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Turning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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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ㆍ2011-10-2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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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처럼 후끈거리고 무덥기만 하던 여름도 어느새 다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해진 것을 보니까, 가을이 완연하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지나고 나면 곧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진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가을은 계절로서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는 것이다.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발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는 꼭짓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갈등과 다툼,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마가 때문에 급기야는 분열하고 갈라서야만 하는 아픔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분쟁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터닝 포인터(Turning point)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시각, 긍정적인 시각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넘어, 초대교회 역사를 재조명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주신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으리만큼 밀접한 관계로 함께 이방인 선교 사역을 펼쳐나갔던 멋진 동역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까지 내어주던 과격한 성품의 바울에 비해 바나바는 그 이름이 주는 뉘앙스대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서로 다툴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 있었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백팔십도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이전의 핍박자였던 바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동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처음으로 설득한 장본인이 바로 이 바나바였던 것이다(행 9: 27). 그 후로, 이 둘은 서로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사이로 급진했으며,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나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그들에게도 갑작스럽게 균열이 생김을 볼 수 있다. 지지해주는 협력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하려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마가 라고 하는 요한을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둘은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만, 바울은 이전의 이탈자와의 합류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강하게 반대한다(행 15: 37-38).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은 두 인물과 그들의 특별한 관계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한 마디로 그들의 불화가 시작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마가였다. 왜일까? 물론,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하던 1차 선교 여행지 중의 한 곳인 '밤빌리아'에서 그들(바울과 바나바)을 등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되돌아와서 두 사도들과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런 마가의 행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다가 도중 하차한 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하는 데도 매개변수였다. (행 15:37∼39) 결국,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돌아가는 여행을 선택하고, 바울은 그의 새 파트너인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역량 있는 선교사로서 바나바보다 더 큰 역량을 발휘하지만, 덕망 있는 권위자(행 4:36), 바나바에게서 좀더 배울 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은 불완전해 보이며 결코 완벽하지 못한 사도로 비쳐질 뿐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화목할 수 없을 때가 종종 발생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들의 주장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강할 때 일어나는 피치 못할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적 불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사역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포인트가 되겠다. 사상이나 견해가 서로 너무 맞지 않을 때는 심하게 다투고 죽기까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무익하다. 그럴 경우에는 서로 축복해주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초대 교회 이방인의 선교사역은,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은 두 사람의 지도자가 각기 등돌리고 돌아서게끔 악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막 태동한 이방인 선교사역에 큰 위험을 주는 요소였고, 큰 아픔이었다. 그런 아픔을 바라보게 된 마가 역시 마음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도의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가슴 아파하며 애통하는 때가 그에게 있었지 않을까? 그런 그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때가 바로 마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남은 여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여기 이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록할 때,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갔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 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1∼52)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그 청년이 바로 마가 자신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희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그렇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비겁한 마가가 아니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다! 훗날, 이런 마가를 가리켜 베드로는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며 아꼈고, (벧전 5:13) 로마에 있던 바울은 마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해 골로새로 보내면서 골로새교회에게 그를 잘 대접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다(골 4:10). 순교에 앞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마가를 데려오라고 간절히 부탁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딤후 4:11)
이렇듯, 훌륭한 두 사도의 격렬한 다툼의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는 그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듯, 마가의 남은 여정은 신실한 일꾼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국에 가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던 바울 사도에게마저 중요한 사람, 인정받는 동역자로 거듭난 것이다. 마가는 한 때 다른 사람에게 불화를 조성한 원인 제공자였던 부족한 사람이지만, 회개한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근간에 일어나고 있는 뉴욕 교계의 분쟁과 불화의 몸살은 우리가 모두 함께 앓고 있는 심한 몸살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바 된 귀한 형제 자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생명이다. 이런 귀한 생명체 안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이다. 그럼에도 앞선 몇몇 지도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한, 아름다운 화음을 울려야 할 오케스트라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인하여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작금의 뉴욕 교계 역시 모두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 아집, 이런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다툼으로 분열될 지경까지 가게 되었으나, 그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었고 그 일 때문에 더욱더 훌륭한 선교의 장이 열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런 분쟁도 결코 나쁘다고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의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만 하고 주님께 더욱 더 자신을 찢고 겸손한 무릎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도 자신의 주장, 자기 의(Self- Righteousess)에 갇혀서 살았다면, 자기 살을 찢어내는 아픔, 고육지책 (苦肉之策)을 감행하고서라도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 되기 힘써 지켜야 하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세포분열을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오늘이야말로 뉴욕교계가 바른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아픔의 순간들을, 결코 가볍게 또는 헛되이 허비하지 말고, 주님께로 되돌아 가는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그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멋진 날로 가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세계에 흩어진 성도들)는 뉴교협 교역자님, 평신도 지도자님들, 그리고 뉴욕 교협에 소속한 모든 성도님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 이 아픔을 딛고 잘 해내실 것이라고, 주님 안에서 멋지게 성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굳게 믿어보고 싶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사도행전 15: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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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달윤목사
2011-11-03 07:40
218.xxx.206
"터닝 포인트"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필요한 "터닝 포인트"
사모님 바울과 마가 바나바 잘 가르처주시고 맥을 잘 지퍼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오동
2011-10-26 19:31
218.xxx.204
최 선교사님, 적시안타입니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행하게 되는 것이 사사시대적 혼란의 원인이라는 말씀, 올바른 지적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해야죠. 그리고 주님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마가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되었으나 주님이 이런 인간적 요인에 역사하셔서 합력위선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자기 소견에에 맞추어 이해하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한심스러운 현실을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비둘기
2011-11-05 23:07
66.xxx.221
복음을 위해 동역했다가 떠나고 연합하다가 돌아가 버리는
일을 하는 곳에 인간적인 감정과 실행하는 방법의 차이로
갈등과 분쟁과 불화가 있음을.....
