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제네시스(biojenesis), 성령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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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ㆍ2011-01-0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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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사람(born again Christian)은 ‘성령의 사람’이며, 생물학(生物學)적 용어를 빌리면,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이다. ‘바이오제네시스’, 생물은 생물에서만 난다는 설,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 생명을 받는 것, 生에서 生이 난다는 것, 죽음에서는 결코 生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생물학(生物學)적 원리다. 이런 원리로, 산 생명이신 성령 하나님이 마음속에 내주한 사람은 생명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생명이 없으며 이름과 형체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것이다.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거듭남의 고백 (입술만으로가 아닌, 진정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롬 10: 9-10)함 없이 직분을 받은 자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비일비재 일어나는 탓에, 주님의 교회는 지금 큰 수난을 겪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저지르는 온갖 추악한 죄악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모두 전 세계의 성도들과 주님의 교회가 함께 뒤집어쓰게 된 오물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인가…. (말씀에 의지하여 바로 살아보려고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마저 무더기로 “개독교인”이란 소릴 듣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말이다. ㅠㅠ)
죽은 송장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고, 산 생명에서는 생명의 향기가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2:14-16절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산 생명이 아니다. (1요 5: 12)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주님의 영광을 실추시키는 자리에서 떠나고 나중에 주님의 얼굴을 만나 뵙기 원하면 먼저 내가 믿음에 서 있는가 자기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재점검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고후 13: 5) 성령과 성령의 사람을 알지 못하는 무지(ignorant)가 빚어내는 촌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현상으로 미혹하는 영이 활개를 치는 세상, 정신을 차리고 분별하지 않으면 내가 잠식당하게 된다. 짧은 지면에 모두 다 논하기는 어렵지만, 간단히나마 성령과 성령의 사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 새해에는 우리 다 함께,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보자는 슬로건이라도 내어걸고 싶은 심경으로 정리를 해 본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神이심을 믿는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한다
“성령”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성신” (루-아흐 코드쇼) 2회 사용되었다. (사 63: 10, 11) 신약에는 “성령”이란 말이 93회가 인용되었다. 구약에는 “루-아흐”가 단독으로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선한 신”(Spirit, 대문자로 표현)으로 번역되었다. (느 9:20, 30, 시 139:7, 슥 7:12) 신약에도 (프뉴마)가 단독으로 “성령, Spirit”으로 표현되지만, (마 4:1, 22: 43, 등 13회가 사용되며, 또는 ‘하나님의 성령’ (το Πνεύμα του Θεού)가 사용되고(마 12: 28, 고전 6: 11, 7: 40), ‘주의 성령’ (the Spirit of the Lord, το Πνεύμα του Κυρίου) (눅 4: 18 ), 또는 ‘예수의 성령’ (the Spirit of Jesus, το Πνεύμα του Ιησού)( 행 16: 7 )으로도 인용된다. 또 (바람)이라든가 ‘호흡’이라든가 공기의 진동을 뜻하는 것이 본래의 의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해당 되어지는 (생명), (영혼)의 뜻이 된다. (창 2:7, 출 35: 31, 욥 7: 11)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 주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삼위일체의 신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 원어 대사전 참조
성령의 사역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의 하시는 사역을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성령님을 어떤 마술의 영으로 착각할 수 있고, 신성을 버리고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을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이비 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성령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해주신다.(요 16: 8절), 성령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Lord)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고전 12: 3절), 성령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성령의 세례(침례)를 주신다. (고전 12:13절) 성령은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요 6: 63절), 성령은 신자들 안에 거하신다. (고전 6: 19절), 성령은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 롬 8: 16절) 성도의 일상 삶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성령은 지 정 의(知情意)를 온전히 갖추신 인격적인 신(神)이시다. 불신자들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고전 2: 12-14절) 섬기는 일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고전 12: 7-11절),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도 성령께서 친히 결정하신다.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 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벧전 4: 10, 고전 12: 7절)
성령의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
1.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곧 ‘외식(hypocrisy)’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조심하라” (눅 12: 1下)고 경고하신 것이다. ‘외식’, 그렇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외식’인 것이다. 외식이란 글자 그대로 안과 겉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외적인 현상은 오직 그 열매뿐이다. 그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 타인은 누구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성령님과 자기 자신은 알 것이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든지, 바리새인의 누룩(외식)으로 포장하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누룩이란, 확산되어 본질을 부패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기독교계 안에서 불거져 나오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목사들의 간음, 성폭행 문제나 재정비리 의혹, 세습 문제 등, 전 세계의 기독교계를 절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즐기다 그 덫에 치어 헤어나오지 못한 탓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고로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바리새인의 누룩을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 믿음의 상태를 비추어 살펴보아 바르게 분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깨달아졌으면 회개하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나 돌이켜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이다.
2.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거짓 은사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주 간단(simple)할 것 같은 issue건만 각처에서 뜨거운 감자로 달아오르고 있는 은사론, 신사도 운동, 은사중지론 등은 세기를 두고 신학자들 간의 논쟁이 치열했으나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결말이 나지 않고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고, 아전인수(我田引水), 천착지학(穿鑿之學),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자기의 사상이나 지식의 틀에 끼어 맞추려고 말씀을 끌어다 붙이기 때문이며, 성도들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은 목사님들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은사중단론 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극단적 신비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은 모두 아멘으로 받고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축자영감설’을 그대로 믿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방언도 다른 은사들처럼 교회와 개인의 건덕을 위해서 주시는 성령님의 선물로 믿어야 하고,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해야하되 영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모든 방언이 다 성령의 주시는 선물로서 온 것이 아닌, 사단의 장난질 방언도 있다는 것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을진대, 외국어로 들려지고 알아지는 방언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인간의 소리가 아닌, 영으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알아듣지 못할 방언도 있다는 것도 인정하자. 모든 방언이 각 지방 언어들로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면 영들을 다 믿지말고 분별하라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두었겠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면 관계로 간증을 넣을 수는 없지만, 나는 외국어로 방언하는 것과 같은 현상, 어릴 적 고아로 자라,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여 일자무식한 사람이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아, 영어 성경을 줄줄 읽을 수 있고 영어로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부인을 만난 적 있다. 또 방언을 한다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원망하며 밤새도록 저주하는 것도 들어본 적 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권면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7 ), 놀라운 것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는 자를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참 선지자도 아니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며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미혹의 길로 끌고 가려는 사단의 졸개들이다. 계속해서 다시 보자. “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고후 11: 14-15)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떤 독자님이 댓글로 남긴 말이 가슴에 와닿기에 여기 옮겨본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성경말씀을 인간적인 사고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함께 눈에 보이는 이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참.. 성경 말씀은 상당히 함축적, 암시적인 표현이 많은데...그것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추론한다는 것이 참 어불성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런데 기존의 정통 교회들도 그 방향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우려스럽기도 하구...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 안스럽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습 중에서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고 고쳐나가며 눈에 보이는 이적을 구하기보다 말씀에 드러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들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옳은 말씀이 아닌가, 성령의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깨달음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죄에게 굴복하지 아니한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죄 성이 남아 있어 죄의 유혹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을 받는다고 하여도, 죄가 그 사람을 주장할 수 없도록 주님의 영이 지키신다. 때문에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가슴과 머리, 말과 행위가 모두 함께 나간다. 거듭난 사람은 작은 죄를 지어도 성령의 탄식하시는 세미한 음성이 들려져 그 양심이 심히 괴롭다. 그러면 기도하게 되고, 성령의 도우심과 회개의 영으로 죄사함을 받고 돌이켜 구원함에 이르는 것이다. 안과 밖이 다른, 외식으로 포장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Holy Spirit)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요 5: 18절 말씀) 죄의 소원은 성령의 사람에게도 있으나 죄가 그를 주장하거나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죄를 이기고 승리한다. 이것이 성령의 법, 곧 생명의 법이다!
성령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
a)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시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새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새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새해에 우리는 극단적 신비주의나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물든데서 돌이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정욕, 이런 육신에 속한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 봐야 성령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요즘처럼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위상이 바닥을 친 시대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교회 등록하고 매주 교회 출석하는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보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으로서. 반드시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Holy Spirit, 삼위 일체의 영)으로 중생한(born again)사람, 성령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옳다. (요 3: 3-9절 참조)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이런 사람은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 생명의 신이 그 속에 내주해 계신, 거듭난 사람( born again Christian)이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성령의 사람은 생명의 열매가 그 생활 속에서 맺히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별첨1:
지난 번, 필자가 정목사님의 글 아래 남긴 댓글인데, 칼럼글이 너무 길어져서 이곳에 별첨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지.정.의(知情意)를 온전히 구비하신 인격적 神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1. 성령은 知적인 神이시다.
인간은 아무리 유능해도 그 知적 능력에 한계가 있으나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知적 신(神)이시며, 이는 성령의 지혜와 통달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성령 앞에서 숨기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a)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신(神)이시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사 11: 2)
b)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알고 계신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 고전 2:10)
c) 우리와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계신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 고전 2: 11)
d)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세계를 가르쳐 알게 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 13)
2. 성령은 감정을 지니고 계신다.
성령의 인격적 속성에는 감정적 속성이 있으므로 기뻐하시고, 근심하시고, 사랑하시며, 탄식하기도 하신다.
a) 성령은 근심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엡 4: 3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으니…” (사 63: 10)
b) 성령 하나님은 탄식하기도 하신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니라” ( 롬 8: 26)
c) 성령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신다.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 롬 15: 30)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기뻐하시지만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 근심하시며, 탄식하신다. 성도는 결코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
3. 성령은 意지적 속성을 지니고 계신다.
