표적,이적이
사도시대로 중단되거나 또는 사도시대 이후로도
계속될 것이라 직접 교훈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날 표적들을
막 16장에 언급하셨고 그 표적과 관계된 은사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질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성령은 그 뜻과 계획에 따라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신자들을 통해서 표적이나 이적을
나타내실 거라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요 복음전도자로 부름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질 권능과 보호의 약속들이 열거되어 있다.
예수는 당신을 주로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요 14:13),둘째는 천국복음을
지상에 편만케 하기 위하여 능력있는 후원자로
역사하신다(빌 4:13)] 1/15 21:00
24.xxx.86
교제 사단의 역사를 따라 나오는 것은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 뿐 만 아니라 불의의 모든 속임도
있으니 진리인 말씀으로 영적인 분별을 하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지 치우쳐서 사도시대 이후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나오는 능력과 표적과 참
이적은 더 이상 없다라는 사람에게서 나온 이론을
설파하라는 것이 아님, 1/15 21:29
24.xxx.86
교제 견해차이로 가족과 아무리 치열한 변론을
한다해도,때로 불편해지고 감정이 상한다해도
가족은 가족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헤어졌다해도 서로를 향한 마음은 미움이
아니라 염려와 사랑일 것이고 그렇게 인도하시는
이가 우리 한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지요.
제가 여기서 대동소이할 수도 있고 대이소동할
수도 있는 은사관으로 여러 분들과 좀은
심각한 변론을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복음송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가족^^
http://www.youtube.com/watch?v=E280L4wNs0s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교제
2012-01-15 18:08
24.xxx.86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개떡같이 얘기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소립니다.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은사주의를
경계하는 말로서, 은사주의는 은사중단보다 해악이 훨씬
크구요 그 파국적 결과는 은사중단이 주는 부작용과 비교가
안됩니다.]
->같은 논리가 은사지속론자들에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은사지속이라는 말은 은사중단주의를 경계하는 말로서,
은사중단주의는 은사주의보다 해악이 훨씬 크다.
그 파국적 결과는 은사중단이 주는 부작용과 비교가
안된다 라는 식으로,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나 비 성경적인 은사중단주의나 교회에
미치는 해악은 어느 것이 가시적으로 더 부각되어 보이느냐의
차이일 뿐 , 관점과 입장 차이에 따라 상대적인 “보다 크고”
“보다 작고”의 비교급으로 논하여 기울기를 선택할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에 기존의 은사주의와 은사중단주의를 성경적으로
검증,수정하여 보다 성경적인 이론과 주의로 개혁시켜 나가는
것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바라 생각합니다.
아멘넷에서 [방언중단론--방언귀신론]을 주장하는 질문님
준익님이나 넷상에서 [방언 필수론-방언구원론]을 주장하는
분들이나 모두 방언을 말하는 것을 체함한 분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때 같은 체험을 하고도 그렇게 견해가 극과
극으로 다른 것은 그 분들이 체험에서 나온 이론을 진리인
성경말씀보다 더 집착하여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사주의 잡는다고 성령의 은사받아 잘 활용하는 성도들의
은사까지 잡아야 할까요? 그릇된 신학이론으로 성령의 불을
소멸시키는 시도를 해야 할까요?
악을 원천적으로 궁극적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선이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 악이 아니기에 잡는 방법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모든 성도에게 특별히 사모하라고
하고 금하지 말라고 계시한, 지체와 몸의 덕을 세우는
은사들을 누가 어떻게든 사모하지 못하게 막고 금하게
하려고 성경 말씀에 반하는 신학이론을 들이밀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의 덕과 몸된 교회의 덕이 세워짐을
훼방하고자 하는 사단 아니겠는지요?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모든 성도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특별히 교훈한 지체와 몸의 덕을 세우는 은사를 누가
어떻게든 그릇되이 추구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케 하고 거짓 것을 믿게 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의 덕과 몸된 교회의 덕을 허물기
위해 훼방하는 사단 아니겠는지요?
사단의 미혹은 어느 한 방향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니
신자들은 좌로 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성도를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주초를 두고서 바르고 건전한
은사관을 정립하고 각자 받은 은사들을 성경의 교훈따라
활용하여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시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thomas
2012-01-15 15:50
69.xxx.142
개(혁)신(앙)교가 말하는 개혁"주의"者는 골수 <은사>론자입니다.
개신교의 은사는 (1) 성령-주(그리스도)-(성부)하나님 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고, 그걸 선물(은사 gifts)로 거저 받으며 (2)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표현하는걸 특징으로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그리고 그게 (3) <공공 이익>에 봉사하는 일(직분/직업/일상생활)이라는 시금석을 통해 가늠된다고 했습니다.
은사/선물/은혜를 칼빈의 말을 빌어 설명하면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이게 성령님을 effectually resisted 할 수 있다는 (불건전하지 않은)아르미니안주의에 반하는 The Efficacious Call of the Spirit 또는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를 말한 개혁주의 <은사>관 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개혁교회와 은사는 서로 상충되는게 아닙니다. 이건 불건전하지 않은(저의 표현) 또는 "heart"가 아르미니안주의(Alan P. F. Sell의 표현, 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1983)인 기독교인들 보다 훨씬 강한 <은사>에 관한 선언입니다.
개혁주의자는 이 세상이 창조된 첫날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그날까지 은사로 태어나서 은사로 살며 은사로 세상을 정복하다가 은사로 죽어 주님을 맞이하는 은사주의자입니다!
heart가 아르미니우스라는건 head가 아르미니안주의인 semi-펠라기우스와 구별하려고 붙인 이름입니다. 오순절교의 신학자인 Roger E. Olson <Arminian Theology: Myths and Realities>이란 책에 나온 표현인데, 이걸 읽고 저는 오순절교회 신학의 긍정적인 면, 그러니까 펠라기우스적이고 head펠라기우스인 아르미니안니즘을 분리해서 웨슬레가 의도한 "마음이 아르미니우스"적인 "거룩함 추구" 또는 perfection thingies로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개혁주의 은사론의 문제는, 소위 칭의-성화-영화..등등으로 세분한 총체적 구원론에서 예수믿는다는 자의 꼬라지가 전혀 아니올시다..하니 그의 구원을 철석같이 담보한다는 칼빈의 이론에 의문을 던지는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화같은 거룩함 같은걸 어떻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교화(edify)하느냐..하는 측면에서 <은사> 등을 포함한 다소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된 인간의 <호응>을 강조하다보니, 한편으로 오감을 통해 감지되는 어떤 성화의 "증거"를 <모조>하는 껍데기 "표적" "계시"로서 방언같은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도 소위 보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목사들이 비대교회가 되어가지곤 자식들에게 교권을 물리고 방자한 삶을 살면서 부패하니까 그들이 표방한 신학이 쓰레기 취급을 받는거겠죠. 이들이 형편없는 목사이며 개혁신학의 ㄱ 도 이해하지 못한 head fake 직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한데 거룩함의 perfection을 추구하는 감리교를 보면 더 어처구니없을 때도 있습니다? 여기 아멘넷에도 크게 사진에 난 자는 딴짓하는데 perfection이지요?
은사와 거룩함의 perfection을 근본으로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개혁주의가 한국에서 아주아주 형편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걸 저는 아멘넷을 통해 실감했습니다.
그렇다고 조용기 목사를 필두로 하용조 목사와 그 잔챙들이 펼치는 방언과 각종 "은사" performance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은사라고 믿지 않습니다.
...자이언츠 풋볼 보고 (이걸 여러 사람과 같이 보면 이웃들간에 소통하시는 성령님이 주신 사랑이 흘러넘칠 수도..ㅋㅋ) 내일 계속합시다!
Let's Go Giants!!
이름아이콘 thomas
2012-01-15 09:58
69.xxx.142
《Re》교제 님 ,
교제님 글을 대할 때마다 제가 평소에 생각지 못한 여러 측면을 지적해주셔서 늘 돌아보아 배우고 성숙하게 하시는 성령님 은사의 풍성함에 거하게 하시는거 같습니다! 학하야 시로 습하면 또한 열홉디아니랴! ㅎㅎ
(1) ((성경적인 분류를 간과하고 신학적으로 그렇게 분류를
시도하다보니 기존의 은사중단론같은 논란적인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고))
하시며
((성경에 열거된 은사(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은
그 기능과 작용에 따라 성경이 이미
1.직임적 은사(주께서 세우시는 은사)와
2.역사적 은사(성령이 나누어주는 은사)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1.직임적 은사 2.역사적 은사))는 고전 12:4-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아마 그 구절은 은사의 분류법이라기 보다 오히려 성령-주(그리스도)-(성부)하나님으로 쓴 <성령의 은사>에 대한 "삼위일체적" 표현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성경에 나오는 은사의 나열을 보면 은사-성령 직분-그리스도라는 고전12:4-의 대조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전7:7에서 결혼(독신)을 은사라는 다소 엉뚱한 지적은 차치하더라도, 고전12:28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27절)이라는 전제하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하면서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나옵니다.
그런데 <능력을 행하는 者>는 직분者 같은 뉴앙스를 주는데 바로 뒤에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하며 <돕는 것 (집사-봉사의 직분) 다스리는 것 (장로/목사의 직분??)>과 함께 직분과 연관이 가장 먼듯할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왔습니다.
여기 나오는 <방언>은 행전2:4 우리말 성경 난하주에 나온 방언, 그러니까 교회가 보편적--사도신경에 나오는 <공회>라는 뜻으로 저는 사용하겠습니다. 이를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쓰이지 않았더라도!--으로 <다른 방언>이라기 보다 고전14:2에 나온 <입신 상태에서 상태에서 하는 알수 없는 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전12:28-에 연이어서 29, 30절에 사도 선지자 교사의 "직분"을 열거하면서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방언을 말하는 者...통역하는 者...>라며 "직임적 은사者"라고 이해할 수 있는 언급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분류를 간과하고 신학적으로 그렇게 분류를
시도하다보니))
<--성경적인 분류가 "직임적--역사적"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으므로 "전통적인 신학적" 관점에 문제가 있는게 아닙니다.
(2) 방언이 "표적적"인 기능과 함께 "계시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는 말은 어떤 방언을 통변한 내용이 어떤 예언적 계시를 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방언을 동반한 "예언"에 따른 각종 현란한 현상 자체가 계시가 임한 표적이라는 해석 때문입니다.
흔한 논란 중 하나는 요엘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같은 말씀을 들어 <<오늘날>>도 <장래 일을 말할 것..꿈을 꾸며..이상을 볼 것..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사역)>을 방언/예언 <은사>를 받아 시연할 수 있는 <者>로서, "방언 직임者"로서, 동시에 사도적/예언자적 권위를 "표적"하며 "계시"하는 예언/방언 은사를 시현해 보인다는 말입니다.