별똥별 사모님의 '터닝 포인트' 칼럼을 통하여
이방인을 위한 위대한 사도도, 권위자인 바나바도,
마가복음의 기록자 마가도 이들이 함께하다가
갈라져야만 했던 아픔과 애통한 일들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이 마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마가를 데려오라고 하는 모습
주님을 위해 헌신한 생애속에 기록으로 남겨진
그들 사이의 행적을 더듬어 가며
더 깊이 말씀을 깨닫게 됨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게되는 근심의 아픔은
새롭게 하시고 변화되게 하시는 주님의 만지심이 되고
십자가에서 만나는 화목의 사람들은
사랑과 평강을 위해 겸손해 지는 것
교회의 하나됨, 견고하게 세워져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맥을 잘 짚어 주었다 하신 장목사님의 댓글에 공감하며
유익한 칼럼을 읽고난 기쁨을 감사로 전합니다
기다림...
2011-10-27 20:32
128.xxx.193
너무 따스하며 깊이 있는 말씀 감사 드립니다.
역시 '복음'은... '해피엔딩'인 것 같습니다.
그 '희망' 결코 놓지 않고 나아가고자 합니다.
뉴욕 교계, 한국 정계... 모두 이 '새출발'이 '터닝 포인트'가 되길 소원합니다.
대장쟁이
2011-10-27 03:32
68.xxx.254
노랗게 물든 잎들, 낙엽, 벤치 하나, 파란 나무들, 그리고 연못과 거기 비친 하늘이 수채화 풍경 같네요.
뉴욕교협의 터닝포인트도 이 사진처럼 잔잔한 마음들로 시작되었으면 좋겠네요.
분열은 세균들이나 아메바 같은 것들이 증식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으로 낳아서" 증식하는 거 아닙니까?
기자석
2011-10-26 18:54
65.xxx.229
아이쿠 ~
별똥별 선생님^^
아주 성경적이고도 사색적인 글을 쓰셨네요.
그러게 제가 무어라 말씀 드렸었나요?
비오는 가을 들판 헤메지 마시고 집에 빨리 들어가시라고 했잔아요.
그래서 이런 좋은글이 나오자나요?
담부턴 외롭고 쓸쓸하시면 성경 보시고서 글만 쓰시도록 하세요.
아니면 기도만 하시던지 ㅎ_ㅎ
나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다시 합하여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래요.
성령의열매
2011-11-02 15:56
204.xxx.216
몸 건강하시죠?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네요!
오늘은 어머니와 등산을 가는 날인데
갑자기 차편이 없는 바람에 취소가 되었어요.
그래서 조금 시간적이 여유가 생겼네요.ㅎㅎㅎ
솔직히 전 운동하는거 싫어하는데 어머니는 등산가시는거
넘~ 좋아하셔서 거이 끌려 다니다시피 하는데 그래도
등산을 마치고 돌아오는길은 몸도 마음도 가뿐합니다.
등산길을 걸으며 전 항상 천로역정이 생각이 나요.
진흙이 많은곳에서는 조심조심 걸어야하고 마른길에서도
마음 놓고 걷다가 미끌어 지기도하고...
정말 산을 한바퀴 돌다보면 우리의 인생길을 보는것 같아요.
산을 한바퀴 돌고 평탄한 큰 길이 보이면 항상 제 귀가엔
크리스챤이 인생길을 끝내고 주님과 만나서 기뻐할때 나오는
음악이 들려요.
사람들에겐 항상 터닝포인트가 필요한거 같아요.
예수님을 만났을때 진실로 회개하고 변화되는 형제,자매를
보면서 요즘 전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않지만 오직 주의 신으로만 가능한 일들...