성령은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갖추시고 사역하신다.
a) 성령은 그 뜻(의지)대로 은사를 주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 고전 12:11)
b) 성령은 명령하고, 지시하신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 행 13: 2),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 행 8: 29)
c) 성령은 성도들을 인도하신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 14)
d)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자라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전 12:3) )
별첨 2:
이글은, 저의 칼럼글에 보충 설명이라고 보시면 틀림이 없겠습니다. 본글의 지면상 이곳에 남깁니다.
저는 오래 전, "방언은 모든 은사의 입문이며, 성령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방언을 할 수 있다고."고 피력하시던 k 목사님과 방언 문제를 두고 심한 마찰을 빚었고, 그것 때문에 주님께, 오래도록 기도해 오던 중, 어느 날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응답은, 다음 두 가지 단어였습니다. “신생아” 그리고 “ability”란 단어였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주님께서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다 성도가 아니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육이 아니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이것을 신학상 술어로는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우리가 거듭난 성도인가? 아니면, 성전 마당만 밟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하고, 우리가 거듭나게된 것이 무엇으로 되었는가?하는 것을 알아야하며, 우리 속에 내주(in dwelling)하고 계신 성령님이 어떤 분인가?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는 주님이 께닫게 해 주신 ‘신생아’ 와 ‘ability’를 생각해 보십시다.
아이가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는 우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태어날 때, 이미 언어를 배울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ability’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동안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즉, 우리 마음속에 있는 “unrealized ability" 를 점차 개발해 나가는 것 뿐이고요. 그러나 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은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를 않고 태어나기에, 다 성장한 후가 아니라,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인간처럼 아름다운 언어를 습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동물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realized or unrealized ability)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화설’의 허구도 알게 됨)
물론, 이 말 속에는 반드시 거듭난 성도여야만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져야만 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여도 그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in dwelling)이 안 계시다면, 성령님의 속성 중 하나인 방언(영언)을 할 수 있는 ability가 처음부터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 속에 거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방언은 누구의 선물입니까? 예, 성령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한 번 알아듣기 쉽게 말씀드리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 난 사람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속에는 반드시 영적 언어를 배울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unrealized ability’ 를 가지고 태어 난 영적 신생아이입니다! 왜요? 만약 인간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이 성령님께로부터라면,(영계에는 천사의 방언도 있고, 사탄의 흉내 방언도 있기에,) 그 방언의 주체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성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예수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으로 보지를 않고(육안으로 알 수가 없기에),'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성도’라는 시각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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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달윤
2011-01-21 02:42
218.xxx.174
사모님 놀랍게 박식 하십니다.
사모님의 학식, 신학, 신앙, 사명감 너무도 고차원이시고 귀한 하나님의 딸로
귀하게 쓰임받는 주님의 종임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교회에서 주일마다 설교하는 목사만 큰 종이아니고 이 아멘넷을 통하여 수천 수만명이 읽고 은혜받게하는 사모님은 더 큰 종임을 인정합니다.
귀하신 사모님 감사합니다.
Junyoungkim
2011-01-18 01:15
64.xxx.27
I like the opinion of 별똥별님, and also I agree with 교제님's counterargument, they're outstanding & Biblical.
김오동
2011-01-08 02:32
218.xxx.139
별똥별님!
성령론에 관한 논문수준이군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자라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전 12:3)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시는 이가 성령님이시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순서는 아버지-아들-성령이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그 역순, 성령-아들-아버지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는 "오르락 내리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소통이 원만할 때 성령충만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관하여 어찌 우리가 다 설명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관하여 아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절실하지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하리로다."
필요하고 유익한 글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thomas
2011-01-08 23:26
72.xxx.2
별똥별 님,
성령충만을 지속하려면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매년 그래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항상 년말이 되면 절망적인 자신을 발견합니다. 올해는 좀 나으려나...에고..
칼빈을 루터와 비교하여 어떤 신학자가 평하기를, 칼빈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사람이기 전에 본질적인 합일과 지엽적인 차이의 경중을 이해하여 실천 가능한 민주적 대안을 구현한 주님의 종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멘넷에서 여러 논객들의 다양한 의견을 포용하시면서도 문제의 경중을 가려 지혜롭게 신앙의 공동체를 가꾸어 가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별똥별님께 경의를 표하면서, 새해에도 계획하시는 일 가운데 귀한 성령의 열매가 알차게 익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비둘기
2011-01-08 21:21
66.xxx.79
새해들어 첫번째 사모님의 칼럼으로
주님으로 부터 받아 생명수로 전하는 곳에
성령의 물이 되어 흐르고 흘러흘러
거듭난 사람들이 마시고
생명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주님으로 부터 명령받는 파수꾼의 사명
사탄의 공격과 도전, 그 실체들을 바로 분별하여
세상속으로 흘러가게 하여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혼탁해져가는 교회,사회,성도들을 향해
끊임없이 미혹하고 있는 그 흐름에 대하여
경고하여 깨닫게 하시는 수고
이 시대에 사모님 같은 파수꾼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영, 삼위일체 영께서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시길 바라며, 복스런 깨달음으로 나누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holykang
2011-01-08 12:25
24.xxx.10
역시 별사모님글은 향상은혜스럽고 좋은글입니다
솔직히 방언에대해서 여러가지이야기가 있고 토론들이 뜨겁지만
방언은 신앙생활에있어서 그렇게 중요한겄은 아니지요
방언을 주시는 성령하나님에게 이끌리는 삶이 중요한거지.
우리의 주인님이 되시는 그분의 삶을 닮는게 중요한거지요
그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향기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내는게 진정으로 성도들에게는 중요한거라 믿읍니다.
제가 하나님의 성회에 소속되있어서 그러는대
저희에 대해 잘모르시는분들은 상상하기를 저희가 항상 신비한겄만 추구하고 은사이야기만하고 방언만 중요시하는줄 아는대
저희교회는 오순절교회지만 목사님께서 예배도중에 방언에 대한 설교을 한적이 기억이 않날정도로 방언에 초점을 맞추는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함니다. 항상 관심의 초점이 예수님의 관심에 두고 설교와 예배을 드림니다. 기복신앙역시 저희교회에서는 강조한적이없읍니다.
오히려 희생과 순종을 강조함니다.
방문하신 목사님들께서 강조하신 기억은 나도
저희 담임목사님께서 물질적 축복과 방언을 주제로 말씀하신 기억은 없읍니다
우리의 관심은 항상 예수님의 관심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것들 그리고 그분에게 pleasure을 주는일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는게 성도로서의 의무라고 믿고 살아왔읍니다
저희 자랑만 한겄같아 조금 거시기 함니다만.
항상 발란스가 있는 글을 추구하시는 사모님의 글 감사하고
사모님의 글이 아맨냇에 뜨면 애독하고 은혜받고 있읍니다
새해에는 뜨겁게 예수님과 그분이 피흘려 사랑하신 교회을 사랑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함니다
마란아타
2011-01-08 09:27
98.xxx.69
별사모님,
사탄의 세력들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그 어느때 보다도 더 극악스럽게 주님의 교회를 난도질하는 때에 때를 맞춰 참으로 귀한 말씀을 올리셨군요.
뜨거운 여름 ㅤㅂㅕㅊ에 영글어 가는 포도송이 같이 쌓여가는 분노가 종종뵙는 별사모님의 말씀으로 삭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말씀에 바로 서지못하고 비칠거리는 나의 못난 모습을 깊은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소리를 듣고 위로를 받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란 말씀만큼은 죽을지언정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야 할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영적 어지러운 때를 살아가는 저희들은 영육의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성령님께만 맡기고 의지 해야 할때에 성령님의관한 폭넓은 말씀을 주시니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수고에 수고를 더 하시는 별사모님,
님의 해박하신 지식의 말씀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계속 별사모님의 살아있는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주님만이 주실수 있는 사랑과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체르니
2011-01-08 01:42
112.xxx.177
항상 좋은 글을 올려주시는 별사모님 감사합니다.
요사이 세상에 떠오르는 다양한 메시지들을 보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말씀이 있어서 올려보아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장 7,8절)"
성경말씀은 처음에는 딱딱한 느낌같지만 읽을 때마다 또다른 감동을 주니
어찌 딱딱한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말랑말랑하고 5가지 맛을 낸다는 오미자와 같이 상큼한 맛이 있는 것 같아요.. (^-^)
교제
2011-01-08 03:06
24.xxx.199
복음을 다른 것과 혼합하지 않고 각색하지 않고 순전하게
성실하게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권위로 의의 교훈을
주는 글을 대하니 너무 좋습니다.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오네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 봐야 성령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명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교훈만 전하며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도록 이끄는 설교만큼
심령이 반기는 설교가 따로 없기에 평생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안의 생명과 능력과 은혜를 받아 사는
성령의 사람인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 주의하고 분별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성령충만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 수 있는지 참으로
바르게 명료하게 절제되게 전해 주시는 유익한 글, 새해 첫
칼럼글로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글 나오면 일착으로 댓글 달려고 했는데 이미 김성훈님
체르니님,김오동 목사님께서 다녀 가셨네요^^.
체르니
안녕하세요. 교제님^^
제가 일등으로 출석체크하려했는데..저보다 별사모님의 글을 사모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순위에서 밀렸다는... -_+a;;
별똥별
2011-01-08 17:05
24.xxx.14
《Re》g2u 님 ,
쪽글로는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지면 관계상 댓글로 남김을 양해 바랍니다. ^^
저는 언제나 g2u 형제님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인데요, 다음,
(방언은 우리 모두가 사모하여야 할 영언이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위임하신 새 방언으로 성령에 충만한 크리스찬은 모두가 하여야 할 새 방언인가? ) -g2u
위의 문구는 잘못 이해하면 다른 분들께 오해를 남길 소지가 있기에, 다시 설명을 드립니다. 방언은 성령님의 선물로서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로 보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모한다고 모든 사람에게 다 방언을 주시지는 않는다고 보고 있고요, 성령 충만한 성도라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방언을 해야 한다거나, 방언은 은사의 입문이라든지...그렇게 보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다른 어느 목사님과 심각하게 대립이 된 적도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그때 주님께서 특별하게 깨우쳐 주신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을 위의 본글에 별첨2로 첨부해 드렸습니다. 참고를 바랍니다.)