교회 갔다와서 계속합시다~^^*
thomas 아 참고로, 한인 성도들이 특히 부족한 성서이해 중 하나는, 예를 들어 엡4장에 <사도로 [주셨고]..선지자로 [주셨고]..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주셨으니]>다고 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우리는 명사, 가령 <덕> <은사>..요런거에 눈길을 주지만 사실 바울사도가 그런걸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런걸 기록할 때 <주었다>하는 표현 방식에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이건 다음에...
여하간 제 말의 요지는, 은사gifts는 주는거 아닙니까? <은사>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려면 더 큰 근본적인 기독교적 관점으로 비추어봐야 한다는 소립니다.
지금 어떤 종교인들이 경험하는 어떤 종교적 현상이 사도바울이 기록한 그 말씀과 대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걸 명심하면 몸에 보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1/15 10:14
69.xxx.142
thomas 결혼(독신)의 은사도 주면 받을만한 사도직분자 바울에게 성령-그리스도-성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1/15 10:19
69.xxx.142
thomas 신약성서에 나열된 은사들 중 <지금> 뭔지 모르는, 또는 참된 그 은사의 구체적 실체를 모르는. 또는 "중단"된 진짜 은사라 하더라도, <은사>의 근본적인 특징은 <주어진다>는데 있습니다. 그럴땐 누가 주었냐? 하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기적>이란 것도 예수님 시대에 기적이다 아니다가 관심사가 아니라, 누가 그 기적을 행하게하였느냐? 이게 관심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한 귀신을 쫓아내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이 진짜다 가짜다 하는 의문을 던진게 아니라 그게 바알이 하게한거냐? 하며 예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이라는 표적을 통해 계시된 메시야"직"에 도전한 것이지요.
<은사>가 이러저러한 것들로 가짜/진짜가 있다는 질문 자체가 성서에서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런걸 준 분이 참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1/15 13:03
69.xxx.142
thomas 은사가 gifts지요? 그걸 특징짓는, 또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건 (1) 그게 무엇이든 성부-성자-성령 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는가 (2) 그게 gifts라는건 거저주어졌다 또는 은혜이다..이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끼를 못알아듣는 고린도사람들에게 실천적인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게 (3)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찰떡같죠?
(1) (2)이야 신나는김에 저마다 자기껀 다 진짜라고 우기겠죠? 그러니 그걸해서 과연 <공공 이익>에 적합한지 점검하라고 했습니다.
방언이 개인을 위한거고 예언이 교회를 위한거라고 성경에 분명히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통변해서 혹시나 교회에 덕이 되었다며 그말씀을 물타기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우길땐 통변을 여럿 세워 그걸 검증할 수 있습니다. 통변자도 분별할겸. 1/15 13:47
69.xxx.142
thomas 그래서 직임적 은사가 아니라 할지라도(성서에는 명확한 구분 없이 나열되었고, 누가 <주었다>라는것과 그게 주는자의 <은혜>다 라는게 성서적 분별법이라 다시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는 어떤 특별한 표적/기적/이사 등을 "반복적"으로 시현할때 그 수혜자 또는 퍼포먼스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상당히 "직접적"인 표적을 계시하는 멧신저가 되는겁니다.
이런 무리들을 보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며 예수님 당시에 기록된 구약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사도행전 같은 때의 사도적 은사와 기적이 신약성서를 기록하는 권위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였다고 한다면, 그런 은사들은 용도를 다 했으므로 별다른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1/15 13:59
69.xxx.142
교제 역사주의적 개혁주의 은사관에 입각한 분들은
직임과 은사에 대해서 토마스님처럼 해석하고
분류하는 것이 전통적, 성경적이라 주장할 것이고
수정적 개혁주의관에 입각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은 저처럼 성경을 해석하고 분류하는 것이
성경적이라 주장하고 그런 은사중단론을 성경을
오해한데서 나온 그릇된 이론이라 주장할 것입니다^^
1/15 18:07
24.xxx.86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교제
2012-01-15 07:58
24.xxx.86
《Re》thomas 님 ,
[성령의 역사(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하실땐 성령님이 하시는
일(事)의 기능이 "계시적(나타남)"인 특성이 있다는 말이시지요]
->"성령의 나타남"에 대한 성경(개역/NIV/KJV/NASB)말씀을 보면
<또 역사(working/operations/effects)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works/worketh/works)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공통:manifestation of the Spirit )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manifestation-나타남,표시,표현 ,현시
성령의 manifestation의 의미를 성령의 사역과 연관지어 "계시
(revelation)적인 특성이라 하는 것은 해석하는 자의 자유겠으나
저는 문맥적으로 그 의미를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성도와 함께 하시며 일하시는 것을 나타내 보이심"이라 해석하고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도와 선지자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 계시된 바가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는 모든 시대 성도에게 전달되록
역사하신다고 보는 바이구요.
[모세율법 얘기가 무슨 연관이 있나 아리송하지만^^]
->모세오경도 광의적 측면에서는 율법(토라)으로 간주되나
모세오경을 모세오경이라 하여도 신학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듯
사도 선지자 직임도 광의적 측면에서는 은사(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나 사도 선지자 직임이라 해도 성경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그 예로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 은사를 논할 때 "계시-표적-교회"라는 관점은 전통적인
신학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방법으로서...
나무님이 "계시"를 말씀하실땐 은사의 "기능"이랄까..
교제님이 ((나타남))으로 이해하신 성령님의 작용의 한
특성을 뜻하신 것으로 저는 이해했고, 그게 일반적인
신학적 접근방식입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성령의 "사역,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저의 견해는 고전 12:6-7절을 통해 이 글 서두에서 언급했고...
역사주의적 개혁주의에 따른 전통적인 신학의 관점, 기존의
은사중단론에 입각한 일반적인 신학적 접근 방식은 아마도
그럴 것이나 그런 신학이론으로 기울지 않는 균형잡힌 신학적
접근 방식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방언은
1.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
2.믿는 자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한 은사
3.지체의 덕을 세우는 기능과 통역이 더해지면 몸(교회)의
덕을 세우는 기능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여라 그러므로 방언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
네가 영으로 축복할때에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위 성경말씀에도 설명되었듯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방언(고전 14:2)에 통역이 더해지면,
그 개인의 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 기도와 찬미의 내용이
다른 지체에게 알아듣게 전달되어 결과적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으로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전달한 주의 계시(하나님의 말씀)
는 방언,방언통역,예언의 은사가 모두 건덕에 관계된 은사라는
것이고 그렇기에 모든 성도가 사모하고 금하지 말아야 할
은사임을 교훈한 계시이지 그 은사에 계시적 기능도 있으니
모두가 계시를 받는 사도나 선지자 직임을 맡을까 염려하고
금하라는 계시가 아닙니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그 영으로 말하는 기도, 찬미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사도와 선지자)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인데 그것을 혼동하기에
방언이나 방언통역을 자의적인 계시의 수단과 도구로 오용
하고자 하는 경우가 생기고 방언,통역을 계시적 은사라
하여 중단론으로 금지시키려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성경에 나열된 은사들은 "계시"와 "표적"이라는 관점에서
그 은사의 기능/작용을 분류하여 경우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령 <병 고치는 은사>는 "표적"적인
특징이 많겠지만 그걸 통한 "계시"적인 해석이 따를 수도
있겠지요....]
->성경에 열거된 은사(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은
그 기능과 작용에 따라 성경이 이미
1.직임적 은사(주께서 세우시는 은사)와
2.역사적 은사(성령이 나누어주는 은사)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일에 필요한 직임자를 불러
세워야 하고 각 직임자들에게 그 일을 행하는데 필요하고
유익이 되는 은사를 주어야 하는 것이니 모든 직임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은사를 받은 은사자들이지요.
성경적인 분류를 간과하고 신학적으로 그렇게 분류를
시도하다보니 기존의 은사중단론같은 논란적인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고 더불어 이런 신학적 변론도 진행중^^
[그리고 "계시"라는 특성이 사도/선지자의 직분에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은사들>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중에
어떤걸 열어주면 판도라상자를 열게되어서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까지 나아가는 문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나무목사님의
지적은 옳습니다.]
->그 판도라 상자에 "계시"라는 특성은 사도 선지자로 세움받은
은사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은사자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비밀이라도 담고 있어서 그것의 열림을 막기 위해서
그러신다는 것인지...주께서 세우신 "사도 선지자" 직임이
중단되었다고 하면 그 판도라 상자가 열려 사도 선지자직분으로
가는 문도 결국 열리지만 방언, 통역 ,예언같은 건덕적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하면 사도 선지자 직분으로 가는 문이 굳게 닫힌다는
것인지..
이미 언급했듯 직통계시를 받아서 사도적 사역을 한다는
신사도들은 사도 직임의 계속성을 주장하며 나온 자들이니
어느 것이 열어주고 어느 것이 닫는지는 분명해 지지 않는지?
은사중단론자의 신학적 이해와 달리 저는 사도 선지자
직임은사를 계시적 은사로 이해하였기에 사도 선지자
직임 중단론을 주장한 것이고 은사중단론자들의 신학적
주장과 달리 방언 방언통역 예언은사는 건덕적 은사이지
계시적 은사가 아니라 이해했기에 그런 은사 중단론이
비성경적이고 무익한 이론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만약 나무님이나 토마스님이 방언과 방언통역 예언의 은사를
건덕,표적 외에도 계시의 특성 또는 기능을 내포한 은사로
해석하여 사도 선지자 직임중단만으로는 자칭 사도 선지자
사역을 하는 자들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방언,통역,예언은사를 성경의 교훈을 순전히 받아 건덕적
은사로 해석하는 신자들은 방언,방언통역,예언을 자의적으로
계시의 도구나 방편으로 오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불의한 자들의
오용을 원천적 차단하겠다고 계시적 은사가 아닌 은사를
중단되었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thomas
2012-01-14 18:23
69.xxx.142
(아래 댓글 계속)
(아 얼듯 보니까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새번역 성서에 사도행전 2:4 <방언> 난하주에 <다른 언어>라고 쓰였고 고린도전서 12:10, 14:2의 난하주에는 <입신 상태에서 하는 알수 없는 말>이라고 나왔군요.)