우린 우리의 혈기보단 간절한 기도로 주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겠죠?
알면서도 참!~ 힘들어요. 주님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시간을 내어보며...
궁금한사람
2011-10-30 22:39
74.xxx.50
《Re》JuNick 님,
JuNick님은 처음 이글 아래서는 본글을 무조건 반대하신 것 같던데, 동의하신다고 하십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텐데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라도 솔직히 말씀해주시고 지지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곁에서 보는 우리도 마음이 좋습니다. 그리고 뉴교협의 총회를 지켜보니까 지난 37기 회장님은 회의 진행을 어찌하는 것이 옳은지조차 모르시는 분 같더군요. 그렇게 불법으로 선출된 38기 임원진 역시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관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같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JuNick 긍금한 사람님, 감사합니다. 저는 별똥별님의 팬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에는 조금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반대가 아니고, 뉴욕 교협의 일은 저는 제삼자의 입장으로 지켜볼 뿐입니다. 저는 아멘넷이 어떤 기사가 있으면, 읽는 사람들이 사정을 바로 볼 수 있게, 그리고, 이슈거리가 있으면 여론을 종합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황상하목사님의 칼럼도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오해를 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10/31 20:29
69.xxx.95
JuNick 기다림님의 소원처럼...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몬 대안이 없을가여?
뉴교협...
궁금한사람님, 제가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이 맞습니다. 주일을 지나면서 조금 생각한 것을 share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다 나 살았다고만 하지, 한 사람도 내가 죽을 놈이라는 분은 없네요. 어찌 죽지 않고 다시 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분들을 바다에 던지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요나 1: 11,12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나의 실패만 봅니다. 그러나 요나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10/31 20:55
69.xxx.95
JuNick "너희가 이 풍랑을 만나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하나님은 큰 풍랑으로 요나를 굴복시키셨습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용서와 회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샬롬!!! 10/31 21:02
69
짐보
2011-10-27 17:57
207.xxx.35
뉴욕교협의 시끄러움을 바라보면서
교계의 평균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선의의 경쟁도 아니고
교리의 논쟁도 아닌 두마음을 품은 자들의 소란속의 무질서가 교계에서 마침이
아닌 교포신문의 기사거리가 되어 먹칠을 하고 있으니.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아니올시다...입니다.
누가 그러데요,그들만의 리그라고.
어제 처럼 답답한날
정수영 목사님의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 중 신약교회 고수주의자
들로 이단으로 정죄받아 사라진 바울파(Paulicians)를 읽으며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봅니다.
[바울파에 관한 자료로는 E. Gibbon이 쓴 「로마제국의 흥망사」 4권이나 Newman의 교회사 1권(pp.379-386)에도 있고, 「순례하는 교회」pp.80-87과 「기독교대백과사전 6권」pp.1272-1276에 수록되어 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1) 바울파의 기원
바울파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바울파의 신앙과 주장이 신약교회 때 유대교의 개혁을 주도한 바울처럼 이들도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파라고 한다는 설과, 또 하나는 바울이 개혁을 내세워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파벌 활동을 조성했던 것처럼 파벌주의자에 대한 경멸적 호칭이었다는 설이었다.
하여간 기존 카톨릭 세력을 개혁하고자 했던 운동 세력을 바울파라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들 바울파의 기원은 AD640년경 '실루아노' 혹은 '실바'(Silvanus)라고 부르는 콘스탄틴(Constantine)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콘스탄틴은 사라센(Saracens)인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풀려나온 한 아르메니아 사람으로부터 성경의 한 사본을 얻게 된다.
콘스탄틴은 그 성경 사본을 통해 삶의 급격한 변화를 받고 그 이름을 바울의 동료였던 실루나오, 혹은 실라라고 바꾼다. 그리고 그는 곧 비잔틴 동방교회들이 성상 숭배를 하고 미신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로 인하여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틴 포고나투스'(668-685, Constantine Pogonatus)가 보낸 '시므온'(Simeon)이란 관리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다.
그런데 콘스탄틴을 돌로 죽이도록 했던 관리 시므온이 콘스탄틴이 죽은 후에 그의 신앙과 삶에 너무 감동이 되어 3년 후에 그도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는 자기 이름을 '티투스'(Titus)라고 개명하고 관리직을 버리고 '카브사'로 도망하여 열심히 복음전도에 힘쓴다. 그러자 '유스티니안 2세'(Justininian II) 황제는 '시므온'을 비롯한 많은 성도들을 이단자로 몰아 불에 태워 죽인다.