개인 교회이건, 공동체 교회이건, 방언이 필요하다고 주님께서 판단하시면 방언도 주실 것이고 필요치 않으면 주시지 않는다고 보고 있어요. 방언 은사의 주체도 성령 하나님이시고, 모든 은사의 주권은 온전히 성령 하나님께만 있음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가 다 방언 은사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 글 참조(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도 성령께서 친히 결정하신다.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 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벧전 4: 10, 고전 12: 7절)
단지, 다른 사람이 방언을 어떤 방언으로 (외국어이든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언이든지) 말하던, 그 방언의 종류에 관해서 제한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구요. 그 방언이 성령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단의 흉내 방언인지, 반드시 분별의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구요. 모든 방언이 다 귀신으로부터...라는 견해도 지지할 수 없구요, 모든 방언이 다 성령님의 선물이다...하는 것도 성경적이질 않다는 것이지요. ㅎㅎㅎ
성령 충만한 성도님들 중에는,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해도, 다른 은사를 받은 분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본 바른 방언관이라고 믿고 있어요.
행여 저의 부족한 글솜씨로 인해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의문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을 남겨주시면 고맙겠어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으로 답변을 해 드릴 것이고,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은, 우리 독자님들 중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고, 또 평신도 분들 중에도 저보다 훨씬 더 실력있는 분들이 많으니까, 그분들께 도움도 요청하고요....우리 함께 공부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별똥별 옥성호 씨의 책을 단 한 번도 읽어볼 기회가 없어서 답변을 하기가 좀 그렇구요....제가 믿을 수 있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님들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이런 일에 사용되는...하늘나라에 쌓이는 귀한 시간이 아닐까요? 주님 안에서 귀한 성도의 교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1/8 18:58
24.xxx.14
교제
오해하기가 불가능하게, 오히려 오해를 풀 수
있게 하는 유능한 표현능력이요, 글 솜씨입니다!
성경에 근거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
누지문서
2011-01-08 06:01
71.xxx.226
맞습니다 별똥별님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7 ), "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영적인 욕심을 부추키는 자들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고 기도로 새해를 맞이하렵니다.
긴글의 전체 부분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깨닫는 힘있고 좋은 글입니다.
역시 별똥별님입니다.
교제
2011-01-08 19:43
24.xxx.199
사모님께서 성령에 대해서 서로 함께 배우는 장을 만들기를
제안하시니 이번 기회에 성령 하나님에 대한 각자의 지식을
칼럼장이 허용하는 데까지 한번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부,성자론에 대해서는 정통교단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입장이나 성령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서인지 교단간에
계속 논란이 있어왔고 아멘넷에서도 방언은사,중생 관련하여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첨예하게 대립된
적이 있지만 이 칼럼장에서는 어느 교단의 성령론이 더
성경적인가 주장하기 위한 변론차원이 아니라
그냥 자유롭게 성령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하고 개인적인 견해를
나누어 보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성경이 전혀 지지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에서 나온 펌글이나 견해이면
곤란하겠으니 댓글을 올리시는 분들이 그점은 스스로 고려해
주셔야겠지요.
저도 따지고 주장하는 태도는 이번에 지양하고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지식이나마 성령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충만,세례 관련하여
언급하겠습니다.
성령충만: 충만의 원어는 채우고 완성하다에서 나온 플레로마,성령으로
채워짐이 충만한 상태,가득 부어져 성령으로 완전 포화된 상태,
즉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성과 육을 가진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성령의
뜻으로 가득 채우시고 육까지 온전히 성령의 통제하에
두시는 상태
자의가 아니라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방언,예언)
보게 하심을 따라 보고 (환상,이상) 듣게 하심을 따라 듣고
행하게 하심을 따라 행하는 모든 것은 성령충만한 상태(성경:
filled with the Holy Spirit)에서 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가장한 악령의 역사가 있음이 성경에
경고되었고 분별하라 하였으니 모든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무분별하게 수용하면 안되고 영은 반드시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고 미혹사역은 필히 경계하여야 합니다.
성령침례: 성령으로 받는 침례, 침례의 주체자는 예수 그리스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성령침례는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죄와 허물가운데 죽은 영을
중생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새겨지게
(성령내주)하는 하나님께서 직접 베푸시는 예식이고 성령침례가
베풀어지는 순간은 성령이 충만히 부어지는 순간, 성령충만한
상태입니다. (에스겔 36:25-27/겔 37:14/딛 3:5-6)
성령침례는 죄인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자녀 삼아 성령으로 그 심령에 인치시는,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예식이기 때문에 단 한번으로 온전하게
완성되는 것이고 성령침례는 성도가 받는 첫번째 성령충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뜻에 따라 성령침례받은 자들에게 거듭 반복
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베드로 예: 행 2:4/행 4:8/행4:31)
성령침례 받은 자들이 항상 성령충만한 상태인 것은 아님의 예를
성령충만하여 사역하였던 베드로와 바나바도 때로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못하고 외식한 경우가
있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갈 2장)(바울의 경우 롬7참조)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던 바울을 통해 죄가 있는 육신의 장막을
입고 사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자랑하고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죄의 소원)을 다스리고 날마다
죽으며 복음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역사하는 성령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의 삶이 성령충만한 자의 삶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행전 1: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사도들도 오순절 성령강림때까지는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또 그 약속하신 성령침례는 그 말씀을
받은 때로부터 10일후에 받은 행 2:1-4의 성령충만을 받는 일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성령침례=최초의 성령충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 표징과 그 성령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리라는 표징을 오순절 성령침례를 받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복음의 내용이 담긴
방언을 통해 각 나라 말로 전해진 것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마리아인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으로 인도하시고
믿게 하시는 성령을 부어주심(성령침례)으로 죄사함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만민에게 베푸시고 이방인도 그리스도의 지체,
하나님의 자녀,백성 삼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령침례의 표적을 방언으로
주셨구요( 행 8: 17/행 10:45-46/행 11:14-18)
성령침례받은 상태(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이 항상 내주하는 상태)와
히브리서 6:4-6절에서 언급된 상태는 구분이 되어집니다. 그 차이를
신학적으로 아는 것은 성령론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지요.
1.사울왕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6,10>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16:14>
왕으로서 범죄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사울왕과 솔로몬왕이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다른 은총을 받았는지는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리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삼하 7:14-15>
2. 가룟유다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불러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은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눅 9:1-2>
3. 마 7:15-23절에서 언급된 자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이처럼
성령에 참예하고 신령한 것을 맛 보았다고 성령침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그리스도의 지체라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
(고전 13:5절 참조)
교제 글자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어떤 부분은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게 되었는데 조금씩 보충하렵니다.
성령충만에 대해 참고할 주석 내용
[바울의 경우 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충만에 대해 꼭
한 번만(엡5:18)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성령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른 바 성령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롬8장 에서도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특이한 현상이라 할수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인도나 지배(롬8 : 5,9,11,14
참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인도나 지배를 받는상태를 성령의 충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1/8 20:21
24.xxx.199
교제 앞 글에 이어서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성령세례를 통해서, 또
성령세례를 통해 이미 내주하신 성령(롬 8:9 ,
고전12: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심령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으로 성령이 채워지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제
2011-01-16 03:34
24.xxx.123
`별똥별` 님이 선택한 글 입니다.
질문님,
질문님이 그간 편 논리,주장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이번 결론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본인은 쉽게 깨닫지 못하겠지요, 그저 자신이 귀신의 영적원리에
대해서 더 설명해야겠다느니 또는 자신의 글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오해하는 것으로 넘기시겠지요.
[모든 방언은 귀신방언이다]가 지금까지 질문님이 누차 주장했던
바입니다. [라라라 방언은 귀신방언이다]가 아니라요
"모든 방언"이라는 표현에는 어떤 방언도 ,그 누구의 방언도 예외가
있을 수 없기에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질문님께 그간
여러 사람이 지적하였던 바입니다. 질문님이 정상적으로 받으셨다고
주장하시는 방언도 정상적으로 받았는지 비정상적으로 받았는지에
(그것은 무슨 기준?) 상관없이 다 포함되기에 질문님의 논리를
질문님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적용시켜 질문님은 성령방언이 아니라
귀신방언을 체험했다고 한 것입니다.
질문님의 이전 주장에 의하면 옥성호님의 방언체험도 귀신체험이
되는데 지투유님이나 다른 분들의 방언체험은 귀신체험이라 직접
말해왔으면서 제가 질문님의 논리를 적용하면 세분 방언체험 역시
귀신체험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니 옥성호님이 황당해 하실 것이라는
황당논리는 어찜인지요?
그간 다른 사람의 방언을 모든 방언에 포함시켜 귀신방언이라 하는
것에는 걸림이 없어 하면서도 자신의 방언체험을 귀신방언체험이라
하면 은근하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시더니 이제는 모든 방언이라
하는 선을 고수하는 대신 라라라 방언으로 한정하는 변화를
보이시네요.
[그리고 꾸역꾸역 귀신 방언을 성령방언이라 고집하시면 성령의
속성과 귀신의 속성을 상호 비교하여 납득할만한 분별법을 제시하시면
참고해보죠. 제발 하던말 똑같이 반복하지말고 막연하게" there are
귀신방언 and 성령방언, therefore we speak 성령방언 and some others
speak 귀신방언" 이런 고리타분한 결론은 피해주시길...]
