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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이냐, 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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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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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 혹은 사건을 대할 때, 나타나는 반응과 그 반응자에 대해 두 부류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을 해보면, 첫째, 어떤 행동(action)을 취하기 전, 생각하는 사람, 즉, 내가 이 말, 혹은 행동을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하여 (for what)”, 무엇 때문인가? 먼저 사건, 사물을 심도 높게 고찰한 다음, 결론에 이르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행동에 옮겨야 할 어떤 필요성을 느꼈을 때 반응하는 사람이고, 다음은 생각하기 전, 행동(action)부터 취하고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하려고 하는 말이나 일에 목적이 없기에, 즉흥적이다. 시쳇말로 주먹이 먼저 날아가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여기에다 '다혈질'기질을 더한 사람이라면, 그때는 정말 낭패다. 이런 사람은 말에나 행동에 실수가 잦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동은 물론이고, 상대 토론자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힐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도 큰 상처를 입을 수가 있다. 이런 사람은 토론에 뛰어드는 것을 자제하고 자신의 성품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십사 주님께 기도를 먼저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 말, 혹은 이런 행동을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행동하기 전, 깊이 한 번 더 그 목적을 생각해 본 다음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실수가 작을 것이며, 그런 사람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아멘넷의 기사란, 칼럼난, 또 독자공간 게시판에서도 신앙의 노선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보이는 신사도파, 아이홉, 인터콥 등… 그들의 정체성을 파헤치는 많은 글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오고 있다. 가히 신학적 논쟁이 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 많은 명제가 한꺼번에 다루어지면서 그에 따른 논객들의 반응이 격렬하다 못해 위험 수위를 넘어서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듯한 유치함, 절제되지 못한 언사들을 마구 쏟아놓기도 하고, 상대방 흠집 내기, 인신공격, 야유가 섞인 저속한 말로 상대방 헐뜯기 등등… 세상 정치판에서나 볼 수 있는 야유와 비방, 모함, 시정잡배들처럼 낯뜨거운 발언도 서슴지 않는 댓글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 편해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억눌려왔던 사회적 지위, 이민 생활의 고달픔 등에서 누적되어온 스트레스를 푸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근본이 사악한 사단의 유혹에 춤추는 것일까? 우리가 성도를 떠나서 지성인이라면 결코 이건 아닌데,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으리만큼 수준 낮은 토론 자세를 바라보면서 이런 류의 댓글들이 과연 성도의 가슴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언어들이라고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즉흥적이며 감정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 무차별적 공격성, 때로는 치밀한 계획 아래, 상대방 죽이기 비방성 게시글과 댓글들을 대하면서, 보는 이의 영혼마저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고, 많이도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다 좋다. 문제는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변론하고 있는가? 하는 것 정도는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과 변론의 목적을 상실하고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조차 망각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심각한 문제로서 반드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멘넷 독자님들만이라도 좀 더 성숙한 댓글 문화를 이루어 나가는 데 앞장서는 시대적 선구자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인 논객이라 자부하는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함께 풀어나가야 할 중차대한 과제란 생각이 든다.

1. 변론하라! 그러나 악(evil)을 행하지는 마라!

변증법 (그리스어: διαλεκτική)은 正 명제와 반 명제를 사용하여 이들 모순되는 주장의 합 명제를 찾거나 최소한 대화가 지향하는 방향의 질적 변화를 일구어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가 바른 복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토론도 하고, 정(right)과 반(wrong), 옳고 그름을 논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바른 변증법을 사용하여 변론하는 것이라면, 변론 그 자체를 결코 나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지 말고 신사답게, 성도답게 공정한 게임(play fairly) 을 하라는 것이다.

변론(辯論)(defense, defend)의 사전적 의미로는 몇 가지 다른 뜻이 있으나, 그 첫 번째 뜻이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렇다면 악(evil)은 무엇인가? 악이란(惡) 단어를 국어사전에서는 1.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나쁨. 또는 그런 것. 2. 도덕률이나 양심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글이란 단순히 글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내가 남기는 나의 댓글이, 신앙을 떠나서라도 사전적 의미, 이 정도의 상식이라도 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도로서 토론에 임하는 자세는, “변론이냐, 악(evil)이냐"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진리의 복음을 사수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말씀의 떡을 떼는 변론이 선(good)이라면, 정도(正道)를 벗어나, 편법,나쁜 언사, 혹은 상대를 죽이기 위하여 자신을 속이는 짓도 서슴지 않는 비겁한 태도는 악(evil)이다.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살펴보면, 무엇을 하거나 정도(正道)를 행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벨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본으로 보여주시며 짐승을 잡아 시행하신 제사법 제도를 따라서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쳤고, 그 짐승의 피를 의지한 제사를 드렸기에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다. 무엇보다 아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히 11:4절 참조) 그러나 가인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채, 자신의 뜻에 따라 인간적인 생각을 제사법 제도 위에 두었다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지 않는 헛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정도(正道)가 아닌, 편법, 인간적인 방법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 일로 인하여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인간 최초의 살인자라는 천추만대의 비극적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유리 방황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아주 중요한 말씀이 여기에 나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 7절)” 영어 성경을 보면, “And if you do not do well, sin lies at the door. And its desire is for you, but you should rule over it.” 그러니까, 죄 그 자체가 하나의 격으로 표현된다. “죄”란 히브리 원어로 “카타드”인데, 여기서는 “뱀” 곧, 사단을 지칭한다고 한다.( keil. Delitzsch). 이 해석이 옳은 것은, 다음 문장을 보면, “엎드리느니라 (로베츠)”와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죄를 가볍게 여겨 한 번 죄를 짓고 나면, 다음에는 그 사람의 마음 문 앞에 죄(사단)가 웅크리고 엎드려서 그 마음을 주관하려 하기에, 그때부터 그 사람의 삶은 더욱 고달프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죄를 지은 사람이 지은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죄를 짓는 것을 알 수 있고, 여기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바울 사도는 밤낮으로 말씀을 강론하되 장소에 구애받음이 없었고, 높은 자, 낮은 자, 시장이건, 회당에서건, 법정에서건 어디에서나 그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은 변론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토론 자세만 아니라면, 바른 복음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요즘처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말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정(right)과 반(wrong)은 반드시 가려내어야 하고, 말씀의 떡을 떼는 동안에 분별력도 기르고 믿음이 더 연약한 성도들에게는 그동안 잘 알지 못하던 부분의 성경 말씀을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2.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훈련하라