"다른 언어"나 "알수 없는 말"이나 성경말씀에 나온 이런 언어가 담고 있는 실체가 오늘날 구체적으로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것들도 있으니 예수믿는 사람답게 일단 자세를 가다듬고 사리판단을 하며 신중했으면 좋겠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에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이 영어로 edify (교화하다)라고 쓰였는데, 이게 건축물 짓는데 쓰이기도 해서 <덕>이라는 내용이 생긴다기 보다, 그 사람 또는 그가 속한 집단으로서의 교회가 오합지졸이 아니라 기초가 든든하고 기둥과 벽이 견고하며 성숙한 모습을 한 결사체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우리 전통도덕에서는 덕을 크게 숭상하기 때문에 덕의 "내용"을 쌓을려는 경향이 있지만, 여기 이말은 덕스런 사람의 위용같은걸 말합니다.
한편 베드로후서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에 나오는 덕은 어떤 "남성적인 용기" 같은걸 말합니다. 우리식으로는 절제 인내 형제사랑이 덕에 다 들어 있지 않습니까? 덕이 있는 사람은 이미 인내와 절제를 아는 사람이지요?
여기서는 믿음을 옹호하는 어떤 분연히 일어섬, 아직 인내 절제까지 안갔으니^^ 다소 무모하더라도 용감하게 믿음을 변호하는 덕을 말합니다.
여하간 방언을 하는 사람이 나름대로 edify하여 내공이 강해져서 마방파를 쏘거나 권두운을 타고 공중부양을 하면서 우랑바리다라나~ 하는 "덕"을 나름대로 쌓는걸 누가 말립니까? 그게 고전 14장 말미에 사도바울이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라는 뜻이 아닙니까?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는 사람>이 공동 이익,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신 봉사의 직분을 바로 감당하는 충성된 종입니다.
개혁교회가 말하는 참된 직분과 은사는, 뭔가 안달내고 닥달해서 용한 자에게 받아다가 대박터트리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각종 사역이라 해서 교인들 취미사회생활하는 소박한 자기만족의 은신처/피신처에 자리매김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 자식이 이번 겨울에 와서 그러더군요. 신사도/뉴에이지 같은 기독교는 Facebook 신앙이라고. 자기와 자기 동아리에서 소소한 자기과시와 자기만족을 위해 나름대로 테두리를 정해놓고 상대방이 귀찮게하지 않는 범위에서 적당히 끼리끼리 관심을 보이고 자기들끼리 통하는 미친짓도 해가며 동변상린하고 노닥거리며 이해관계를 추구하는거와 같다고.
<병 고치는 은사>가 횡행해서 치유집회에 가서 고질병이 완치되고 소아마비가 일어나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단번에 일어나는 것도 좋지만, 개혁신앙이란 오랜 인내와 연단의 시공간 속에 펼쳐지는 지루하고 별 차도없는 듯한 평범하지만 치열한 struggle 아닙니까? 이게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직분을 수행하는 자의 충만함 아니가요?
병리학자가 되어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여 모든 어린이들에게 보급하여 오늘날 한국이나 선진국에 소아마비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신앙인들이 평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하는 하나님의 일이며, 이경우는 일의 성과가 있게된 덕스럽고 복된 일이 아닙니까?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개발도상국의 정치가로서 사회운동가로서 학교선생님으로서 필요한 재정을 예산수립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해서 벽지의 산촌 어린이들까지 예방접종을 성실하게 시키는 사회 제도를 구축하는 일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성령님이 주신 은사를 공동이익을 위해 올바로 사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참된 은사가 아닙니까?
이걸 평생걸쳐 하는게, 뭐 대단한 손바닥 마방파로 존귀한 사람을 뒤로 자빠뜨리며 각종 사기행각을 벌건대낮에 벌이는 은사광들의 대단한 내공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사실 진짜 예수믿는 성령충만함은 이런 은사와 직분의 좌절 가운데 있습니다.
개혁신앙이 말하는 은사가, 개혁교회에서 예수 믿는게 뭐 무슨기도하고 방언하며 안수한다며 손가지고 함부로 존귀한 인간에게 들이대는 경거망동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 주님이 부르신 소망 가운데서, 성령님이 주신 은사와 주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직분이 삐꺽거리는거 같다 할지라도 그때 한없는 추락으로 모든 삶의 기반이 무너진 듯한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진실로 의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이지 않습니까? 갖가지 공공의 부조리와 삶의 절망으로 가장 처참한 지경에 처했을 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공공 이익>을 위해 교회를 순결한 결사체로 단결하게 하는 평생동안의 일상적인 품위 있고 질서 있는 헌신으로 은사와 직분의 실패에서 하나님을 만나는게 그게 제가 체험한 개혁신앙입니다!
이름아이콘 thomas
2012-01-14 14:35
69.xxx.142
교제님,
좀 늦었습니다. 장도 보고 집안 청소도 하느라..ㅎㅎ
성도는 모두 은사자요 직분자라는 교제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모세율법 얘기가 무슨 연관이 있나 아리송하지만^^ 그 다음에 언급하신 은사와 직분(고전12:4,5)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신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얘기하려는 문제의 발단이 고린도전서와 관련되어서, 이경우 ((성령의 역사(성령의 나타남)와 관계된 은사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지적도 옳다고 생각해서 저도 이 ((성령의 역사))에 촛점을 맞추겠습니다.
한편, 논의의 촛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몇가지를 짚고 넘어갈게 있습니다.
(1) 사람들이 흔히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데, 여기서 "役事"라는 말과 흔히 쓰이는 "사역(使役)"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가 알아보고, 그걸 혼동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 뜻과 용도가 모호하다는걸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건 나무님이 지적하신 계시-표적-교회론적인 측면과도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정리하고 싶습니다.
(ㄱ) ((성령의 역사(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하실땐 성령님이 하시는 일(事)의 기능이 "계시적(나타남)"인 특성이 있다는 말이시지요? "사역"이란 말은 "남을 부려 일을 시킨다"는 뜻으로 성령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은사"라는걸 줘서 그걸 받은 사람을 부려 일을 시킨다라는 뜻일겁니다.
나무님이 "계시"를 말씀하실땐 은사의 "기능"이랄까..교제님이 ((나타남))으로 이해하신 성령님의 작용의 한 특성을 뜻하신 것으로 저는 이해했고, 그게 일반적인 신학적 접근방식입니다.
성경에 나열된 은사들은 "계시"와 "표적"이라는 관점에서 그 은사의 기능/작용을 분류하여 경우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령 <병 고치는 은사>는 "표적"적인 특징이 많겠지만 그걸 통한 "계시"적인 해석이 따를 수도 있겠지요. 반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예언함> 등은 "계시"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교회론"적 관점에서는 <지혜/지식의 말씀> <믿음> 같은 은사들이 두드러지겠는데 로마서에 나온 <가르치고 권위하고 구제하고 다스리는> 은사들은 직분들과 함께 단연 "교회론"적 특징을 가졌습니다.
((성령의 은사의 목록에 계시가 따로 없는 이유는 계시가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계시의 완성 종결은 곧 사도 선지자 직임의 완성 종결 의미))
<--은사를 논할 때 "계시-표적-교회"라는 관점은 전통적인 신학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방법으로서, "계시"가 은사나 직분의 목록에 들어있지 않아서 ((계시의 완성 종결은 곧 사도 선지자 직임의 완성 종결 의미))라는 교제님의 지적은 나무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신게 아닙니다.
그리고 "계시"라는 특성이 사도/선지자의 직분에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은사들>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중에 어떤걸 열어주면 판도라상자를 열게되어서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까지 나아가는 문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나무목사님의 지적은 옳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방언이 어쩌구 하는건 문제의 심각성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고, "자기의 부조리한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정당화할 우려도 있다는 말입니다.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개떡같이 얘기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소립니다.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은사주의를 경계하는 말로서, 은사주의는 은사중단보다 해악이 훨씬 크구요 그 파국적 결과는 은사중단이 주는 부작용과 비교가 안됩니다.
피터 와그너 같은 사람이 이걸 간파해서 나름대로 치밀하게 주장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사도와 선지자로 가려는 노림수를 미연에 차단하자는 것입니다.
(ㄴ) 성령-역사가 함께 나오는 구절은 개역한글 로마서15:18뿐입니다.
개역 한글과 개정이 상당히 다르게 번역된 곳 중의 하나인데, 개역한글은 18절에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으로 나오지만 개정에는 19절에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뤄졌으며]>라고 되었습니다. 개정이 문장구조와 더불어 원래 뜻을 정확히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개정에 [이루어졌으며]는 조그만 글자로 쓰였는데, 원문에는 없는 말로서 [unknown] tongue와 같은 용도입니다. 그러니 ((역사))라는 말은 첨가된 말입니다.
(ㄷ) 고전 12:4-를 자세히 보면, <<은사--성령, (봉사)직분--주(그리스도), 사역(일의 성과)--하나님>> 구도 입니다.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개정)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새번역)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직분을 보면 4:7에 <그리스도의 선물>이라 하고, 그 선물을,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같은데선 <은사>를, 분량에 따라서 은사/선물의 원뜻인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와 같이 "직분 은사"를 <주시는> 분은 주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준다>라는 헬라어는 반복되어 중요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주셨고],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주셨고],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주셨고],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고전12장의 <직분>이란 말은 새번역에서는 <섬김을 받으시는>라고 했습니다. 여기 직분이 <집사>라는 말의 어원과도 동일해서 <크고자 하거는 남을 섬기라>할 때와 같이 섬긴다는 뜻으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김으로써 은사와 직분의 궁극적인 존재이유인 <모든 사람을...유익하게 하려함(공동 이익을 위한)>(고전12:7)입니다.
(ㄹ) 고전 12장에 <사역은 여러가지나...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새번역에서는 <사역>을 <일의 성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 한자의 뜻 사역보다 원래 뜻에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을 되게하신다는 뜻입니다.
"사역"이라는 말이 한국교회의 유행어가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이것저것 사역이라 하며 일을 잔뜩 벌려서 이사람저사람 마구잡이로 시키니 "크고싶은 사람" "고급인력"이라며 설치는 사역자들로 엉망입니다.
(2) 교제님께서 "덕을 세운다"는 측면에서 은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는데 저도 찬성입니다.
저는 그걸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고전12:7)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로 받겠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thomas
2012-01-13 23:24
69.xxx.142
《Re》잠긴동산 님 ,
님의 간증을 읽어보니 아래 JuNick님이 달아주신 싸이트에 나온거랑 별로 다른게 없습니다.
http://blog.daum.net/back33/11816672
중간중간에 보면 잠긴동산님 얘기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것도 있네요? 기왕에 다음에 또 카피하실땐 거기 나온 사례도 카피하시기 바랍니다. ㅎㅎㅎ
아 그리고 자칭타칭 "크신분에다 고급인력"이신 여야님 또는 잠긴동산님, 뭐가 큰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말이라고 옮기는 님이나 그렇다고 하는 잠긴동산님 교회나 좀 그렇군요...