여기서 귀신방언을 성령방언이라 고집한 사람 있는지요?
그간 귀신방언의 정의가 질문님은 "모든 방언"이어서 문제였던
것이고 성경적 근거없이 아무것에나 다 귀신 논리 적용을 고리타분을
넘어서 궤변적으로 적용시켜 여러사람 피곤했던 분이
질문님입니다.
1. 영언=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기도,찬미,축복)
의미있는 소리
영언=말씀이라 하면 말씀(The word),성경말씀(Holy Scriptures)
과 오해되어질 수 있음,
그동안 주사랑해용님이 랄라라 방언 언급은 했어도 질문님은
"모든 방언"또는 "오늘날의 방언"이라고만 하였지 "라라라" 방언이라
한정하여 라라라 방언은 귀신방언이라고 누차 얘기한 적 없었던
것으로 기억함. 질문님이 과거 글들을 이제와서 라라라 방언으로
수정하여 놓지 않는 한,
그리고 이번 방언 토론이전 방언토론에서 제가 이미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음도 참고하세요.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datas&command=body&no=2308&
[오늘날의 부흥집회에서 벌어지는 연금술적 방언현상, 고온고압을
거친 흑연으로 만들어진 공업용 인조 다이아몬드처럼 할렐루야나
라라라를 혀가 말리는 현상이 일어날때까지 반복하여 인위적으로
나타나는 방언은 하나님의 영이 남종과 여종에게 충만하게 부어져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오는 성령의 역사나 성경적인 은사
방언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방언은사를 특히 강조하시는 분들은
듣기 싫더라도 또 직면하고 싶지 않더라도 분명하게 직시하여야
성령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은사방언을 가장하고자 인위적으로
유도하고 추구하고 연습, 훈련하는 방식으로 미혹하는 사탄의
역사를 경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힌두교의 "데바바니(Devavani)명상 "훈련법과 오늘날
일부 은사집회에서 또는 일부 사람들이 방언하게
해 준다며 그 방법론을 가르치는 인위적인 방언훈련과
유사합니다. 그렇게 턱이 굳어지고 혀가 말리면서 나오는
방언현상은 신자가 아닌 불신자라도 할렐루야나 라라라
같은 단어들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저보고 그렇게 해서 방언해 보라고 하는 목사님도
계셨는데 시도해 보지 않았으나 시도해 본 사람들이 가능
하다고 하니 그것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런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나타나는 일명 혀말림 소리를 성령의
방언이라고 믿게 하고 추구하고 연습하게 하려는 것은 사탄의
미혹이겠으나 그런 방언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달꾹질 현상, 쥐(근육경련현상),위경련 현상처럼 신체 기능의 부조화
,불균형, 심리적인 이유에 의해 나타나는 일련의 신경성 반응처럼,
의미가 있는 소리를 내고자 하는 마음과 학습된 언어를 담당하는
뇌와 뇌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지는 혀 놀림의 조화와 균형이 일시적
흥분으로 깨어져서 발성을 담담하는 턱이 굳어지면서 혀가 무조건적
반사를 하듯 반응하는 발성 현상으로 보고자 하는 입장, 질문님처럼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식으로 영적원리를
적용해 보고자 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세상에서 제노글로시 현상을 신지학 ,인지학 용어인
아카식 레코드와 연결지어 해석하려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그런
혀말림 방언현상을 처음에는 어눌한데 자꾸 하다보면 능숙해져서
다양하게 할 수 있고 의지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
상상신학으로 해석해 보려는 입장도 있지요.모든 인간안에 아담,
하와로부터 유전된 언어코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내장된)
상태에서 일반적으로는 학습에 의해 형성된 언어코드만 활용할
수 있는데 특별한 원인을 계기로 그 무의식속에 있는 언어코드가
자극,재생,증폭되어 나타나는 현상,한번 그것이 인위적으로
이끌어내어지면 마치 자전거에서 균형을 잡는 감각이 일단 몸에
익혀졌을때처럼 그 발성감각도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
2. 행전과 고전의 방언 즉 그리스도의 제자(사도포함)들의 방언을
지방어로 한정할 성경적 근거 없음
3.라라라 방언=귀신말이다라는 성경적 근거 어디에?
젖먹이들이 옹알이 할때 라라라라라 하기도 하고 마마마 아바바바
하는데 그것도 라라라라 하니 그냥 귀신 말? 귀신들은 라라라 말만
할 줄 아는 것인지? 아니면 벙어리 된 귀신이 들면 라라라라만 한다는
학계보고라도 있는 것인지?
성경적인 방언 즉 성령의 은사로서 하게 된 방언이 아니다 선을
넘어서 귀신들려서 귀신말을 하는 것이라 주장하니 그 이유나 좀
교제 설명을 해주되 질문님이 부탁한 것처럼
[성령의 속성과 귀신의 속성을 상호 비교하여
납득할만한 분별법을 제시하시면 참고해보죠.
제발 하던말 똑같이 반복하지말고 막연하게 이제와서
there are 귀신방언 (라라라방언) and 성령방언
(라라라 아닌 방언) 이라는 고리타분한 결론은
피해주시길...]
아디오스 하니 결론 넘버 4번 이후의 반론이나
질문은 나중에 질문님이 다시 하이 하고 들어올때
하겠음^^
어쨌든 "모든 방언" 에서 "라라라 방언"으로
한정된 것만 해도 괄목할 만한 변화임^^
교제
2011-01-15 19:44
24.xxx.123
["알지 못하는 언어" 에 대해 성경은 항상 사탄적인것을 암시했고
곧 그런것을 쫓아간 신앙들은 다 멸망 당한다는 영적 진리를 설명한
것 뿐입니다. ]
->오늘날에도 방언은사가 있음을 인정하면 즉 현대방언에 성령의
은사방언이 있다고 믿으면 곧 바벨론우상을 믿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궤변을 보조하기 위해 제시된 상상신학의 소산중 하나인가요,
김기동씨가 이단으로 판단된 이유는 질문님처럼 상상신학을 절제하지
못하고 제한없이 발동시켜 다른 이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든 말든
혼자서 깨달은 영적 원리를 성경적 진리라고 우기는 것에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상상신학의 소산을 성경에 계시된 영적원리
,성경적 진리라 여기시니 하는 소리입니다.
말씀=성령이라는 공식을 세우고 성경에 근거나온 나온 원리 깨달은
진리라 하며 토마스님을 훈계하고자 하시는 질문님,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가지고 그런 원리를 깨닫게 하셨는지요
성경이 항상 암시했다고 하는데 그 암시했다 하는 구절들을 쭉 열거해
보세요. 과연 성령이 성경에 암시한 것인지 질문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착각한 것인지 살펴보도록 말입니다.
유대인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이방인의 우상문화에 물들어
이방신 우상을 섬기면 멸망하겠지만 언어와 문화의 상대적인 면을
고려하면 이방인에게는 유대인의 말이 곧 알지 못하는 언어,율법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문화가 곧 이방문화인 것입니다.
질문님식 논리라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유대문화를
수용하여 유대인이 지키는 율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쫓아간
이방인은 멸망한다는 영적 논리가 되는데 그것이 과연 성령께서
구약말씀을 신약에 인용하여 깨우치시는 바요 영적진리라는 것인지요?
성경말씀은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외국어는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언어일지라도 학습에 의해
배우면 아는 언어로 전환되는 것이고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통역자가
있으면 배우지 않아도 알아듣게 되는 식인데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성경이 항상 사탄적으로 암시했다니 하는 논리는 언어에 대한 상식조차
결여된 해석으로 보여집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이방문화(*이방인에게는 유대인의 문화)는
알지 못하는 언어로 전달되는 상태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니 들으려 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고 그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통역되어 알아들을 수 있어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이방문화든, 생명에
이르게 하는 복음이든 통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지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고 찬미하는 영적인 언어 ,은사적
언어인 방언이 비록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해도 알아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면 또 말하는 자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면 사람이 사람의 유전으로 금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고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의 유익까지
금하려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의 찬미와 기도를
금하려하는 귀신원리를 펴려고 하기 전에요.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방언열풍이 일것과 방언으로 성령이
나타남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열풍이 동시에 일 것을 아셨기에
성경에 미리 그 두가지 그릇된 흐름에 교회가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교훈을 고전 14장에 주셨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대방언을 분별하고 성경말씀으로 검증하고 거짓방언을 경계하려는
선안에서만 머물러야지 성경에도 언급된 바 없는 기준으로 사도시대와
그 이후시대의 방언을 나누어 "방언은사는 중지되었다, 고로
모든 방언은 성령이 준 것이 아닌 귀신방언이다" 라고 일반화하여
방언 말하는 것 자체를 아예 금하고자 하는 원리, 성경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길로 가지 말고 분별하며 질서있게 은사를 활용
하는 원리를 정립해 가시기 바랍니다.
[ 그러니 방언 체험도 없으면서 머리로만 성경을 해석할려고
하니 영적인 현상이 어디 분별이 되겠나요.]
-> 체험도 체험 나름이라고 현대 방언이 모두 귀신방언이라고
하시며 자신의 방언도 귀신방언이라 인정하시는 분의 귀신
방언 체험을 두고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논하는 자리에서
방언은사를 체험하였다 할 수 있겠는지요?
성령=말씀이라고 하시면서 체험에 치우쳐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주장을 펴는 것처럼 하시고선
갑자기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이해를 앞세우는 이유는 뭔지요?