이렇게 성상파괴와 우상숭배를 배격하다가 황제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는 사람이 계속하여 연결된다. 즉, 콘스탄틴, 시므온, 게네시오스(Genesios), 요셉(Joseph), 사가랴(Zacharia), 바네스(Bannes), 셈바트(Sembat), 세르기우스(Sergius)와 같은 이들은 연이은 박해를 통해 죽음으로 항거하며 신앙을 고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상 예배가 우상숭배라는 확신 속에서 계속하여 기존 카톨릭 교회들과 싸우며 순교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200여년 동안 계속하여 올바른 신앙수호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은 「진리의 열쇠」(The Key of Truth ; 이 책은 본래 아르메니아어로 써진 것으로 1891년 F. C. Conybeare에 의해 편집, 번역되었다)라는 책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카톨릭이 쓴 기록에는 사가랴를 '돈만 아는 목자'(Chireling Shepherd), 바네스는 '더러운 사람'(filty one)이라고 기록되어 전해져오고 있다.
842년부터 867년 사이에 '데오도라'황제의 칙령으로 열렬한 박해 때문에 10만명이 넘는 순수한 기독 신자들이 죽게 된다. 이들이 죽는 원인은 성상, 돌, 십자가, 나무 등의 허탄한 우상숭배를 거부한 것이 주 원인이었다. 이들 성상예배에 대한 반대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소아시아 지방 북단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통칭하여 '바울파'라고 한다.
이들이 계속 박해에 밀려 사라센 쪽으로 쫓겨가던 이들은 그들을 박해하던 동방교회와 카톨릭에서 마니교도 또는 바울파라고 경멸하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수세기 동안 자기들을 죽이고 박해하는 이들에게 보복하려 하지 않고 계속 인내로 고난을 참아나갔다...
바울파의 대표적인 신앙의 주장
1)이들은 전통과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미명하에 창안된 모든 인간적 산물을 모조리 배격하였다. 오직 성서만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권위있는 규범이라고 주장하였다. 카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전통이나 교권주의 산물인 교황제도를 가장 거세게 반대한 가장 강력한 반 카톨릭 세력이었다.
2) 성례전에서 '상징론'이나 이와 유사한 모든 주장을 거절한다.
3) 카톨릭의 성직 계급을 거부하고 비판한다. 모든 신자의 영적 개성과 능력을 평등하게 인정했다.
4)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침례만 주장하였다. 이들은 예수께서 30세에 침례를 받았으므로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회개, 침례, 주의 만찬만 인정했다.
5) 마리아의 영구적 동정녀 교리, 무원죄의 탄생 교리를 반대했다.
6) 연옥 교리를 반대했다.
7) 성자들의 중보기도에 관한 교리를 거부했다.
8) 성화, 성상, 십자가, 고상, 향품 등 모든 우상숭배 요소를 배격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바울파의 신앙은 신약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조금도 이단적 요소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단으로 몰렸고 끝내는 억울한 누명이 아직도 벗겨지지 않은 채로 지속되고 있다.]
역사속에서 사라진 바울파를 읽으며
저 안의 신앙사조와 비교하며 동의 하게 됩니다.
이제 변절된 신앙의 습관과 버릇을 고쳐야 겠는데...
어디에 눈을 돌릴까?
가을비 오는 오후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어디로 갈까?
언제까지 기다려주실까?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장달윤목사
짐보님 참으로 감사 합니다.
나는 목사로 평생을 지났지만 8세기에 바울파 신앙자들이 우상숭배를 반대하다 그렇게 박해를 당하고 10만이 넘는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였는데 저만 잘 몰랐내요.
종교 역사속에 기독교 만큼 살육을 한 종교가 또 있습니까?
좋고 옳은 일을 한답시고 악한일을 너무 많이했어요.
미래를 위하여 모든 종교인들이 회개할 일입니다. 11/4 04:00
218.xxx.15
해처럼달처럼
2011-10-27 12:55
76.xxx.252
서로 생각과 비전은 달라도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해주고 높이 평가해 주는 그런 바나바 같은 우리 모두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말 가슴이 아파요. 하나님은 오죽 하시겠어요.
저 자신도 마찬가지이구요. 무언가 제가 당한 이 상황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턴 하는 계기가 되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클린' 하라고 '턴' 하는 클린턴이 아니고 말입니다.
기자석
해처럼달처럼님께서 아침부터 글을 올리셨는데 죄송하게도 우리 별똥별 선생님께서 엉뚱한 일을 하시느라 아직까지도 답들을 드리지 않으니, 제자된 제가 오하려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쪼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선생님께서 나오실 동안 잠깐 시간이 있으니 심심치 않게 제가 한 말씀 드리면요.
"해처럼달처럼님"께서 제시한 윗글의 제안은 진짜 하나님의 자녀나 가족, 친척, 친구, 혹은 진짜백이 하나님의 단체나 교회들 사이에서 하는 것이구요, 그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행동은 세상 정치단체들이 하는 짓이라고 보면 딱 맞습니다.