((이선님의 방언 이해에..))
((Apostle의 건의에 참지 못하고...))
<--이건 또 무슨 소리? 이사람저사람 끼고도는 버릇도 여전하시고?
잠긴동산 오늘 새벽찬송 찬 532장 마지막 가사
Is my name written there?
Yes, My name's written there. 이였습니다.
잠긴동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의심치 않기에
Yes, My name's written there.
찬송을 드리며 잠긴동산's written there.
꽉 붙잡았습니다.
하루 시작이 얼마나 기쁜지요.
예배후 기도를 드리는데 끔직한 동무
thomas님의 이름을 기억나게 하시므로
위하여 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thomas님의
본명이 무엇일까 갑자기 궁금해 졌습니다.
본명으로 구체적으로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아니었나 생각 합니다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면 위하여 계속 기도 하렵니다. :) 1/14 10:29
67.xxx.59
잠긴동산 "자칭타칭" 자랑이 될수도 있겠다? 접수 합니다.
앞으로의 간증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과감히 삭제 하지요.
성도에게 거칠것(교제님한테 배웠습니다)이라면 그만 할렵니다. 피차에 주고 받기 흥미가 없어졌습니다ㅎㅎㅎ 아멘넷에 접속한 이래 때때로 쓰게하신 잠긴동산의 간증이 10여편 이상 구석구석에 있지요. 받은 은혜, 간증 list를 만드는 중이기도 하지만 볼품없는 간증을 통해서라도 역사가 일어날 줄 알기에 감동하시면 때 없는 간증이 계속 될 것입니다 :) 1/14 11:05
67.xxx.59
이름아이콘 잠긴동산
2012-01-13 22:42
67.xxx.59
별이 사모님의 방언칼럼에 올렸던 방언간증 모음 입니다
이선님의 방언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Apostle의 건의에 참지 못하고 예전의 간증을 가감없이 그대로 올립니다.
" <방언>하는 사람이 있고, 방언이 그 사람의 신앙에 유익이 된다는걸 인정하는 것은 저로서는 큰 변화입니다. 한편 그걸 더 큰 테두리 내에서(카리스마타) 소화시킬 기회가 주어진 점, 주님께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
Thomas님 이번 칼럼을 통하여 배우게 됨을 주님께 감사 하셨듯이, 여야 저도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holykang님께서도 우리 모두가 주님께 감사 드림에 동의 하시리라 생각 합니다. 여야는 아멘 넷에 접속한 이후로 늘 holykang님에게 빗진 마음이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thomas님에게 빗을 지었습니다. 별이 사모님에게 더 큰 빗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차에 주고 받은 빗을 탕감 받기 위해서라도 비록 상대의 얼굴을 못 보나 주님께 드리듯 글을 주고 받으면 좋겠다 저 스스로는 다짐해 봅니다.
교제님은 제가 방언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하셨는데, 맞습니다. 이민 와서 신앙생활 하며 은혜를 깨닳은 이후 나의 행동반경은 교회, 가정, 직장 삼각지대를 벗어나 본일이 없습니다. 교회 중심적인 생활이지요. 당연히 수십년을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뒤로 잠그고 나오는 그러한 신앙생활로 모든 공예배와 부흥회, 특별집회의 현장에 제가 있습니다. 여야는 당연히 sanctuary 예배준비와 뒷정돈까지 담당 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세례 받고 기뻐 어쩔줄 몰라하는 여러 성도님들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1. 그 중에는 한국에서 갓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유학생활로 미국으로 와서 10년동안 공부하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부부박사 학위에다, 아들 딸 낳고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 부부가 성령세례 받고 금의환향하는 복된 성도의 귀환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성령세례 받고 기뻐서 얼굴에 홍조를 뛰며(신부의 얼굴에 연지 곤지 발라야만 있을법한 그런 홍조) 기뻐하는 모습, 자신이 처음 성령세례 받을 때의 담담하던 기쁨보다도 더한 기쁨으로 다가오곤 하던 기쁨, 세상에서는 맛볼수 없는 그런 기쁨 입니다.
2. 친한친구 사이에 성령세례에 대하여 공부한 이후, 부흥회에서, 한 자매는 성령세례 받고, 다른 자매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예배 후 성전에서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이를 아시게 된 목사님이“모든 죄를 자복하라 하며 안수를 합니다. 그 자매“주님! 잘못 했습니다. 주님! 잘못 했습니다”하며 째지는 듯한 절규의 자복이 있자, 그 자매의 입에서 따라락 하며 금속성 같은 소리로 방언이 터져 나올 때의 그 모습이 선합니다. 그 두 자매의 남편들은 한전에서 wasting house에 파견 나와있는 engineers 님들.
여야는 그 이후로 죄를 자복할 때 성령세례를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집회 후에도 나타나는 성령님의 민감한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 끝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3. 이미 주님 품에 안기신 김종기 목사님은 목사가 된지 7년이 되기까지도 성령세례를 못 받고 방언을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령세례을 간절히 사모하며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서 별을 세며 기도를 해도 방언을 안 주시더랍니다. 오순절 교회의 목사이기에 얼마나 더 간절 했겠나 짐작이 가는 대목 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에 흑인아이 하나가 성전에서 슬피 울고 있더랍니다. 아이가 슬피 우는 것이 어찌나 불쌍한지 그 아이를 껴 앉고 같이 기도하는데, 그리도 간절히 사모하던 방언이 갑자기 터지게 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4.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해 성도들 섬기기를 즐겨 하는 여 집사님, 목사님과 면담을 하는데 목사님이 “집사님은 음식으로 섬기기를 좋아하는데 그 섬김이 주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 하기 때문 입니다. ? 아니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할수 일이라고는 음식 만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기에 부엌에서 헌신하는데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시고 야단만 치시다니,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해서 예배실에서 기도 합니다. 독이 올라 주님께 하소연하며 기도를 하는데, 하고자 하는 기도는 안 나오고 말이 꼬이며 바라지도 않던 방언, 성령세례를 받음.
5.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는 감사의 눈물로 밤낮을 지새는 집사님, 성찬예식에서 반주자의 때롱하고 시작하는 반주에 맞추어 성령님께서 눈물 button을 누르셨는지, 동시에 눈물이 펑 쏟아지며 주체할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성찬위원으로 떡과 잔을 돌리던 집사, 그 후에 성령이란 단어에 눈을 뜨게 되고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가족수련회에서 방언 받기 원하면 앞으로 나오라 초청 합니다. 일착으로 앞으로 나가 산 땅바닥에 무릎 끓고 기도를 한다. 강사목사님, 성령님이 임하실텐데 모두들 죄를 회개하라고 외친다. 집사님 모든 죄를 자복하며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나는 잘못까지도 낱낱이 고백하며 회개 한다. 안수하며 무엇을 원하느냐는? 강사목사의 질문에.“방언을 원 합니다” 큰소리로 답해 외치며, 할렐루야를 외친다, 계속되는 할렐루야가 이상한 소리로 꼬이며 알지 못하던 소리로 기도한다. 사모하던 방언, 성령세례의 순간이다. 그 도시 교계에 급뉴스, 여야(잠긴동산) 집사가 요~오~란하게도 성령세례를 받았다더라.
여러 말로 방언 받은 예들을 열거함은, 은혜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에게, 주시고마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역사를 나타내고자 함 입니다.
여야 집사, 방언 허락하심을 감사함으로 새벽기도, 부흥회 때 열심으로 사용하던 중. 10여년 동안 사용하던 랄랄랄 방언, 한 순간 거두어 가시고 새로운 방언을 주셨는데, 순전한 각종 언어 방언 이다.
금요예배에서, 당시 가장 사모하던 말씀이 본문으로 선포되는 순간, 내 심장은 쿵쾅되며 온 몸에 전율이 온다. 예배후에 기도 시간이다, 자신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이 억제 당하여, 성령님께 붙잡힌 듯한 상태로 기도를 한다, 평소 같으면 기도한지 얼마 후 시간이 지나서 깊은 기도에 들어 갔을 때에야 나오던 방언이, 기도 시작과 동시에 컨트롤 할수 없는 언어로 나온다, 마치 audio cassette tape이 뒤집혀서 돌아갈 때 들리는 소리와 동일하다. 이렇게 새로운 방언을 받게 되었다.
별똥별 저는 가짜가 있으면 진짜가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가짜 방언이 저토록 활발하다는 것, 사단이 흉내를 낸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비록 극소수일지라도 성령님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있기에 그 부분을 흐리게 하려고 극성을 부리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여, 영적인 일은 주님의 영으로라야 깨달을 수 있는 법,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과 검증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잠긴동산님께서도 사단의 방언을 흉내내거나 강조하거나 거짓으로 자신을 우상화 시키는 삯군들을 분별하시는 분별의 은사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야님의 변화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keep it up~! 1/13 22:57
98.xxx.205
잠긴동산 "알지못하는 신" 에게 경배하는 곳에 사탄이 끼어들어 속이는 영적인 행위 존재 합니다. 사모님은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가짜 은사자들을 만나시는지요.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중에 몇%의 가짜 방언하는 성도가 교회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영분별? 믿음? 지식? 의 은사인지는 알수는 없지만 직분자로서 분별력과 통찰력을 허락하셔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흔들리지않고 진리안에 바로 설수있도록 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역사, 목사, 장로 를 2중으로라도 속여서 교회를 키 까불듯 흔드는 환희 들여다 보이는 듯한 사단의 역사에 "대적기도" 를 자주 합니다.
장로교단에서 80-90%?가 가짜라는 견해의 은사자들의 영향을 얼마나 받는지 알수없지만 하성에서는 10% 미만?의 알곡같은 은사자들로 1/15 23:19
71.xxx.202
잠긴동산 채워져 있어 사단의 역사가 횡횡하는 틈을 보이지 않는다 말씀 들리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은사론으로 정립된 은사자들이기에 사단의 졸개로 부터 영향을 받는일이 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베레아파들은 귀신을 ㅤㅉㅗㅈ아내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한다지만 하성에서는 선하신 성령님의 역사에 순종하며 따르는 교단이기에 이단에 빠지는 일이 염려하시는 것보다 흔하지 않습니다. 아멘넷을 접촉하고서야 횡횡하는 이단의 역사를 알 정도로 제 주위에서는 전혀 볼수가 없습니다.