질문 며늘님, 시어머니처럼 잔소리 많다고 질문님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두 아줌마들 때문에 자신의 귀신론 주장 다 피지 못했다
핑계하지 마시기를... 지금까지 여기저기 토론에서 개진해 온 것이
모두 귀신의 작용을 근거로한 질문님식 영적원리이고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서 또는 질문님이 변론에 지쳐서 ,시간이
없어서 중단하였다가 또 다시 반복하혔다가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이름아이콘 교제
2011-01-15 17:42
24.xxx.123
토론을 마감할때 마감하더라도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그러니
별똥별님께서는 제가 이러는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님 지투유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앞에 있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계시와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으니 성령=말씀이라는 공식을
세우고 긍정하는 두 분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방언에 대해서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성경말씀
그대로 받으셨으면 합니다.
질문님의 견해:[그 언어가 방언하고 연관되고 방언의 본질이
"본인이 알지 못하는 언어" 곧 사도 시대땐 "지방언어" 지금은
"하늘언어" 그런 연관성을 연결 못하시리라곤 생각이 안드는데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하면 짐승을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거듭남의 고백 (입술만으로가 아닌, 진정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롬 10: 9-10)함 없이 직분을 받은 자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비일비재 일어나는 탓에, 주님의 교회는 지금 큰 수난을 겪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저지르는 온갖 추악한 죄악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모두 전 세계의 성도들과 주님의 교회가 함께 뒤집어쓰게 된 오물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인가…. (말씀에 의지하여 바로 살아보려고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마저 무더기로 “개독교인”이란 소릴 듣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말이다. ㅠㅠ)
죽은 송장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고, 산 생명에서는 생명의 향기가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2:14-16절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산 생명이 아니다. (1요 5: 12)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주님의 영광을 실추시키는 자리에서 떠나고 나중에 주님의 얼굴을 만나 뵙기 원하면 먼저 내가 믿음에 서 있는가 자기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재점검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고후 13: 5) 성령과 성령의 사람을 알지 못하는 무지(ignorant)가 빚어내는 촌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현상으로 미혹하는 영이 활개를 치는 세상, 정신을 차리고 분별하지 않으면 내가 잠식당하게 된다. 짧은 지면에 모두 다 논하기는 어렵지만, 간단히나마 성령과 성령의 사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 새해에는 우리 다 함께,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보자는 슬로건이라도 내어걸고 싶은 심경으로 정리를 해 본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神이심을 믿는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한다
“성령”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성신” (루-아흐 코드쇼) 2회 사용되었다. (사 63: 10, 11) 신약에는 “성령”이란 말이 93회가 인용되었다. 구약에는 “루-아흐”가 단독으로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선한 신”(Spirit, 대문자로 표현)으로 번역되었다. (느 9:20, 30, 시 139:7, 슥 7:12) 신약에도 (프뉴마)가 단독으로 “성령, Spirit”으로 표현되지만, (마 4:1, 22: 43, 등 13회가 사용되며, 또는 ‘하나님의 성령’ (το Πνεύμα του Θεού)가 사용되고(마 12: 28, 고전 6: 11, 7: 40), ‘주의 성령’ (the Spirit of the Lord, το Πνεύμα του Κυρίου) (눅 4: 18 ), 또는 ‘예수의 성령’ (the Spirit of Jesus, το Πνεύμα του Ιησού)( 행 16: 7 )으로도 인용된다. 또 (바람)이라든가 ‘호흡’이라든가 공기의 진동을 뜻하는 것이 본래의 의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해당 되어지는 (생명), (영혼)의 뜻이 된다. (창 2:7, 출 35: 31, 욥 7: 11)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 주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삼위일체의 신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 원어 대사전 참조
성령의 사역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의 하시는 사역을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성령님을 어떤 마술의 영으로 착각할 수 있고, 신성을 버리고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을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이비 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성령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해주신다.(요 16: 8절), 성령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Lord)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고전 12: 3절), 성령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성령의 세례(침례)를 주신다. (고전 12:13절) 성령은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요 6: 63절), 성령은 신자들 안에 거하신다. (고전 6: 19절), 성령은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 롬 8: 16절) 성도의 일상 삶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성령은 지 정 의(知情意)를 온전히 갖추신 인격적인 신(神)이시다. 불신자들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고전 2: 12-14절) 섬기는 일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고전 12: 7-11절),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도 성령께서 친히 결정하신다.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 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벧전 4: 10, 고전 12: 7절)
성령의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
1.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곧 ‘외식(hypocrisy)’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조심하라” (눅 12: 1下)고 경고하신 것이다. ‘외식’, 그렇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외식’인 것이다. 외식이란 글자 그대로 안과 겉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외적인 현상은 오직 그 열매뿐이다. 그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 타인은 누구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성령님과 자기 자신은 알 것이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든지, 바리새인의 누룩(외식)으로 포장하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누룩이란, 확산되어 본질을 부패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기독교계 안에서 불거져 나오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목사들의 간음, 성폭행 문제나 재정비리 의혹, 세습 문제 등, 전 세계의 기독교계를 절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즐기다 그 덫에 치어 헤어나오지 못한 탓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고로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바리새인의 누룩을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 믿음의 상태를 비추어 살펴보아 바르게 분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깨달아졌으면 회개하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나 돌이켜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이다.
2.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거짓 은사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주 간단(simple)할 것 같은 issue건만 각처에서 뜨거운 감자로 달아오르고 있는 은사론, 신사도 운동, 은사중지론 등은 세기를 두고 신학자들 간의 논쟁이 치열했으나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결말이 나지 않고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고, 아전인수(我田引水), 천착지학(穿鑿之學),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자기의 사상이나 지식의 틀에 끼어 맞추려고 말씀을 끌어다 붙이기 때문이며, 성도들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은 목사님들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은사중단론 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극단적 신비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은 모두 아멘으로 받고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축자영감설’을 그대로 믿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방언도 다른 은사들처럼 교회와 개인의 건덕을 위해서 주시는 성령님의 선물로 믿어야 하고,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해야하되 영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모든 방언이 다 성령의 주시는 선물로서 온 것이 아닌, 사단의 장난질 방언도 있다는 것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을진대, 외국어로 들려지고 알아지는 방언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인간의 소리가 아닌, 영으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알아듣지 못할 방언도 있다는 것도 인정하자. 모든 방언이 각 지방 언어들로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면 영들을 다 믿지말고 분별하라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두었겠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면 관계로 간증을 넣을 수는 없지만, 나는 외국어로 방언하는 것과 같은 현상, 어릴 적 고아로 자라,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여 일자무식한 사람이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아, 영어 성경을 줄줄 읽을 수 있고 영어로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부인을 만난 적 있다. 또 방언을 한다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원망하며 밤새도록 저주하는 것도 들어본 적 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권면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7 ), 놀라운 것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는 자를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참 선지자도 아니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며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미혹의 길로 끌고 가려는 사단의 졸개들이다. 계속해서 다시 보자. “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고후 11: 14-15)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떤 독자님이 댓글로 남긴 말이 가슴에 와닿기에 여기 옮겨본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성경말씀을 인간적인 사고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함께 눈에 보이는 이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참.. 성경 말씀은 상당히 함축적, 암시적인 표현이 많은데...그것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추론한다는 것이 참 어불성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런데 기존의 정통 교회들도 그 방향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우려스럽기도 하구...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 안스럽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습 중에서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고 고쳐나가며 눈에 보이는 이적을 구하기보다 말씀에 드러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들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옳은 말씀이 아닌가, 성령의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깨달음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죄에게 굴복하지 아니한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죄 성이 남아 있어 죄의 유혹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을 받는다고 하여도, 죄가 그 사람을 주장할 수 없도록 주님의 영이 지키신다. 때문에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가슴과 머리, 말과 행위가 모두 함께 나간다. 거듭난 사람은 작은 죄를 지어도 성령의 탄식하시는 세미한 음성이 들려져 그 양심이 심히 괴롭다. 그러면 기도하게 되고, 성령의 도우심과 회개의 영으로 죄사함을 받고 돌이켜 구원함에 이르는 것이다. 안과 밖이 다른, 외식으로 포장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Holy Spirit)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요 5: 18절 말씀) 죄의 소원은 성령의 사람에게도 있으나 죄가 그를 주장하거나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죄를 이기고 승리한다. 이것이 성령의 법, 곧 생명의 법이다!
성령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
a)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시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새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새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새해에 우리는 극단적 신비주의나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물든데서 돌이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정욕, 이런 육신에 속한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 봐야 성령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요즘처럼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위상이 바닥을 친 시대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교회 등록하고 매주 교회 출석하는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보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으로서. 반드시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Holy Spirit, 삼위 일체의 영)으로 중생한(born again)사람, 성령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옳다. (요 3: 3-9절 참조)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이런 사람은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 생명의 신이 그 속에 내주해 계신, 거듭난 사람( born again Christian)이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성령의 사람은 생명의 열매가 그 생활 속에서 맺히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별첨1:
지난 번, 필자가 정목사님의 글 아래 남긴 댓글인데, 칼럼글이 너무 길어져서 이곳에 별첨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지.정.의(知情意)를 온전히 구비하신 인격적 神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1. 성령은 知적인 神이시다.
인간은 아무리 유능해도 그 知적 능력에 한계가 있으나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知적 신(神)이시며, 이는 성령의 지혜와 통달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성령 앞에서 숨기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a)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신(神)이시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사 11: 2)
b)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알고 계신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 고전 2:10)
c) 우리와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계신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 고전 2: 11)
d)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세계를 가르쳐 알게 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 13)
2. 성령은 감정을 지니고 계신다.
성령의 인격적 속성에는 감정적 속성이 있으므로 기뻐하시고, 근심하시고, 사랑하시며, 탄식하기도 하신다.
a) 성령은 근심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엡 4: 3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으니…” (사 63: 10)
b) 성령 하나님은 탄식하기도 하신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니라” ( 롬 8: 26)
c) 성령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신다.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 롬 15: 30)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기뻐하시지만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 근심하시며, 탄식하신다. 성도는 결코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
3. 성령은 意지적 속성을 지니고 계신다.