아마 저의 부족한 설명이 있다면 우리 "별똥별선생님"께서 보완해주시리라 믿어집니다. 10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갈등과 다툼,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마가 때문에 급기야는 분열하고 갈라서야만 하는 아픔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분쟁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터닝 포인터(Turning point)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시각, 긍정적인 시각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넘어, 초대교회 역사를 재조명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주신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으리만큼 밀접한 관계로 함께 이방인 선교 사역을 펼쳐나갔던 멋진 동역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까지 내어주던 과격한 성품의 바울에 비해 바나바는 그 이름이 주는 뉘앙스대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서로 다툴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 있었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백팔십도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이전의 핍박자였던 바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동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처음으로 설득한 장본인이 바로 이 바나바였던 것이다(행 9: 27). 그 후로, 이 둘은 서로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사이로 급진했으며,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나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그들에게도 갑작스럽게 균열이 생김을 볼 수 있다. 지지해주는 협력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하려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마가 라고 하는 요한을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둘은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만, 바울은 이전의 이탈자와의 합류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강하게 반대한다(행 15: 37-38).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은 두 인물과 그들의 특별한 관계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한 마디로 그들의 불화가 시작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마가였다. 왜일까? 물론,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하던 1차 선교 여행지 중의 한 곳인 '밤빌리아'에서 그들(바울과 바나바)을 등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되돌아와서 두 사도들과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런 마가의 행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다가 도중 하차한 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하는 데도 매개변수였다. (행 15:37∼39) 결국,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돌아가는 여행을 선택하고, 바울은 그의 새 파트너인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역량 있는 선교사로서 바나바보다 더 큰 역량을 발휘하지만, 덕망 있는 권위자(행 4:36), 바나바에게서 좀더 배울 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은 불완전해 보이며 결코 완벽하지 못한 사도로 비쳐질 뿐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화목할 수 없을 때가 종종 발생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들의 주장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강할 때 일어나는 피치 못할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적 불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사역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포인트가 되겠다. 사상이나 견해가 서로 너무 맞지 않을 때는 심하게 다투고 죽기까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무익하다. 그럴 경우에는 서로 축복해주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초대 교회 이방인의 선교사역은,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은 두 사람의 지도자가 각기 등돌리고 돌아서게끔 악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막 태동한 이방인 선교사역에 큰 위험을 주는 요소였고, 큰 아픔이었다. 그런 아픔을 바라보게 된 마가 역시 마음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도의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가슴 아파하며 애통하는 때가 그에게 있었지 않을까? 그런 그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때가 바로 마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남은 여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여기 이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록할 때,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갔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 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1∼52)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그 청년이 바로 마가 자신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희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그렇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비겁한 마가가 아니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다! 훗날, 이런 마가를 가리켜 베드로는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며 아꼈고, (벧전 5:13) 로마에 있던 바울은 마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해 골로새로 보내면서 골로새교회에게 그를 잘 대접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다(골 4:10). 순교에 앞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마가를 데려오라고 간절히 부탁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딤후 4:11)
이렇듯, 훌륭한 두 사도의 격렬한 다툼의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는 그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듯, 마가의 남은 여정은 신실한 일꾼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국에 가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던 바울 사도에게마저 중요한 사람, 인정받는 동역자로 거듭난 것이다. 마가는 한 때 다른 사람에게 불화를 조성한 원인 제공자였던 부족한 사람이지만, 회개한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근간에 일어나고 있는 뉴욕 교계의 분쟁과 불화의 몸살은 우리가 모두 함께 앓고 있는 심한 몸살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바 된 귀한 형제 자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생명이다. 이런 귀한 생명체 안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이다. 그럼에도 앞선 몇몇 지도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한, 아름다운 화음을 울려야 할 오케스트라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인하여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작금의 뉴욕 교계 역시 모두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 아집, 이런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다툼으로 분열될 지경까지 가게 되었으나, 그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었고 그 일 때문에 더욱더 훌륭한 선교의 장이 열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런 분쟁도 결코 나쁘다고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의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만 하고 주님께 더욱 더 자신을 찢고 겸손한 무릎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도 자신의 주장, 자기 의(Self- Righteousess)에 갇혀서 살았다면, 자기 살을 찢어내는 아픔, 고육지책 (苦肉之策)을 감행하고서라도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 되기 힘써 지켜야 하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세포분열을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오늘이야말로 뉴욕교계가 바른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아픔의 순간들을, 결코 가볍게 또는 헛되이 허비하지 말고, 주님께로 되돌아 가는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그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멋진 날로 가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세계에 흩어진 성도들)는 뉴교협 교역자님, 평신도 지도자님들, 그리고 뉴욕 교협에 소속한 모든 성도님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 이 아픔을 딛고 잘 해내실 것이라고, 주님 안에서 멋지게 성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굳게 믿어보고 싶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사도행전 15: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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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달윤목사
2011-11-03 07:40
218.xxx.206
"터닝 포인트"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필요한 "터닝 포인트"
사모님 바울과 마가 바나바 잘 가르처주시고 맥을 잘 지퍼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오동
2011-10-26 19:31
218.xxx.204
최 선교사님, 적시안타입니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행하게 되는 것이 사사시대적 혼란의 원인이라는 말씀, 올바른 지적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해야죠. 그리고 주님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마가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되었으나 주님이 이런 인간적 요인에 역사하셔서 합력위선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자기 소견에에 맞추어 이해하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한심스러운 현실을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비둘기
2011-11-05 23:07
66.xxx.221
복음을 위해 동역했다가 떠나고 연합하다가 돌아가 버리는
일을 하는 곳에 인간적인 감정과 실행하는 방법의 차이로
갈등과 분쟁과 불화가 있음을.....