이웃 장로교회에서의 김목사님 집회에 참석은 해 보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은사행위, 장로교회에서도 하는 같은 안수를 하되 조금은 의아하기도, 경이롭기도 한 빠져서는 별 이롭지 않을듯한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물결 지나가듯 흘러간후 다시 볼수도 없습니다... 1/15 23:48
71.xxx.202
별똥별 저는 정통 개혁교 출신인 것 아시죠? ㅎㅎㅎ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니까,
영적인 일을 가지고
인간이 퍼센테이지를 논하는 것은
어찌보면 옳지않은 것 같군요....
내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다 라고 외치는 신사도 파만큼이나...
몇 퍼센트인가...
오직 주님께서만 판단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당장에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내가 신령하다, 내가 치유 은사자다" 라며...
들어내 놓고 떠벌린다는 것이죠.
1/16 00:49
98.xxx.205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교제
2012-01-13 17:49
24.xxx.86
성령의 역사와 관계된 은사중 일부가 중단되었다는 면에
치중한 기존의 은사중단론의 부족한 관점을 보완하고
논란이 되는 신학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편이기도
하면서 사도시대 이후(정경의 완성이후) 교회에 무엇이
중단되었는지를 성경적으로 보다 분명하게 또 직접적으로
설명하여 자칭 사도와 자칭 선지자들같은 거짓 사역자들을
분별 경계시킬 수 있는 이론이 "사도 선지자 직임 중단론"이라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사가 아니라 직임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좋은 제안이기는 하나 한층 더 복잡해 지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와 의문이 신학적으로 제기되었기에 은사와 직임의
관계에 대한 제 이해를 조금 더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모든 은사자가 직임자인 것은 아닙니다]
[<예언>의 은사는 "직임"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지만,
<방언>을 수행하는 "직임"이 성서에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거 같습니다]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은사와 직임에 관계된 다음 성경말씀이 답이 될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27-28>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롬 12:4-8>
위의 네 구절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인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은사)을
받은 은사자요 교회에서 여러 섬김과 봉사의 일을 하게 세움
받은 직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도우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그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역사)을 주시는 것이니 모든 성도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은사자이자 교회의 일을 하도록 주께 세움받은
직임자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 가르치는 것,서도 돕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
모두 성도에게 주어진 것이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성령의
은사인 예언을 사모하고 개인의 덕을 세우는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금하지 말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하기를
사모하라는 주의 명령 역시도 성도에게 주어진 주의 교훈!
광의적으로는 모세 오경 전체를 율법으로 간주하나 일반적으로
"율법" 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613개 조항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모세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은사(gift)는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니
광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원도 선물이고(엡 2:8) 성령도
선물이고(행전 2:38)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여러 직임도
선물 곧 은사에 해당되지만 은사론에서 "성령의 은사" 는
주로 고린도전서 12장에 구체적으로 열거되어 언급된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함을 주시나니>처럼 주께서 세우신
직임으로서보다 성령의 역사(성령의 나타남)와 관계된 은사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존 맥아더나 개핀 같은 은사중지론 입장에 있는 신학자들조차도
사도 선지자를 은사로 간주하기 보다는 교회에 세워진 직임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사도, 선지자의 중단은 언급하면서도
중단된 은사의 목록에 직접 사도 선지자를 포함하여
"사도 선지자 은사 중단"이라 말하지 못했거나 아니했다는 것
으로도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에 제가 별똥별님의 이전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은사중단주의가 건물의 터가 되고 터를 닦는 사역, 곧
주 하나님께 직접 받은 계시를 전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사역을 담당하였던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 은사가,
계시의 종결과 완성을 선언하며 그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첨삭을 엄금한 요한계시록과 함께 중단되었다고 하는,
사도 선지자의 직임은사에 한정된 것이라면 성경적이니
경계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의 목록에 계시가 따로 없는 이유는 계시가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계시의 완성 종결은 곧 사도 선지자 직임의 완성 종결 의미
*성경은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움을 받은 성도들에게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은사를 사모하라 교훈한 바 없고..]
긴 글을 정리하자면
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교회에 세우신
여러 직임도,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어
유익하게 하시고자 그 뜻에 따라 나누어주시는 성령의 여러
은사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은사)이라는 것, 사도 선지자뿐
아니라 성도에게도 주어지는 은사요 그렇기에 성도에게 특별히
사모하라, 금하지 말라 명하며 그 기능이 따로 설명되어진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 방언 은사는 계속된다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모퉁이 돌이 되신 하나님의
교회의 터를 닦고 터가 되는 사역-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기록하는 사역-을 위해 주께서 교회에 첫째와 둘째로 세우신
사도 선지자 두 직임은 계시의 종결을 알리는 정경의 완성과
함께 그 사역도 완성되었기에 중단되었다는 것,
이런 복잡한 변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며 지루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나 이런 신학적 변론의 의의와 가치를 인지하는
분도 분명 있으리라 보고 지루해 하시는 분들께 죄송함을 전하고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이름아이콘 thomas
2012-01-13 12:27
69.xxx.142
《Re》나무 님, 교제 님,
저 밑에 나무님이 "은사와 직임"과의 관계를 언급하신걸 읽었을때 아! 싶었습니다. 전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건데, 그걸 나누어서 그 사이의 연관성을 따져보면 문제가 좀 더 분명해지겠다 싶었습니다.
교제님이 "은사 중단"을 "직임 중단"으로 해보는게 어떻냐고 하시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인데, 예를 들면 <삼위일체>같은 논의에서도 "인격"이란 말보다 "신격"이란 말이 적합하다...같은 제안입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는 "직임"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지만, <방언>을 수행하는 "직임"이 성서에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거 같습니다.
그리고 나무님께서 ((계시적인 측면과 표적적인 측면과 교회론적인 측면))을 언급하신걸 읽으며 정신이 번쩍들었는데 역시 목사님이시구나..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목사님께서 언급한 교회론적인 측면 중에 "교회사적인 후면"을 예로 들어서 문제의 복잡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피차간에 눈높이/차원을 맞추어서 대상을 설정하고 서로다른 가정과 대상을 조정하여 같은 평면에서 예언과 방언을 논함으로써 논의가 엊나가는걸 피해보고자 합니다.
클레멘트(로마), 순교자 저스틴, 이그네시우스(순교자), 폴리캅(순교자) 등이 쓴 서신들과,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이 쓴 anti-이단서들, 그리고 디다케 같은 2세기 문서들, 또한 그 뒤를 이은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유세비우스(가이샤랴) 등이 기록한 설교(주석?), 편지, 역사서 등은 사도행전 바로 뒤에 따라오는 교회사를 연구하기 위한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사료들입니다.
이들의 남긴 글과 함께 요세푸스의 각종 역사서나 그리스로마 신화영웅전 등과 함께 로마제국이 남긴 각종 행정 문서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요즘엔 이집트(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사용한 콥틱이라든지, 소크라테스와 그 이전 시대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마르크스가 학위논문으로 삼은 철학자) 등의 고대 희랍어 등 뿐만 아니라, 시리아 지방언어 시리악, 아르메니아 지방언어 등으로 번역된 초기(1~4세기) 신약성서들과 기독교관련 자료들, 또한 쿰란에서 발굴된 사해사본(대부분 히브리어)도 더하여 도데체 성서에 나타난 <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걸 연구해 놓은 귀중한 자료가 많습니다.
지난해 한국에서 뿌리깊은 나무라는 사극이 인기를 끌었나본데, 아시다시피 한글도 지난 500년간 변화가 심해서 쓰는건 물론이요 발음 자체도 상당한 미지수인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휘>에 있어서, 가령 논어 맹자에 나온 한자를 소릿말 한글로 어떻게 읽고 썼는지 제대로 정리되고 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뜻은 둘째로 하고...
율곡 이이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쓰고 소리내지 않고 훈하기를, <ㅎ.ㄱ ㅎ.야 시로 습ㅎ.면 ㅅㄷㅗ ㅎ.ㄴ 열홉디아니랴> (. -->ㅏ)했답니다.
일본의 오규 소라이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를 일본말 훈으로 읽는다고 하여(일본글은 이렇게 읽는 습관 때문에 고어의 뜻을 알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공자가 원래 뜻한 바를 말하는게 아니라는 <근대적>인 발상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자의 논어 해석이 불교 철학이 들어간 이원론적해석으로서 주자가 살았던 시대의 의미를 반영한 해석이지 공자 자신이 공자시대에 말하고자한게 아니라는 전제로 일본의 <근대>를 열었습니다. 물론 공자시대라 할지라도 공자의 글을 <기록>한 당시의 공자상을 그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공자 자신의 참뜻은 오히려 공자가 직접 쓴 <춘추>를 연구하여 공자시대의 풍습을 먼저 고증하고 논어의 뜻을 해석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후에 정약용에 의해 전통적인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해 보지만, 소라이처럼 전일본의 학문을 새롭게하여 권력자를 도와 정치에까지 적용하지 못한 한낱 귀향살이하다 죽은 소수파로 끝쳤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자기나라의 귀한 보배조차 제대로 집대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여하간 그 "방언"이 요 "방언"이 아니며 한국교회에서 하는 고놈의 "방언"과는 또 다를 수도 있음을 명심하십시요.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한자로 기록된 신라 향가를 한글로 해석한 양주동 박사를 기억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게 일제시대에 한 일본의 젊은 학자가 신라향가를 연구하여 처음으로 그 뜻을 밝힙니다. 그걸로 그는 당시 전일본(조선 만주 포함) 최고의 학자상을 받습니다.
하루는 양주동 박사가 똥투깐에서 그 기사를 읽으며 식민지배자 왜놈이 조선민족의 보물인 향가를 해석해내는데 조선인은 뭘하고 있는가..하며 울분에 차서 그날로 평양에 사는 누구를 발로 걸어 찾아가 관련 책을 얻어다가 연구하여 그 일본인 학자를 누르는 향가해석을 내놓게 됩니다...
지금도 양주동 박사가 남긴 해석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걸 보면 그가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보다 한국의 학자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더 듭니다. 한번 어떻게 양주동 박사가 "얄리얄라 얄라셩~"같은 방언을 통변했나 그가 쓴 글을 읽어보고 그나마 그 설명이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 한번 각자 자신의 한글 실력을 점검해 보시기를!ㅎㅎ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완간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을걸로 아는데(북한은 훨씬 전에 완간했습니다) 아직도 거기에 나온 관직이나 명령등 모르는 내용이 부지기수입니다.