성령은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갖추시고 사역하신다.
a) 성령은 그 뜻(의지)대로 은사를 주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 고전 12:11)
b) 성령은 명령하고, 지시하신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 행 13: 2),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 행 8: 29)
c) 성령은 성도들을 인도하신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 14)
d)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자라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전 12:3) )
별첨 2:
이글은, 저의 칼럼글에 보충 설명이라고 보시면 틀림이 없겠습니다. 본글의 지면상 이곳에 남깁니다.
저는 오래 전, "방언은 모든 은사의 입문이며, 성령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방언을 할 수 있다고."고 피력하시던 k 목사님과 방언 문제를 두고 심한 마찰을 빚었고, 그것 때문에 주님께, 오래도록 기도해 오던 중, 어느 날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응답은, 다음 두 가지 단어였습니다. “신생아” 그리고 “ability”란 단어였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주님께서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다 성도가 아니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육이 아니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이것을 신학상 술어로는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우리가 거듭난 성도인가? 아니면, 성전 마당만 밟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하고, 우리가 거듭나게된 것이 무엇으로 되었는가?하는 것을 알아야하며, 우리 속에 내주(in dwelling)하고 계신 성령님이 어떤 분인가?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는 주님이 께닫게 해 주신 ‘신생아’ 와 ‘ability’를 생각해 보십시다.
아이가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는 우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태어날 때, 이미 언어를 배울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ability’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동안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즉, 우리 마음속에 있는 “unrealized ability" 를 점차 개발해 나가는 것 뿐이고요. 그러나 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은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를 않고 태어나기에, 다 성장한 후가 아니라,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인간처럼 아름다운 언어를 습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동물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realized or unrealized ability)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화설’의 허구도 알게 됨)
물론, 이 말 속에는 반드시 거듭난 성도여야만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져야만 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여도 그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in dwelling)이 안 계시다면, 성령님의 속성 중 하나인 방언(영언)을 할 수 있는 ability가 처음부터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 속에 거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방언은 누구의 선물입니까? 예, 성령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한 번 알아듣기 쉽게 말씀드리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 난 사람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속에는 반드시 영적 언어를 배울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unrealized ability’ 를 가지고 태어 난 영적 신생아이입니다! 왜요? 만약 인간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이 성령님께로부터라면,(영계에는 천사의 방언도 있고, 사탄의 흉내 방언도 있기에,) 그 방언의 주체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성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예수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으로 보지를 않고(육안으로 알 수가 없기에),'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성도’라는 시각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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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달윤
2011-01-21 02:42
218.xxx.174
사모님 놀랍게 박식 하십니다.
사모님의 학식, 신학, 신앙, 사명감 너무도 고차원이시고 귀한 하나님의 딸로
귀하게 쓰임받는 주님의 종임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교회에서 주일마다 설교하는 목사만 큰 종이아니고 이 아멘넷을 통하여 수천 수만명이 읽고 은혜받게하는 사모님은 더 큰 종임을 인정합니다.
귀하신 사모님 감사합니다.
Junyoungkim
2011-01-18 01:15
64.xxx.27
I like the opinion of 별똥별님, and also I agree with 교제님's counterargument, they're outstanding & Biblical.
김오동
2011-01-08 02:32
218.xxx.139
별똥별님!
성령론에 관한 논문수준이군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자라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전 12:3)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시는 이가 성령님이시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순서는 아버지-아들-성령이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그 역순, 성령-아들-아버지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는 "오르락 내리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소통이 원만할 때 성령충만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관하여 어찌 우리가 다 설명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관하여 아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절실하지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하리로다."
필요하고 유익한 글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thomas
2011-01-08 23:26
72.xxx.2
별똥별 님,
성령충만을 지속하려면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매년 그래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항상 년말이 되면 절망적인 자신을 발견합니다. 올해는 좀 나으려나...에고..
칼빈을 루터와 비교하여 어떤 신학자가 평하기를, 칼빈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사람이기 전에 본질적인 합일과 지엽적인 차이의 경중을 이해하여 실천 가능한 민주적 대안을 구현한 주님의 종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멘넷에서 여러 논객들의 다양한 의견을 포용하시면서도 문제의 경중을 가려 지혜롭게 신앙의 공동체를 가꾸어 가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별똥별님께 경의를 표하면서, 새해에도 계획하시는 일 가운데 귀한 성령의 열매가 알차게 익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비둘기
2011-01-08 21:21
66.xxx.79
새해들어 첫번째 사모님의 칼럼으로
주님으로 부터 받아 생명수로 전하는 곳에
성령의 물이 되어 흐르고 흘러흘러
거듭난 사람들이 마시고
생명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주님으로 부터 명령받는 파수꾼의 사명
사탄의 공격과 도전, 그 실체들을 바로 분별하여
세상속으로 흘러가게 하여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혼탁해져가는 교회,사회,성도들을 향해
끊임없이 미혹하고 있는 그 흐름에 대하여
경고하여 깨닫게 하시는 수고
이 시대에 사모님 같은 파수꾼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영, 삼위일체 영께서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시길 바라며, 복스런 깨달음으로 나누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holykang
2011-01-08 12:25
24.xxx.10
역시 별사모님글은 향상은혜스럽고 좋은글입니다
솔직히 방언에대해서 여러가지이야기가 있고 토론들이 뜨겁지만
방언은 신앙생활에있어서 그렇게 중요한겄은 아니지요
방언을 주시는 성령하나님에게 이끌리는 삶이 중요한거지.
우리의 주인님이 되시는 그분의 삶을 닮는게 중요한거지요
그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향기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내는게 진정으로 성도들에게는 중요한거라 믿읍니다.
제가 하나님의 성회에 소속되있어서 그러는대
저희에 대해 잘모르시는분들은 상상하기를 저희가 항상 신비한겄만 추구하고 은사이야기만하고 방언만 중요시하는줄 아는대
저희교회는 오순절교회지만 목사님께서 예배도중에 방언에 대한 설교을 한적이 기억이 않날정도로 방언에 초점을 맞추는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함니다. 항상 관심의 초점이 예수님의 관심에 두고 설교와 예배을 드림니다. 기복신앙역시 저희교회에서는 강조한적이없읍니다.
오히려 희생과 순종을 강조함니다.
방문하신 목사님들께서 강조하신 기억은 나도
저희 담임목사님께서 물질적 축복과 방언을 주제로 말씀하신 기억은 없읍니다
우리의 관심은 항상 예수님의 관심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것들 그리고 그분에게 pleasure을 주는일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는게 성도로서의 의무라고 믿고 살아왔읍니다
저희 자랑만 한겄같아 조금 거시기 함니다만.
항상 발란스가 있는 글을 추구하시는 사모님의 글 감사하고
사모님의 글이 아맨냇에 뜨면 애독하고 은혜받고 있읍니다
새해에는 뜨겁게 예수님과 그분이 피흘려 사랑하신 교회을 사랑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함니다
마란아타
2011-01-08 09:27
98.xxx.69
별사모님,
사탄의 세력들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그 어느때 보다도 더 극악스럽게 주님의 교회를 난도질하는 때에 때를 맞춰 참으로 귀한 말씀을 올리셨군요.
뜨거운 여름 ㅤㅂㅕㅊ에 영글어 가는 포도송이 같이 쌓여가는 분노가 종종뵙는 별사모님의 말씀으로 삭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말씀에 바로 서지못하고 비칠거리는 나의 못난 모습을 깊은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소리를 듣고 위로를 받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란 말씀만큼은 죽을지언정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야 할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영적 어지러운 때를 살아가는 저희들은 영육의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성령님께만 맡기고 의지 해야 할때에 성령님의관한 폭넓은 말씀을 주시니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수고에 수고를 더 하시는 별사모님,
님의 해박하신 지식의 말씀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계속 별사모님의 살아있는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주님만이 주실수 있는 사랑과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체르니
2011-01-08 01:42
112.xxx.177
항상 좋은 글을 올려주시는 별사모님 감사합니다.
요사이 세상에 떠오르는 다양한 메시지들을 보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말씀이 있어서 올려보아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장 7,8절)"
성경말씀은 처음에는 딱딱한 느낌같지만 읽을 때마다 또다른 감동을 주니
어찌 딱딱한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말랑말랑하고 5가지 맛을 낸다는 오미자와 같이 상큼한 맛이 있는 것 같아요.. (^-^)
교제
2011-01-08 03:06
24.xxx.199
복음을 다른 것과 혼합하지 않고 각색하지 않고 순전하게
성실하게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권위로 의의 교훈을
주는 글을 대하니 너무 좋습니다.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오네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 봐야 성령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명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교훈만 전하며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도록 이끄는 설교만큼
심령이 반기는 설교가 따로 없기에 평생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안의 생명과 능력과 은혜를 받아 사는
성령의 사람인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 주의하고 분별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성령충만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 수 있는지 참으로
바르게 명료하게 절제되게 전해 주시는 유익한 글, 새해 첫
칼럼글로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글 나오면 일착으로 댓글 달려고 했는데 이미 김성훈님
체르니님,김오동 목사님께서 다녀 가셨네요^^.
체르니
안녕하세요. 교제님^^
제가 일등으로 출석체크하려했는데..저보다 별사모님의 글을 사모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순위에서 밀렸다는... -_+a;;
별똥별
2011-01-08 17:05
24.xxx.14
《Re》g2u 님 ,
쪽글로는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지면 관계상 댓글로 남김을 양해 바랍니다. ^^
저는 언제나 g2u 형제님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인데요, 다음,
(방언은 우리 모두가 사모하여야 할 영언이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위임하신 새 방언으로 성령에 충만한 크리스찬은 모두가 하여야 할 새 방언인가? ) -g2u
위의 문구는 잘못 이해하면 다른 분들께 오해를 남길 소지가 있기에, 다시 설명을 드립니다. 방언은 성령님의 선물로서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로 보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모한다고 모든 사람에게 다 방언을 주시지는 않는다고 보고 있고요, 성령 충만한 성도라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방언을 해야 한다거나, 방언은 은사의 입문이라든지...그렇게 보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다른 어느 목사님과 심각하게 대립이 된 적도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그때 주님께서 특별하게 깨우쳐 주신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을 위의 본글에 별첨2로 첨부해 드렸습니다. 참고를 바랍니다.)