별똥별 사모님의 '터닝 포인트' 칼럼을 통하여
이방인을 위한 위대한 사도도, 권위자인 바나바도,
마가복음의 기록자 마가도 이들이 함께하다가
갈라져야만 했던 아픔과 애통한 일들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이 마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마가를 데려오라고 하는 모습
주님을 위해 헌신한 생애속에 기록으로 남겨진
그들 사이의 행적을 더듬어 가며
더 깊이 말씀을 깨닫게 됨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게되는 근심의 아픔은
새롭게 하시고 변화되게 하시는 주님의 만지심이 되고
십자가에서 만나는 화목의 사람들은
사랑과 평강을 위해 겸손해 지는 것
교회의 하나됨, 견고하게 세워져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맥을 잘 짚어 주었다 하신 장목사님의 댓글에 공감하며
유익한 칼럼을 읽고난 기쁨을 감사로 전합니다
기다림...
2011-10-27 20:32
128.xxx.193
너무 따스하며 깊이 있는 말씀 감사 드립니다.
역시 '복음'은... '해피엔딩'인 것 같습니다.
그 '희망' 결코 놓지 않고 나아가고자 합니다.
뉴욕 교계, 한국 정계... 모두 이 '새출발'이 '터닝 포인트'가 되길 소원합니다.
대장쟁이
2011-10-27 03:32
68.xxx.254
노랗게 물든 잎들, 낙엽, 벤치 하나, 파란 나무들, 그리고 연못과 거기 비친 하늘이 수채화 풍경 같네요.
뉴욕교협의 터닝포인트도 이 사진처럼 잔잔한 마음들로 시작되었으면 좋겠네요.
분열은 세균들이나 아메바 같은 것들이 증식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으로 낳아서" 증식하는 거 아닙니까?
기자석
2011-10-26 18:54
65.xxx.229
아이쿠 ~
별똥별 선생님^^
아주 성경적이고도 사색적인 글을 쓰셨네요.
그러게 제가 무어라 말씀 드렸었나요?
비오는 가을 들판 헤메지 마시고 집에 빨리 들어가시라고 했잔아요.
그래서 이런 좋은글이 나오자나요?
담부턴 외롭고 쓸쓸하시면 성경 보시고서 글만 쓰시도록 하세요.
아니면 기도만 하시던지 ㅎ_ㅎ
나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다시 합하여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래요.
성령의열매
2011-11-02 15:56
204.xxx.216
몸 건강하시죠?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네요!
오늘은 어머니와 등산을 가는 날인데
갑자기 차편이 없는 바람에 취소가 되었어요.
그래서 조금 시간적이 여유가 생겼네요.ㅎㅎㅎ
솔직히 전 운동하는거 싫어하는데 어머니는 등산가시는거
넘~ 좋아하셔서 거이 끌려 다니다시피 하는데 그래도
등산을 마치고 돌아오는길은 몸도 마음도 가뿐합니다.
등산길을 걸으며 전 항상 천로역정이 생각이 나요.
진흙이 많은곳에서는 조심조심 걸어야하고 마른길에서도
마음 놓고 걷다가 미끌어 지기도하고...
정말 산을 한바퀴 돌다보면 우리의 인생길을 보는것 같아요.
산을 한바퀴 돌고 평탄한 큰 길이 보이면 항상 제 귀가엔
크리스챤이 인생길을 끝내고 주님과 만나서 기뻐할때 나오는
음악이 들려요.
사람들에겐 항상 터닝포인트가 필요한거 같아요.
예수님을 만났을때 진실로 회개하고 변화되는 형제,자매를
보면서 요즘 전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않지만 오직 주의 신으로만 가능한 일들...
우린 우리의 혈기보단 간절한 기도로 주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겠죠?
알면서도 참!~ 힘들어요. 주님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시간을 내어보며...