요지는, 1000년전 제나라 말도 거의 모르고 500년전 자기시대 바로 전시대의 기록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는 지적수준에다가, 아직도 일본과 미국의 저급문화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2000년전 그것도 먼 동네 그레꼬로망 문화와 쥬대오크리스챤 사상을 언어/역사/철학 등의 광범위한 토대 없이, 게다가 주체적인 문화가 결핍된 날라리 문화에 흠뻑젖어 방방거리며 룰루랄라 나불댄다... 가소로운 소립니다!!
위에 언급한 2세기 문헌들에 <방언>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방언으로 추정될 수도 있을 가능성이 1%정도 될 말을 위에 누군가 언급할 때도 (오순절 교회가 대다수인 남미의 개신교에서 선교한 경험이 있는 교회사 교수 나그네님이 예전에 자신없이 지적하셨었지요?) 긴가민가... 그리고 이레니우스나 유세비우스 등이 heresy들로 정죄한 컬트들의 한 특징으로는 언급됩니다.
오리겐같은 사람들의 "삼위일체론"등을 문제삼을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초대교회 교부들이 남긴 성경해석들은 기독교신앙의 귀중한 보물로서 너무나도 귀중한 사료입니다.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1700년 전에 그동네에 살았던 당대 최고의 기독교 신앙인들의 신앙 수준은 지금의 상당히 기합빠진 허벌레한 신앙인들과는 기본적으로 차원이 다를 뿐더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수준과 지적능력, 물론 영성인지 뭔지하는 야리꾸리한 몽롱성에 있어서도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언어/철학/역사를 포함한 사람됨됨의 열심은 요즘 사람들이 좀처럼 따라가기 힘들겠지요?
여하간 이런 사람들의 방대한 저술에서 <방언>은 긍적적인 은사로 언급한 예가 하나도 없다는걸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반면 <예언>에 대한 언급은 많습니다. <예언>은 직임과의 연관성도 있으니 때맞춰 정리하신 별똥별님께 감사드리구요, 이걸 좀더 논하고싶습니다.
미동부에는 바람과 추위가 온다는데 다들 건강하시고 은혜로운 주말이 되시기를~
별똥별 ㅎㅎㅎ
토마스님은 탁월한 지식 정보를 바탕으로
재치와 유머가 돋보이는 멋진 분이셔요!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귀한 논객님이십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짐보
2012-01-13 11:14
207.xxx.35
별똥별님의 글을 읽는 것이 저의 기쁨이 됩니다.
성경을 풀어서 글을 쓰시는 능력도 좋아 하지만
무엇보다 공급하시는 이의 힘으로 글을 쓰시려는 간절한 심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이 비방받지 않게 하시려는,
그리하여 화평과 덕을 세우시려는 그 심정이 제 심정이 되여
패악한 세대와 시대를 말씀으로 말미암아 분별하고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약한자의 약점을 감당하시기에,
또 의를 위하여 자기의 의를 기쁨게 받지 않으려는 자랑이 없기에.
은사를 선물이라 성경을 우리를 깨우침니다.
믿음도 선물이라
자랑하기 보단 맡은 바 사명을 위하여
또 봉사와 믿는자로서의 교제와 덕을 위함을 헤아려 보면
우리에게 힘을 공급하시는 분 안에서
그 분의 뜻을 더욱 헤아려 보면
자랑할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을 다시금 합니다.
은사든 그 무엇이든...
공급하시는 분의 주권을
우리가 논하며 토론하는 장이
마치,십일조를 하여야 하나 마나의 문제(?)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청지기의 삶이 된다면 무의미 하듯이
그런 방편으로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내놓습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신앙의 본질을 묵상하면서
받은 것이 족하다는 고백을 또 다시 합니다.
평안하시기를.
별똥별 짐보 형제님께서
남겨주신 격려의 말씀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 앞이 흐려오네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지켜보아 주시니요...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교제
2012-01-12 21:46
24.xxx.86
《Re》나무 님 ,
[나무-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사도와 선지자가 중단되었다 할때 여기서
말하는 사도와 선지자의 중단은 은사로서의 사도와 선지자를 말합니다.
은사와 직임과의 관련성을 살필때 기본적으로 직임자는 모두 은사자
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은사자가 직임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직임으로서의 사도나 선지자가 아닌 은사로서의 사도나
선지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중단된 것이 직임의로서의 사도와 선지자라고 한다면 지금도
중단되지 않은 은사로서의 사도나 선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신사도나 아이합과 같은 이단적 집단을 용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신학자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크게 직임의 은사와 역사의 은사로 분류가 됩니다.
*직임의 은사-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엡 4:11)
*역사의 은사-고린도전서 12:8-10/로마서12장에 언급된 은사들
사도와 선지자는 직임적 은사로 분류가 되고 사도와 선지자라는
직임적 은사를 받은 자들이 교회에 세워져 사도와 선지자의 사역을
하게 된 것이구요.
그렇기에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administration/service) 중단은
곧 은사(gift)로서의 사도와 선지자의 사역(operation/working)이
중단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그런 당연한 이치를 간과하였기에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중단과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중단은 별개라는 논리를 가지고 사도 선지자의
은사중단과 달리 사도 선지자 직임중단은 신사도 아이합과 같은
이단집단을 용인하는 결과가 된다고 무리한 주장을 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사도와 선지자 은사 중단"이라는 용어대신 "사도와 선지자
직임중단"이라는 용어를 제시한 이유는 사도와 선지자 직임이
성령의 은사에 속하고 사도와 선지자의 사역에 해당되는 계시가
은사의 목록에 따로 언급된 바 없는데
지금까지 개혁주의에서 나온 은사중단론이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은사 중단을 통해 사도적 사역에 해당되는 계시의 중단을
성경적으로 근거를 대어 타당하게 주장하기보다는
건덕적 은사인 예언과 방언을 계시적 은사라 하고 그런 은사의
중단을 통해 계시가 종결되었음을 명백한 근거없이 그릇되이
주장하여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은사
중단론과 구별이 되면서도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직임중단론을 언급한 것이지요.
현재 신사도들과 아이합 자칭 선지자들은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 직임이 여전히 새롭게 세워지고 있으며 자신들은 이
시대 신사도와 선지자로서의 직임을 가지고 사도적, 선지자적
사역을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과연 이런 현실에서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사도와 선지자 직임 중단"과 "사도와 선지자 은사 중단"중
어느 표현이 더 직접적으로 신사도와 아이합 같은 집단을
경계시키는데 유익하겠는지요?
나무 은사중지론이라는 용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것을 직임으로 바꾸었을 때 올 수 있는 더 심대한 문제점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은사와 관련한 문맥에서 사도나 선지자를 사용할 때 그것을 은사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쟁점을 다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엡에서 나오는 사도나 선지자를 은사가 아닌 직음으로 바꾸는 것이 합당한가 싶어서요. 평안하십시오 1/13 00:07
211.xxx.242
교제 나무님께서 직임중지론 용어에 대한 단순한
거부감으로 그러시는 것이 아니듯 저 역시
은사중지론 용어에 대한 단순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논란이 되는 은사중지론과
내용적으로 구별되게 하면서도 신사도, 아이합
같은 자칭 사도 자칭 선지자 무리들의 그릇된
주장을 효과적으로 분별 경계시키고자는
취지에서입니다. 은사와 관련된 고전 14장내에서
이미 직임이라는 말이 은사아래 언급되고 그
직임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고전 12:28절과 엡 4:11절에 언급되니 직임이라는
말로 은사로서의 사도 선지자의 사역을
구체화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문제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1/13 00:42
24.xxx.86
교제 사도 ,선지자 중단을 말하면서도 기존의 은사
중단론이 그것을 반영하여 사도 선지자 은사
중단이라 미처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유는
은사중단론을 주장하는 분들 자신마저도 사도
선지자를 은사로서보다 직임으로 먼저 인식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제 주장을 변증한다고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 것
죄송하구요. 저도 한번 목사님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어느 표현이 더 적절한가 시간을 두고 살펴보고
수정할 것 있으면 수정할 터이니 나무 목사님도
평안하시기를^^.
1/13 00:49
24.xxx.86
이름아이콘 나무
2012-01-12 19:28
211.xxx.242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사도와 선지자가 중단되었다 할때
여기서 말하는 사도와 선지자의 중단은 은사로서의 사도와 선지자를 말합니다. 은사와 직임과의 관련성을 살필때 기본적으로 직임자는 모두 은사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은사자가 직임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직임으로서의 사도나 선지자가 아닌 은사로서의 사도나 선지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중단된 것이 직임의로서의 사도와 선지자라고 한다면 지금도 중단되지 않은 은사로서의 사도나 선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신사도나 아이합과 같은 이단적 집단을 용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이름아이콘 나무
2012-01-12 15:31
211.xxx.242
별똥별님이 언급하는 내용들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신학교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들인가요?
오히려 개핀이 정경적 계시와 관련된 은사들의 중단에 관하여 말한 부분과 매우 유사하게 보입니다. 저는 정경적 계시와 관련한 개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방언과 같은 은사가 교회의 건덕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면에서 저는 개핀과 달리합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회하는 동료 목사님들 태반이 이렇게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공적으로 모이는 예배나 모임들에서 방언을 어느정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약간의 차이들이 있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별똥별 개혁교회의 수가 많으니까요...
모두 꼭 같을 수는 없겠지만요...
오히려...
나무 목사님과 별똥별의 방언관이
같다고 보여지네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1/12 15:46
98.xxx.205
나무 그리고 개핀의 은사중지론의 견해를 발취한 것을 올린적이 있습니다. 그 중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잘 안되어서 가능하면 그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려고 합니다. 혹 개핀의 주장들에 대해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도 되겠지요 1/12 15:50
211.xxx.242
JuNick 나무님, 바쁘신 줄 알지만 질문을 드립니다. "방언과 같은 은사가 교회의 건덕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고 하시는데 '방언과 같은 은사'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같은 일들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까? 개핀의 은사 중지론은 은사가 다 그쳤다는 말은 아니지만 방언이나 예언 같은 표적의 은사는 그쳤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http://cafe.daum.net/rlarnsgh/PYeS/47?docid=1I6FK|PYeS|47|20100615075451&q=%C0%BA%BB%E7%C1%DF%C1%F6%B7%D0 1/12 22:24
69.xxx.95
나무 준익님 저는 방언과 그 통역에 계시적인 측면과 표적적인 측면과 교회론적인 측면이 다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쟁점이 되는 부분에 대하여 석의적이고 해석적인 측면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한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준익님이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직접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토론은 준익님과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유익하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서로간의 의견을 개진하다보면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별똥별
2012-01-12 12:05
98.xxx.205
《Re》나무 님 ,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가르치지요"(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라는 말씀에 놀라서 어느 분의 블로그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었습니다. )
목사님, 본의 아니게, 설명부족으로,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그 부분은, 방언은 중지론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더 엄밀히 말하면, 부분적인 은사 중단론자들이 많다고 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교단에서 성장했기에...개혁교회도 모두가 다 그런 것은 분명히 아님을 믿고 있는데, 표현부족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다음은 개혁교회의 입장에 관한 간추린 도움말입니다.