개인 교회이건, 공동체 교회이건, 방언이 필요하다고 주님께서 판단하시면 방언도 주실 것이고 필요치 않으면 주시지 않는다고 보고 있어요. 방언 은사의 주체도 성령 하나님이시고, 모든 은사의 주권은 온전히 성령 하나님께만 있음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가 다 방언 은사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 글 참조(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도 성령께서 친히 결정하신다.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 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벧전 4: 10, 고전 12: 7절)
단지, 다른 사람이 방언을 어떤 방언으로 (외국어이든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언이든지) 말하던, 그 방언의 종류에 관해서 제한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구요. 그 방언이 성령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단의 흉내 방언인지, 반드시 분별의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구요. 모든 방언이 다 귀신으로부터...라는 견해도 지지할 수 없구요, 모든 방언이 다 성령님의 선물이다...하는 것도 성경적이질 않다는 것이지요. ㅎㅎㅎ
성령 충만한 성도님들 중에는,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해도, 다른 은사를 받은 분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본 바른 방언관이라고 믿고 있어요.
행여 저의 부족한 글솜씨로 인해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의문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을 남겨주시면 고맙겠어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으로 답변을 해 드릴 것이고,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은, 우리 독자님들 중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고, 또 평신도 분들 중에도 저보다 훨씬 더 실력있는 분들이 많으니까, 그분들께 도움도 요청하고요....우리 함께 공부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별똥별 옥성호 씨의 책을 단 한 번도 읽어볼 기회가 없어서 답변을 하기가 좀 그렇구요....제가 믿을 수 있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님들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이런 일에 사용되는...하늘나라에 쌓이는 귀한 시간이 아닐까요? 주님 안에서 귀한 성도의 교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1/8 18:58
24.xxx.14
교제
오해하기가 불가능하게, 오히려 오해를 풀 수
있게 하는 유능한 표현능력이요, 글 솜씨입니다!
성경에 근거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
누지문서
2011-01-08 06:01
71.xxx.226
맞습니다 별똥별님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7 ), "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영적인 욕심을 부추키는 자들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고 기도로 새해를 맞이하렵니다.
긴글의 전체 부분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깨닫는 힘있고 좋은 글입니다.
역시 별똥별님입니다.
교제
2011-01-08 19:43
24.xxx.199
사모님께서 성령에 대해서 서로 함께 배우는 장을 만들기를
제안하시니 이번 기회에 성령 하나님에 대한 각자의 지식을
칼럼장이 허용하는 데까지 한번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부,성자론에 대해서는 정통교단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입장이나 성령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서인지 교단간에
계속 논란이 있어왔고 아멘넷에서도 방언은사,중생 관련하여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첨예하게 대립된
적이 있지만 이 칼럼장에서는 어느 교단의 성령론이 더
성경적인가 주장하기 위한 변론차원이 아니라
그냥 자유롭게 성령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하고 개인적인 견해를
나누어 보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성경이 전혀 지지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에서 나온 펌글이나 견해이면
곤란하겠으니 댓글을 올리시는 분들이 그점은 스스로 고려해
주셔야겠지요.
저도 따지고 주장하는 태도는 이번에 지양하고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지식이나마 성령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충만,세례 관련하여
언급하겠습니다.
성령충만: 충만의 원어는 채우고 완성하다에서 나온 플레로마,성령으로
채워짐이 충만한 상태,가득 부어져 성령으로 완전 포화된 상태,
즉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성과 육을 가진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성령의
뜻으로 가득 채우시고 육까지 온전히 성령의 통제하에
두시는 상태
자의가 아니라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방언,예언)
보게 하심을 따라 보고 (환상,이상) 듣게 하심을 따라 듣고
행하게 하심을 따라 행하는 모든 것은 성령충만한 상태(성경:
filled with the Holy Spirit)에서 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가장한 악령의 역사가 있음이 성경에
경고되었고 분별하라 하였으니 모든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무분별하게 수용하면 안되고 영은 반드시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고 미혹사역은 필히 경계하여야 합니다.
성령침례: 성령으로 받는 침례, 침례의 주체자는 예수 그리스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성령침례는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죄와 허물가운데 죽은 영을
중생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새겨지게
(성령내주)하는 하나님께서 직접 베푸시는 예식이고 성령침례가
베풀어지는 순간은 성령이 충만히 부어지는 순간, 성령충만한
상태입니다. (에스겔 36:25-27/겔 37:14/딛 3:5-6)
성령침례는 죄인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자녀 삼아 성령으로 그 심령에 인치시는,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예식이기 때문에 단 한번으로 온전하게
완성되는 것이고 성령침례는 성도가 받는 첫번째 성령충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뜻에 따라 성령침례받은 자들에게 거듭 반복
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베드로 예: 행 2:4/행 4:8/행4:31)
성령침례 받은 자들이 항상 성령충만한 상태인 것은 아님의 예를
성령충만하여 사역하였던 베드로와 바나바도 때로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못하고 외식한 경우가
있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갈 2장)(바울의 경우 롬7참조)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던 바울을 통해 죄가 있는 육신의 장막을
입고 사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자랑하고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죄의 소원)을 다스리고 날마다
죽으며 복음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역사하는 성령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의 삶이 성령충만한 자의 삶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행전 1: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사도들도 오순절 성령강림때까지는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또 그 약속하신 성령침례는 그 말씀을
받은 때로부터 10일후에 받은 행 2:1-4의 성령충만을 받는 일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성령침례=최초의 성령충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 표징과 그 성령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리라는 표징을 오순절 성령침례를 받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복음의 내용이 담긴
방언을 통해 각 나라 말로 전해진 것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마리아인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으로 인도하시고
믿게 하시는 성령을 부어주심(성령침례)으로 죄사함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만민에게 베푸시고 이방인도 그리스도의 지체,
하나님의 자녀,백성 삼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령침례의 표적을 방언으로
주셨구요( 행 8: 17/행 10:45-46/행 11:14-18)
성령침례받은 상태(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이 항상 내주하는 상태)와
히브리서 6:4-6절에서 언급된 상태는 구분이 되어집니다. 그 차이를
신학적으로 아는 것은 성령론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지요.
1.사울왕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6,10>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16:14>
왕으로서 범죄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사울왕과 솔로몬왕이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다른 은총을 받았는지는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리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삼하 7:14-15>
2. 가룟유다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불러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은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눅 9:1-2>
3. 마 7:15-23절에서 언급된 자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이처럼
성령에 참예하고 신령한 것을 맛 보았다고 성령침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그리스도의 지체라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
(고전 13:5절 참조)
교제 글자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어떤 부분은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게 되었는데 조금씩 보충하렵니다.
성령충만에 대해 참고할 주석 내용
[바울의 경우 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충만에 대해 꼭
한 번만(엡5:18)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성령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른 바 성령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롬8장 에서도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특이한 현상이라 할수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인도나 지배(롬8 : 5,9,11,14
참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인도나 지배를 받는상태를 성령의 충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1/8 20:21
24.xxx.199
교제 앞 글에 이어서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성령세례를 통해서, 또
성령세례를 통해 이미 내주하신 성령(롬 8:9 ,
고전12: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심령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으로 성령이 채워지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제
2011-01-16 03:34
24.xxx.123
`별똥별` 님이 선택한 글 입니다.
질문님,
질문님이 그간 편 논리,주장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이번 결론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본인은 쉽게 깨닫지 못하겠지요, 그저 자신이 귀신의 영적원리에
대해서 더 설명해야겠다느니 또는 자신의 글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오해하는 것으로 넘기시겠지요.
[모든 방언은 귀신방언이다]가 지금까지 질문님이 누차 주장했던
바입니다. [라라라 방언은 귀신방언이다]가 아니라요
"모든 방언"이라는 표현에는 어떤 방언도 ,그 누구의 방언도 예외가
있을 수 없기에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질문님께 그간
여러 사람이 지적하였던 바입니다. 질문님이 정상적으로 받으셨다고
주장하시는 방언도 정상적으로 받았는지 비정상적으로 받았는지에
(그것은 무슨 기준?) 상관없이 다 포함되기에 질문님의 논리를
질문님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적용시켜 질문님은 성령방언이 아니라
귀신방언을 체험했다고 한 것입니다.
질문님의 이전 주장에 의하면 옥성호님의 방언체험도 귀신체험이
되는데 지투유님이나 다른 분들의 방언체험은 귀신체험이라 직접
말해왔으면서 제가 질문님의 논리를 적용하면 세분 방언체험 역시
귀신체험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니 옥성호님이 황당해 하실 것이라는
황당논리는 어찜인지요?
그간 다른 사람의 방언을 모든 방언에 포함시켜 귀신방언이라 하는
것에는 걸림이 없어 하면서도 자신의 방언체험을 귀신방언체험이라
하면 은근하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시더니 이제는 모든 방언이라
하는 선을 고수하는 대신 라라라 방언으로 한정하는 변화를
보이시네요.
[그리고 꾸역꾸역 귀신 방언을 성령방언이라 고집하시면 성령의
속성과 귀신의 속성을 상호 비교하여 납득할만한 분별법을 제시하시면
참고해보죠. 제발 하던말 똑같이 반복하지말고 막연하게" there are
귀신방언 and 성령방언, therefore we speak 성령방언 and some others
speak 귀신방언" 이런 고리타분한 결론은 피해주시길...]