이곳은 기독 사이트이기에 우리가 댓글 하나를 남기더라도 반드시 주님의 영광을 먼저 염두에 두고 변론을 하여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허상을 세워두고 그 허상을 향해 맹공격을 하는 것 같은 태도는 올바른 토론 자세가 아니다. 우리의 만남은 비록 사이버 공간에서의 만남 뿐이라고는 하지만, 대화를 필요로 하는 인격대 인격의 만남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기록되어 진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논객들에게 반드시 한 개의 아이디, 혹은 본명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어떤 마음으로 댓글 토론에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 어떤 필명으로 댓글 토론에 참여하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본명과 다름없는, 이곳에서 사용하는 충분히 아름다운 닉이 있지만, 토론할 때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때로 다른 아이디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상대 토론객에게 악을 행하려 함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다. 상대 토론객의 감정을 좀 더 자유롭고 편한 자세로 토론에 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상대 토론자가 아멘넷의 고정 칼럼니스트의 한 사람에게 직접적인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을 줄여 주고, 토론을 할 때, 필요 이상의 부담감을 주지 않으며, 가벼운 기분으로 서로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고 함께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가? 토론을 하여 보자고 하는 선한 취지, 상대 논객의 감정을 배려하는 필자의 열린 마음이다. 그런 나의 마음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무슨 큰 범죄행위나 저지른 듯, 필자를 공격하는 분을 몇 사람 만나보기도 했지만, 나는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꺼리낌이 없기에 그런 오해와 공격성 발언에 노염을 타거나, 별로 개의치 않으려 한다. 얼굴이 보이건, 보이지 않건, 나는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는 토론을 진행해 나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고, 진실은 언젠가는 통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 신령한 의미로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각 지체가 힘을 합쳐 하나님의 지상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아멘넷을, 기독 사이트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 할 연대적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나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런 바리새파 닮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떠난 생활,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개개인이 그분 앞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만이 문제 해결(solution)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무서운 폭설과 한파에 시달려야만 했던 겨울도 이제 곧 지나가고 죽었던 나무에서 새싹의 생명체가 되살아나는 따스한 봄이 찾아올 것이다. 따스한 봄이 오면, 부활절이 오겠지, 부활절이 다가오면,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게 된다. 찬란한 부활의 아침이 있기 전, 우리 주님께서는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음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고난은 “내가 죽어 너를 살리겠다고” 하는 이타의 마음이다. 그런데, 그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도들의 언행심사기거동작은 주님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점점 더 흉악한 이리를 닮아간다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또 어쩐일일까? 우리는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할 때,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기까지 참으셔야만 했던 우리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십자가의 고난이 안고 있는 그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나를 포함)는 내 마음에 좀 들지 않는다 하여 상대방을 죽이는 말을 뱉아내기를 서슴지 않는 죄악된 습성들일랑은, 겨울 두껍고 낡은 외투를 훌훌 벗어던지 듯, 훌훌 벗어던지고, 아니,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못박아 버리고, 대신, 형제를 살려주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습득해 나가는 멋진 성도로 다시 태어나는 화사한 봄, 찬란한 부활의 계절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고운말 사용하기, 격려풀 남기기 운동에 앞장을 선다면, 그 선행이, 세계로 파급되어서, 아까운 인재들이나 장래가 촉망되는 기라성같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어버려야 할 만큼 심한 악플에 시달리고, 급기야 모든 이들이 다 자신의 적으로만 보이는 신경성 과민반응을 보이는 비극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린 속물이라 주님처럼 그렇게 남을 위해 죽어 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조금씩만 양보하고 마음을 넓힌다면, 서로 격려해 주며, 서로 감싸주는 댓글문화를 이룩하여, 이 곳만이라도 보다 아름다운 기독교 사이트로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 서로 감싸주며, 서로 격려해 주는 댓글들로 풍성한 생명의 샘터로서의 아멘넷, 주님 안에서 성숙한 인격체로 다시 태어난 성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내는 '아멘넷'...,우리들의 공간으로서 보다 향기로운 장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모아 기도드려 본다. 공정한 변론을 할 것인가, 악(evil)을 행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한1서3:14절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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