" 개혁주의가 중단되었다고 보는 은사는
1. 사도의 은사(the gift of apostle)
->예수님이 그냥 사도를 임명했다고 보기보다는 예수님이 부르셔서 사도의 사명을 주시고 감당하도록 사도의 은사는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 예언의 은사(the gift of prophecy)
->선지자의 은사와 동일한 뜻으로서 예수님이 직접 누구를 부르셔서 예언의 은사를 주면서 선지자로 세운다고 임명하지는 않았지만,
예언하는 사람(선지자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은 예언의 은사가 임했기 때문에 예언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3. 방언의 은사
4. 방언 통역의 은사
->이 두가지 은사도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을 교회에 전달하는 것과 관련된 계시의 은사로 봅니다. 개혁주의에서는
이상의 네가지 은사가 이제 없다고 봅니다. 개혁주의 안에서 방언을 계시의 은사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수이지만...."
교제 은사주의에도 수정 은사주의가 있으나 은사주의
하면 방언필수론 방언 구원론 연상되듯 개혁주의에도
칼빈의 견해(방언은사 중단론)를 그대로 지지하는
역사적 개혁주의와 방언은사 지속론을 주장하는
수정 개혁주의가 있는데 역사적 개혁주의분들이
방언중단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니 개혁주의는
다수가 방언중단론을 지지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는 것도 무리도 아닙니다.
실제로는 수정 개혁주의에 속한 분들이 더 많다면
반가운 일이지만^^ 1/12 22:29
24.xxx.86
교제 [황상하 목사님 칼럼글중:
개혁주의를 귀하게 여기는 이들도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글에서 어떤 주제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발전한 개혁주의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 비추어
바른 가르침과 교훈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되
잘못된 것은 어거스틴의 주장이나 칼빈의 주장이나
교단의 헌법이라도 개혁해야 합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개혁주의의 개혁정신을 외치는
목사님들 흔지 않지요. 1/12 22:33
24.xxx.86
이름아이콘 비둘기
2012-01-11 16:03
66.xxx.221
`별똥별` 님이 선택한 글 입니다.
결론하신 혼탁한 세상임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하여
아멘넷 칼럼속에서 바른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의 신앙을
마지막 날까지 지키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이루어 가고 계신 곳에 있는 성도는 복있는 자입니다
혼탁하다는 것은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기록하게 하신 대로
사단은 자기를 숭배하도록
하나님처럼 보이고 있으며
사단의 장난은
미혹과 배도와 다른 복음으로
이미 활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악의 세력의 미혹을 알리고 싶은 마음
불의을 믿었고 불법인지 모르고 좋아했던
모든 자들이 들을 귀 있는 자들이
참과 거짓을 분별하게 되어
진리요 성령이요 말씀이신
예수님께로 성경으로 돌아오도록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내 주시는 일에
별똥별님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별똥별님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 하늘나라 백성들 , 성도들은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고자
아멘넷을 도구로 사용하시나이다
참고로 큰 교회에서 부흥 집회와
간증 집회와 은사와 치유 집회라는 이름으로
어린 성도를 약한 성도들을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아파하며
성령충만 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머리에 손을 얹고 반복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계속하라고
강요하며 그러면 방언이 나온다고 하는
속임수와 거짓으로 미혹하는 것을
저도 목격하였습니다
분별케 하시는 성령의 영을 감사합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나무
2012-01-11 05:37
211.xxx.242
교제님
제가 개핀의 은사중지론에 대한 관점을 올린 것은 개핀의 방언에 대한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때문에 올린 것이 아닙니다.
개혁교회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고(사실 저는 별똥별님이 언급하는 개혁교회의 범주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은사중지론의 개핀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비판이 정당한가? 이것이 정당하려면 적어도 개혁교회가 취하는 은사들에 대한 입장과, 개핀이 말하는 은사중지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한 부분적인 응답으로 개핀자신이 말한 은사중지론에 관한 글을 발취한 글을 다시 올렸습니다.
저는 교제님이 동의하든 안하든 신사도나 아이합과 같은 무리를 추종하지 않는 이상, 사도나 선지자의 계속성을 주장하지 않는 이상 모두가 (부분적) 은사중지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지된 은사의 범주가 무엇인가하는 것은 학자들마다,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라는 것이 때로는 교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그렇기때문에 더욱 쟁점이되는 것을 가지고 토론하거나 비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않으면 개혁교회가 합당하지 않게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thomas ((사도나 선지자의 계속성을 주장하지 않는 이상 모두가 (부분적) 은사중지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나무님께서 지적하신 의미로 "은사중지론자"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데 ((그럴지라도/그렇기때문에 더욱 쟁점이되는 것을 가지고 토론하거나 비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개별적 은사에 대한 견해를 구체적인 정의와 함께 중지/연속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피차간에 오해를 줄여서 서로의 이해를 도와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거 같습니다.
1/11 10:56
69.xxx.142
교제 예^^은사중지론이 모든 은사를 부정하는 이론이
아니라 일부 은사 중지를 주장하는 이론이고 직임을
은사로 간주하면 저도 부분적 은사중지론자로 간주
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그 부분적이라는 목록에 방언 예언은사를
포함하는 이론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경계가 되는
은사중지론과 구별되면서도 보다 정확한 표현을
기한다면 제 경우는 "사도 선지자 직임중지론"에 있는
부분적 직임중지론자에 해당된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입니다.
1/11 12:16
24.xxx.86
교제 사도 선지자 직임이 중지되었다면 사도,선지자
직임에 따른 표적이나 사역도 중지되었음이 자동
해당되니 사도적 사역을 한다는 명목으로 나아와
미혹하는 그릇된 신학운동을 보다 직접적,효과적으로
경계시키면서 명백한 성경적 근거없이 방언은사
중지되었다 하여 방언으로 기도하는 형제 자매들
앞에 거칠 것을 두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성경의 교훈에 거스림이 없으니 저는 은사중지론이
아닌 직임중지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교회가 합당하지 않게
손상을 받게됨을 우려하여 개핀의 글을 올려주셨음을
알기에 나무님께 감사드린 것이고, 건덕적 은사를
계시적 은사라 하여 중지되었다 하는 이론을 경계
시키고자 반론을 제기한 1/11 12:32
24.xxx.86
교제 것이지 나무님을 개핀과 같은 입장에 있는 자로
오해하여 그런 것은 아니니 그 점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1/11 12:36
24.xxx.86
별똥별 토마스님과 교제님께서 제가 없는 사이에 분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저의 부족한 부분을 감싸 주시고 이끌어주신 그 사랑의 수고를 우리 주님께서 기억해 주시기를...!! 1/12 12:25
98.xxx.205
나무 정경의 완성과 함께 등장하는 사도나 선지자의 계속성이나 중지됨의 논의는 교회에 주어진 은사라는 항목과 관련하여 논의가 되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도나 선지자도 교회에 주어진 은사/선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이 직임과 어떤 관계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여러의견들을 내고 있습니다. 설사 이런 은사와 직임이 밀접하게 얽혀있다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대로 은사의 항목아래서 논의함이 좋을 듯합니다.
1/12 13:33
211.xxx.242
교제 은사의 항목아래서 논의는 하되 중지론 측면에서
논란이 되지 않도록 구분은 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이 구분하여 놓았으니까요^^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린도전서 12:5>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교제
2012-01-10 22:04
24.xxx.86
독자에게 은사중지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개핀의 글을
올려 주신 나무님께 감사드리며 은사중지론 경계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해서 반론글도 올리고자 합니다.
[개핀-나의 주된 관심사는 모든 계시적 은사(예언, 예언에 대한
평가,방언, 방언 통역...)에 대한 중단 여부이다.
사도가 오늘날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도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사도적
직임(고전 12:5)이 중단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고 그리 표현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적절하고 타당하다.
예언,방언은사는 사도와 선지자에게만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성도에게도 성령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은사이고,변함 없이 항상 있을 하나님의 말씀은
각 처에서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고전1:2)에게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 14:39)" 직접 교훈하셨다. 우리는 왜 여러 은사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건덕에 관계된 두 은사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그런 교훈을 주셨는지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가 오늘날 이 땅에 없다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도 없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없고 지체의 덕이나 교회의 덕 세움도
더 이상 필요 없는가? 성령은 사도시대에만 예언 방언을 통해
지체의 덕,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는가?
<너희(성도)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주의 계시를 받아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에는
계시, 예언, 방언이 분명히 구분되어 기록되었고 은사로서의
예언과 방언이 그리스도의 지체의 덕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건덕적 은사로 변론의 여지가 없게끔 명백하게
설명되어져 있다.
방언 예언을 계시적 은사라 해석하고 그런 은사는 중단되었다라고
누가 주장하려면
이미 "건덕"이라는 의미로 기록된 경의 예언의 말씀을 제하거나
"건덕" 자리에 "계시"라는 용어 또는 그런 의미로 기록되어진 성경
사본을 찾아내어 객관적으로 증거 말씀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에도 어떤 측면에서는 계시적인 말씀의 은사와 그외
여러 기적적 체험과 그와 비슷한 경험들이 성령의 주권적 역사속에서
"예측할 수 없이"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부정하지 않음의 이유가 -어떤 측면에서는 계시적인 말씀의
은사가 성령의 주권적 역사속에서 "예측할 수 없이" 어떤
이들에게 발생하여 기록된 경의 예언의 말씀에는 미처 계시된
바 없는 "계시성 은사중지론"이 나왔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기를 바란다.
*저자가 표현을 두리뭉실 모호하게 흐리지 않고 쉽고 분명하게
하였더라면 읽고 반응하는 자의 표현도 쉽고 분명해질 것임.
정경의 완성과 함께 사도와 선지자의 사역도 완성되었고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사도와 선지자 직임을 통해 주어진
계시적인 말씀(기록계시)도 종결되었다. 이제 성도에게는,
첨삭될 수 없는 경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만
있을 뿐이고 성도와 함께 하는 성령께서 그렇게 견인하고
도우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케 하고 완성시킨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복음의 말씀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자들을
위해 성령은 복음전도자를 교회에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성령의 나타남으로
후원하시며 전세계 각 나라 말로 성경이 인쇄, 배포되게
하시고 있음을,
또 이미 복음화된 신자들을 위해 목사와 교사를 교회에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고
권면하고 안위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게 역사하고 계심을
성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방언이 은사중지론자들의 주장처럼 계시적 은사로서 사도시대
이후로 중단된 은사인지 아니면 건덕적 은사로서 여전히
지속되는 은사인지에 대해서는 다음글을 참고하였으면 한다.