궁금한사람
2011-10-30 22:39
74.xxx.50
《Re》JuNick 님,
JuNick님은 처음 이글 아래서는 본글을 무조건 반대하신 것 같던데, 동의하신다고 하십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텐데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라도 솔직히 말씀해주시고 지지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곁에서 보는 우리도 마음이 좋습니다. 그리고 뉴교협의 총회를 지켜보니까 지난 37기 회장님은 회의 진행을 어찌하는 것이 옳은지조차 모르시는 분 같더군요. 그렇게 불법으로 선출된 38기 임원진 역시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관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같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JuNick 긍금한 사람님, 감사합니다. 저는 별똥별님의 팬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에는 조금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반대가 아니고, 뉴욕 교협의 일은 저는 제삼자의 입장으로 지켜볼 뿐입니다. 저는 아멘넷이 어떤 기사가 있으면, 읽는 사람들이 사정을 바로 볼 수 있게, 그리고, 이슈거리가 있으면 여론을 종합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황상하목사님의 칼럼도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오해를 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10/31 20:29
69.xxx.95
JuNick 기다림님의 소원처럼...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몬 대안이 없을가여?
뉴교협...
궁금한사람님, 제가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이 맞습니다. 주일을 지나면서 조금 생각한 것을 share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다 나 살았다고만 하지, 한 사람도 내가 죽을 놈이라는 분은 없네요. 어찌 죽지 않고 다시 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분들을 바다에 던지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요나 1: 11,12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나의 실패만 봅니다. 그러나 요나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10/31 20:55
69.xxx.95
JuNick "너희가 이 풍랑을 만나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하나님은 큰 풍랑으로 요나를 굴복시키셨습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용서와 회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샬롬!!! 10/31 21:02
69
짐보
2011-10-27 17:57
207.xxx.35
뉴욕교협의 시끄러움을 바라보면서
교계의 평균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선의의 경쟁도 아니고
교리의 논쟁도 아닌 두마음을 품은 자들의 소란속의 무질서가 교계에서 마침이
아닌 교포신문의 기사거리가 되어 먹칠을 하고 있으니.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아니올시다...입니다.
누가 그러데요,그들만의 리그라고.
어제 처럼 답답한날
정수영 목사님의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 중 신약교회 고수주의자
들로 이단으로 정죄받아 사라진 바울파(Paulicians)를 읽으며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봅니다.
[바울파에 관한 자료로는 E. Gibbon이 쓴 「로마제국의 흥망사」 4권이나 Newman의 교회사 1권(pp.379-386)에도 있고, 「순례하는 교회」pp.80-87과 「기독교대백과사전 6권」pp.1272-1276에 수록되어 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1) 바울파의 기원
바울파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바울파의 신앙과 주장이 신약교회 때 유대교의 개혁을 주도한 바울처럼 이들도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파라고 한다는 설과, 또 하나는 바울이 개혁을 내세워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파벌 활동을 조성했던 것처럼 파벌주의자에 대한 경멸적 호칭이었다는 설이었다.
하여간 기존 카톨릭 세력을 개혁하고자 했던 운동 세력을 바울파라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들 바울파의 기원은 AD640년경 '실루아노' 혹은 '실바'(Silvanus)라고 부르는 콘스탄틴(Constantine)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콘스탄틴은 사라센(Saracens)인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풀려나온 한 아르메니아 사람으로부터 성경의 한 사본을 얻게 된다.
콘스탄틴은 그 성경 사본을 통해 삶의 급격한 변화를 받고 그 이름을 바울의 동료였던 실루나오, 혹은 실라라고 바꾼다. 그리고 그는 곧 비잔틴 동방교회들이 성상 숭배를 하고 미신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로 인하여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틴 포고나투스'(668-685, Constantine Pogonatus)가 보낸 '시므온'(Simeon)이란 관리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다.
그런데 콘스탄틴을 돌로 죽이도록 했던 관리 시므온이 콘스탄틴이 죽은 후에 그의 신앙과 삶에 너무 감동이 되어 3년 후에 그도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는 자기 이름을 '티투스'(Titus)라고 개명하고 관리직을 버리고 '카브사'로 도망하여 열심히 복음전도에 힘쓴다. 그러자 '유스티니안 2세'(Justininian II) 황제는 '시므온'을 비롯한 많은 성도들을 이단자로 몰아 불에 태워 죽인다.