[방언은 분명히 성경적이고 또한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좋은 은사이다.
극히 보수적인 신학을 하시는 분들 중에 멀쩡히 성경 속에 살아있는
방언을 부정하거나 전혀 못하게 말리는 분들이 있다. 그것도 문제이다.
바울의 가르침속에서 방언이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또한 어떻게
활용하라고 가르쳐지고 있는데, 그 방언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려는
자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방언이 지금도 성도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인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동시에 너무나도 많은 오해와 왜곡과 부작용이 많이 따르는
은사가 바로 방언이다. 방언이 영적으로 특별한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은사라고 가르치는 멍청하신 목사님들이 계셔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은 바울사도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에 관한 가장 올바른 교과서이다. 방언에 대해서
알려면 고린도전서 14장을 잘 읽어야 한다.
.........
원하시면 말 못하는 짐승의 둔한 혀로 사람이 알아듣도록 유창하게
말을 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망하게 한
정체불명의 거짓 선지자 발람의 자가용이었던 그 나귀가 그랬었다.
1900년 동안의 교회의 상황이 어려웠을지라도 성령은 원하시면
얼마든지 방언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다. ....
그러면 성령으로부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령의 의도대로만 방언을 잘 활용하면 된다. 먼저 방언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은사(고전 14:4)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분명하게 예언은
교회공동체를 위한 은사이고, 방언은 오직 그 개인을 위해 주시는
은사라고 고린도전서에서 명확하게 설명했다.]
별똥별 아멘, 아멘입니다!^^ 1/12 11:45
98.xxx.205
이름아이콘 나무
2012-01-10 15:13
211.xxx.242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가르치지요"(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라는 말씀에 놀라서 어느 분의 블로그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었습니다. 은사중지론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되는 개핀 본인이 말하는 은사중지론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라는 책에서 네가지 관점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리처드 개핀이 "은사중지론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책에서 개핀교수는 은사중지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개핀) 분명히 성령의 모든 은사가 중단되었다거나 오늘날 교회에는 그런 은사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기적이 중단되었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기적(확율적으로 매우 이례적인)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기적적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병이라도) 하나님의 집단이나 개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약5장)
그러나 고전12:9-10절의 은사(그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는 관계없이)들처럼 사도의 표가 된 표적들이 사도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가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나의 주된 관심사는 모든 계시적 은사(예언, 예언에 대한 평가, 방언, 방언 통역...)에 대한 중단 여부이다.
사도가 오늘날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정경의 완성을 받아들이면서 계시적 은사가 계속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볼때 완성된 성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방언과 예언의 중지에 대한 가르침보다 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신중수용론의 주장이 맞는다면 정경은 여전히 참으로 완결된 것이 아닐 것이며 우리는 감히 성경을 근거로 어떤 구속력있고 신학적인 주장을 할 수 없다.
나는 오늘날에도 어떤 측면에서는 계시적인 말씀의 은사와 그외 여러 기적적 체험과 그와 비슷한 경험들이 성령의 주권적 역사속에서 "예측할 수 없이"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1. 그러한 은사들이 지속될 수 있거나, 2.오늘날 그러한 은사들을 추구할 수 있으며, 3. 그러한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이 더 기독교적이라는 주장이다."
별똥별 존경하는 나무 목사님, 늘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쪽글로는 지면이 부족하여,
댓글로 해명을 남겼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예전부터
2012-01-10 11:15
98.xxx.76
사모님!
이렇게 글 올리시고 일일이 댓글 달아주시려면 굉장히 정신적 육체적 시간적으로도 힘드실텐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힘든걸 알기에 눈팅만하다가 갑니다만 사모님이 최근 며칠사이 힘들게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화이팅 해드릴려고 글남깁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좋은글 많이 알려서 성도들에게 많은 귀한 영향력 끼치시길 기도합니다
별똥별 고맙습니다, 예전부터님...
그리 말씀해주시니요...
여러분들과 신앙적인 담론을 나누는 것을
저는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합니다!
지난 번에,
제가 님께서 올리신 글에 반하는
글을 올렸음에도....
이렇게 찾아와주시고 격려의 말씀을 주셨네요.^^
님의 신안인격이 성령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존경합니다! 1/12 12:32
98.xxx.205
예전부터 그때 크리스마스 동영상 때문에 그러시군요
저는 댓글 달아주신분들때문에 오히려 좋았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부분 다른 의견들을 안다는것이 저 자신의 바른 신앙과 바른 지식에 도움이 되니까요
괜히 걱정하셨군요
하여튼 사모님은 칭찬의 은사(^^)도 많은신것 같습니다
저도 좋은것은 본받아 썰렁한 내 입을 바꿔서따뜻한 얘기 칭찬연습 많이 해야할것 같습니다 1/12 13:24
98.xxx.76
이름아이콘 기다림...
2012-01-10 10:22
128.xxx.193
"아마도 저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가르치지요,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 말씀에 의거한 체험을 했지요.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나요?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 귀한 말씀 감사 드립니다.
저 역시 '강렬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장애우를 위한 특새 중에 '심장이 터질듯한 가슴'이었습니다.
별 사모님께서 정확히 지적해 주셨듯이, 처음 방언을 받은 이들은 너무 신비하고, 신기합니다. 그런 그들을 말씀으로 천천히 인도해 줌 없이, 교회에서, 먼저 믿은 이들이 '내 친다'면... 버젓이 지금도 방언을 받고, 실제 존재하는 강렬한 체험들이 있는데... 그 '산 증거'를 받은 이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 감별론'처럼 '영적 체험'은 중립적이기에 성경으로 돌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별 사모님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그 체험은 공동체에 '반드시' 덕이 되어야 하고, 주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자랑치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혼탁한 장에서 바른 분별의 글 너무 반갑고, 귀한 사모님을 통해 역사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별똥별 고맙고 감사하신,
아멘넷의 막내 기다림님...
님의 신앙인격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러니까 성령의 사람만이 품어낼 수 있는
생명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그런 귀한 체험이 있으셨군요...
너무도 귀하고 사랑스런 형제님이십니다! 1/12 12:35
98.xxx.205
이름아이콘 호크마
2012-01-10 03:57
58.xxx.242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별님의 대부분의 관점에 동감을 합니다. 한가지 질문은 구약 사무엘선지자 이후 성경기록에 나타나는 [선지학교/]에서는 어떤 것을 가르쳤나요? 그 가르친 과목이 그 당시의 토라였나요, 아니면 예언내용을 어떻게 작성하는가인가요, 아니면 예언하는 방법론을 가르쳤을까요,
사무엘이후 엘리야/엘리사 시대에 가장 활성화되었던 [선지학교]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현재의 [신학교형태]였는지, 아니면 기도하고 묵상으로 개별적 혹은 그룹별로 영적훈련을 하는 [기도원형태]였는지, 아니면 선교나 신앙교육, 훈련등 특수목적으로 운영되는 [para-church적인 기관/단체]였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들의 관점과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별님의 개별적인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
최송연
별똥별
2012-01-10 01:47
98.xxx.205
개혁교의 대표적인 분들(죤 칼빈, 마틴 루터, 벤저민 휫필드. 죤 매카터, 리처드 개핀, 대니얼 월리스) 등, 그분들은, 초대 교회 이후, 은사중단론을 지지한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중단설(cessationism)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초기교회 이후 방언, 신유, 은사, 계시 등이 끊겼고 사라졌다는 주장입니다. 그 이유로는 성경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모든 은사들이 필요하였고 그에 따른 임무(성경이 완성)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많이 읽기 전에는 그것이 그런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 14: 26 말씀이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도 필요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밝히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을 하게됩니다.
믿는 자는, 새 방언을 말할 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부터...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하심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방언이 우리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외국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 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배워서, 학습으로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인지....그러나, 그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댓글로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분 중에 어릴 적 부모를 여이고 천애 고아로 성장하신 여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후, 첫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와 주신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가긴 해야겠는데, 말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그분은 미국인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미국 교회에 나가니, 영어로 찬송도 불러야 하고 말씀도 들어야 하고...너무나 힘이 들어서 고통 하던 중, 영어 성경을 읽어보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어 성경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읽는 것이 아니라, "I n t h e b e g i n n i n g 이렇게 알파벳을 한자씩 소리내어 읽었다는 군요.)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읽고...틈만 나면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녀의 입이 갑자기 열려서, 알파벳으로 끙끙거리던 그 말씀이 문장으로 줄줄 이어지고....
깜짝 놀란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음성을 듣고 있던 (재혼한 일본인 2세)남편이 놀라서 소동을 하고요....이렇게 배운 적없는 외국어도 가능합니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는....
또 고전 14: 2절의 영언(비밀)의 체험 사례: 그야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교회로 빌려서 사용하는 건물에서 몇 몇 성도님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룁니다. 그날도 우리가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의 이름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저의 혀가 구르면서 내가 평소에 쓰지않던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뜻이 연달아 깨달아지는데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를 침상에 내어 던지리라!" 저는 너무도 놀라서 울며 불며, 조금만 더 참아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십사...아마도 저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입니다. 저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마저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치유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일으켜주십니다. 그런데,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여서, 자신이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우월하다던지....이런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사단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충동질 하기 시작하지요. "너는 신령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기도해 주면 병도 낫는다." 등등. 그런 사단의 속삭임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감지해 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화시켜서 모든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삯군이요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졸개일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자신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보이지가 않습니까?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가르치지요,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 말씀에 의거한 체험을 했지요.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나요?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충 설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남겼습니다.
대장쟁이 제겐 보충설명이 본글보다 더욱 절절히 와 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선교사로 험지에 달려 가셨던 사모님의 체험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어떠한 제한, 시공간의 제한조차 받지 않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하나님의 능력은 제한이 없으며 또한 시공간의 제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중단론은 옳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무나 놀라우신 열정의 별똥별 사모님,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와 아멘넷을 옥토와 같이 적시는 수많은 글들, 권면과 가르침의 글들도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신기하고 존경스러운 사모님, 감사합니다. 1/10 12:02
68.xxx.254
별똥별 고맙습니다, 목사님...
존경하옵는 우리들의 석좌 교수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천군만마...
힘이납니다!
늘 감사하고 늘 든든합니다!
somewhat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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