이렇게 성상파괴와 우상숭배를 배격하다가 황제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는 사람이 계속하여 연결된다. 즉, 콘스탄틴, 시므온, 게네시오스(Genesios), 요셉(Joseph), 사가랴(Zacharia), 바네스(Bannes), 셈바트(Sembat), 세르기우스(Sergius)와 같은 이들은 연이은 박해를 통해 죽음으로 항거하며 신앙을 고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상 예배가 우상숭배라는 확신 속에서 계속하여 기존 카톨릭 교회들과 싸우며 순교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200여년 동안 계속하여 올바른 신앙수호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은 「진리의 열쇠」(The Key of Truth ; 이 책은 본래 아르메니아어로 써진 것으로 1891년 F. C. Conybeare에 의해 편집, 번역되었다)라는 책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카톨릭이 쓴 기록에는 사가랴를 '돈만 아는 목자'(Chireling Shepherd), 바네스는 '더러운 사람'(filty one)이라고 기록되어 전해져오고 있다.
842년부터 867년 사이에 '데오도라'황제의 칙령으로 열렬한 박해 때문에 10만명이 넘는 순수한 기독 신자들이 죽게 된다. 이들이 죽는 원인은 성상, 돌, 십자가, 나무 등의 허탄한 우상숭배를 거부한 것이 주 원인이었다. 이들 성상예배에 대한 반대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소아시아 지방 북단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통칭하여 '바울파'라고 한다.
이들이 계속 박해에 밀려 사라센 쪽으로 쫓겨가던 이들은 그들을 박해하던 동방교회와 카톨릭에서 마니교도 또는 바울파라고 경멸하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수세기 동안 자기들을 죽이고 박해하는 이들에게 보복하려 하지 않고 계속 인내로 고난을 참아나갔다...
바울파의 대표적인 신앙의 주장
1)이들은 전통과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미명하에 창안된 모든 인간적 산물을 모조리 배격하였다. 오직 성서만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권위있는 규범이라고 주장하였다. 카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전통이나 교권주의 산물인 교황제도를 가장 거세게 반대한 가장 강력한 반 카톨릭 세력이었다.
2) 성례전에서 '상징론'이나 이와 유사한 모든 주장을 거절한다.
3) 카톨릭의 성직 계급을 거부하고 비판한다. 모든 신자의 영적 개성과 능력을 평등하게 인정했다.
4)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침례만 주장하였다. 이들은 예수께서 30세에 침례를 받았으므로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회개, 침례, 주의 만찬만 인정했다.
5) 마리아의 영구적 동정녀 교리, 무원죄의 탄생 교리를 반대했다.
6) 연옥 교리를 반대했다.
7) 성자들의 중보기도에 관한 교리를 거부했다.
8) 성화, 성상, 십자가, 고상, 향품 등 모든 우상숭배 요소를 배격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바울파의 신앙은 신약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조금도 이단적 요소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단으로 몰렸고 끝내는 억울한 누명이 아직도 벗겨지지 않은 채로 지속되고 있다.]
역사속에서 사라진 바울파를 읽으며
저 안의 신앙사조와 비교하며 동의 하게 됩니다.
이제 변절된 신앙의 습관과 버릇을 고쳐야 겠는데...
어디에 눈을 돌릴까?
가을비 오는 오후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어디로 갈까?
언제까지 기다려주실까?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장달윤목사
짐보님 참으로 감사 합니다.
나는 목사로 평생을 지났지만 8세기에 바울파 신앙자들이 우상숭배를 반대하다 그렇게 박해를 당하고 10만이 넘는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였는데 저만 잘 몰랐내요.
종교 역사속에 기독교 만큼 살육을 한 종교가 또 있습니까?
좋고 옳은 일을 한답시고 악한일을 너무 많이했어요.
미래를 위하여 모든 종교인들이 회개할 일입니다. 11/4 04:00
218.xxx.15
해처럼달처럼
2011-10-27 12:55
76.xxx.252
서로 생각과 비전은 달라도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해주고 높이 평가해 주는 그런 바나바 같은 우리 모두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말 가슴이 아파요. 하나님은 오죽 하시겠어요.
저 자신도 마찬가지이구요. 무언가 제가 당한 이 상황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턴 하는 계기가 되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클린' 하라고 '턴' 하는 클린턴이 아니고 말입니다.
기자석
해처럼달처럼님께서 아침부터 글을 올리셨는데 죄송하게도 우리 별똥별 선생님께서 엉뚱한 일을 하시느라 아직까지도 답들을 드리지 않으니, 제자된 제가 오하려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쪼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선생님께서 나오실 동안 잠깐 시간이 있으니 심심치 않게 제가 한 말씀 드리면요.
"해처럼달처럼님"께서 제시한 윗글의 제안은 진짜 하나님의 자녀나 가족, 친척, 친구, 혹은 진짜백이 하나님의 단체나 교회들 사이에서 하는 것이구요, 그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행동은 세상 정치단체들이 하는 짓이라고 보면 딱 맞습니다.
아마 저의 부족한 설명이 있다면 우리 "별똥별선생님"께서 보완해주시리라 믿어집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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