여기서 귀신방언을 성령방언이라 고집한 사람 있는지요?
그간 귀신방언의 정의가 질문님은 "모든 방언"이어서 문제였던
것이고 성경적 근거없이 아무것에나 다 귀신 논리 적용을 고리타분을
넘어서 궤변적으로 적용시켜 여러사람 피곤했던 분이
질문님입니다.
1. 영언=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기도,찬미,축복)
의미있는 소리
영언=말씀이라 하면 말씀(The word),성경말씀(Holy Scriptures)
과 오해되어질 수 있음,
그동안 주사랑해용님이 랄라라 방언 언급은 했어도 질문님은
"모든 방언"또는 "오늘날의 방언"이라고만 하였지 "라라라" 방언이라
한정하여 라라라 방언은 귀신방언이라고 누차 얘기한 적 없었던
것으로 기억함. 질문님이 과거 글들을 이제와서 라라라 방언으로
수정하여 놓지 않는 한,
그리고 이번 방언 토론이전 방언토론에서 제가 이미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음도 참고하세요.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datas&command=body&no=2308&
[오늘날의 부흥집회에서 벌어지는 연금술적 방언현상, 고온고압을
거친 흑연으로 만들어진 공업용 인조 다이아몬드처럼 할렐루야나
라라라를 혀가 말리는 현상이 일어날때까지 반복하여 인위적으로
나타나는 방언은 하나님의 영이 남종과 여종에게 충만하게 부어져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오는 성령의 역사나 성경적인 은사
방언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방언은사를 특히 강조하시는 분들은
듣기 싫더라도 또 직면하고 싶지 않더라도 분명하게 직시하여야
성령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은사방언을 가장하고자 인위적으로
유도하고 추구하고 연습, 훈련하는 방식으로 미혹하는 사탄의
역사를 경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힌두교의 "데바바니(Devavani)명상 "훈련법과 오늘날
일부 은사집회에서 또는 일부 사람들이 방언하게
해 준다며 그 방법론을 가르치는 인위적인 방언훈련과
유사합니다. 그렇게 턱이 굳어지고 혀가 말리면서 나오는
방언현상은 신자가 아닌 불신자라도 할렐루야나 라라라
같은 단어들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저보고 그렇게 해서 방언해 보라고 하는 목사님도
계셨는데 시도해 보지 않았으나 시도해 본 사람들이 가능
하다고 하니 그것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런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나타나는 일명 혀말림 소리를 성령의
방언이라고 믿게 하고 추구하고 연습하게 하려는 것은 사탄의
미혹이겠으나 그런 방언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달꾹질 현상, 쥐(근육경련현상),위경련 현상처럼 신체 기능의 부조화
,불균형, 심리적인 이유에 의해 나타나는 일련의 신경성 반응처럼,
의미가 있는 소리를 내고자 하는 마음과 학습된 언어를 담당하는
뇌와 뇌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지는 혀 놀림의 조화와 균형이 일시적
흥분으로 깨어져서 발성을 담담하는 턱이 굳어지면서 혀가 무조건적
반사를 하듯 반응하는 발성 현상으로 보고자 하는 입장, 질문님처럼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식으로 영적원리를
적용해 보고자 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세상에서 제노글로시 현상을 신지학 ,인지학 용어인
아카식 레코드와 연결지어 해석하려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그런
혀말림 방언현상을 처음에는 어눌한데 자꾸 하다보면 능숙해져서
다양하게 할 수 있고 의지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
상상신학으로 해석해 보려는 입장도 있지요.모든 인간안에 아담,
하와로부터 유전된 언어코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내장된)
상태에서 일반적으로는 학습에 의해 형성된 언어코드만 활용할
수 있는데 특별한 원인을 계기로 그 무의식속에 있는 언어코드가
자극,재생,증폭되어 나타나는 현상,한번 그것이 인위적으로
이끌어내어지면 마치 자전거에서 균형을 잡는 감각이 일단 몸에
익혀졌을때처럼 그 발성감각도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
2. 행전과 고전의 방언 즉 그리스도의 제자(사도포함)들의 방언을
지방어로 한정할 성경적 근거 없음
3.라라라 방언=귀신말이다라는 성경적 근거 어디에?
젖먹이들이 옹알이 할때 라라라라라 하기도 하고 마마마 아바바바
하는데 그것도 라라라라 하니 그냥 귀신 말? 귀신들은 라라라 말만
할 줄 아는 것인지? 아니면 벙어리 된 귀신이 들면 라라라라만 한다는
학계보고라도 있는 것인지?
성경적인 방언 즉 성령의 은사로서 하게 된 방언이 아니다 선을
넘어서 귀신들려서 귀신말을 하는 것이라 주장하니 그 이유나 좀
교제 설명을 해주되 질문님이 부탁한 것처럼
[성령의 속성과 귀신의 속성을 상호 비교하여
납득할만한 분별법을 제시하시면 참고해보죠.
제발 하던말 똑같이 반복하지말고 막연하게 이제와서
there are 귀신방언 (라라라방언) and 성령방언
(라라라 아닌 방언) 이라는 고리타분한 결론은
피해주시길...]
아디오스 하니 결론 넘버 4번 이후의 반론이나
질문은 나중에 질문님이 다시 하이 하고 들어올때
하겠음^^
어쨌든 "모든 방언" 에서 "라라라 방언"으로
한정된 것만 해도 괄목할 만한 변화임^^
교제
2011-01-15 19:44
24.xxx.123
["알지 못하는 언어" 에 대해 성경은 항상 사탄적인것을 암시했고
곧 그런것을 쫓아간 신앙들은 다 멸망 당한다는 영적 진리를 설명한
것 뿐입니다. ]
->오늘날에도 방언은사가 있음을 인정하면 즉 현대방언에 성령의
은사방언이 있다고 믿으면 곧 바벨론우상을 믿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궤변을 보조하기 위해 제시된 상상신학의 소산중 하나인가요,
김기동씨가 이단으로 판단된 이유는 질문님처럼 상상신학을 절제하지
못하고 제한없이 발동시켜 다른 이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든 말든
혼자서 깨달은 영적 원리를 성경적 진리라고 우기는 것에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상상신학의 소산을 성경에 계시된 영적원리
,성경적 진리라 여기시니 하는 소리입니다.
말씀=성령이라는 공식을 세우고 성경에 근거나온 나온 원리 깨달은
진리라 하며 토마스님을 훈계하고자 하시는 질문님,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가지고 그런 원리를 깨닫게 하셨는지요
성경이 항상 암시했다고 하는데 그 암시했다 하는 구절들을 쭉 열거해
보세요. 과연 성령이 성경에 암시한 것인지 질문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착각한 것인지 살펴보도록 말입니다.
유대인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이방인의 우상문화에 물들어
이방신 우상을 섬기면 멸망하겠지만 언어와 문화의 상대적인 면을
고려하면 이방인에게는 유대인의 말이 곧 알지 못하는 언어,율법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문화가 곧 이방문화인 것입니다.
질문님식 논리라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유대문화를
수용하여 유대인이 지키는 율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쫓아간
이방인은 멸망한다는 영적 논리가 되는데 그것이 과연 성령께서
구약말씀을 신약에 인용하여 깨우치시는 바요 영적진리라는 것인지요?
성경말씀은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외국어는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언어일지라도 학습에 의해
배우면 아는 언어로 전환되는 것이고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통역자가
있으면 배우지 않아도 알아듣게 되는 식인데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성경이 항상 사탄적으로 암시했다니 하는 논리는 언어에 대한 상식조차
결여된 해석으로 보여집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이방문화(*이방인에게는 유대인의 문화)는
알지 못하는 언어로 전달되는 상태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니 들으려 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고 그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통역되어 알아들을 수 있어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이방문화든, 생명에
이르게 하는 복음이든 통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지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고 찬미하는 영적인 언어 ,은사적
언어인 방언이 비록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해도 알아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면 또 말하는 자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면 사람이 사람의 유전으로 금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고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의 유익까지
금하려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의 찬미와 기도를
금하려하는 귀신원리를 펴려고 하기 전에요.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방언열풍이 일것과 방언으로 성령이
나타남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열풍이 동시에 일 것을 아셨기에
성경에 미리 그 두가지 그릇된 흐름에 교회가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교훈을 고전 14장에 주셨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대방언을 분별하고 성경말씀으로 검증하고 거짓방언을 경계하려는
선안에서만 머물러야지 성경에도 언급된 바 없는 기준으로 사도시대와
그 이후시대의 방언을 나누어 "방언은사는 중지되었다, 고로
모든 방언은 성령이 준 것이 아닌 귀신방언이다" 라고 일반화하여
방언 말하는 것 자체를 아예 금하고자 하는 원리, 성경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길로 가지 말고 분별하며 질서있게 은사를 활용
하는 원리를 정립해 가시기 바랍니다.
[ 그러니 방언 체험도 없으면서 머리로만 성경을 해석할려고
하니 영적인 현상이 어디 분별이 되겠나요.]
-> 체험도 체험 나름이라고 현대 방언이 모두 귀신방언이라고
하시며 자신의 방언도 귀신방언이라 인정하시는 분의 귀신
방언 체험을 두고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논하는 자리에서
방언은사를 체험하였다 할 수 있겠는지요?
성령=말씀이라고 하시면서 체험에 치우쳐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주장을 펴는 것처럼 하시고선
갑자기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이해를 앞세우는 이유는 뭔지요?
질문 며늘님, 시어머니처럼 잔소리 많다고 질문님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두 아줌마들 때문에 자신의 귀신론 주장 다 피지 못했다
핑계하지 마시기를... 지금까지 여기저기 토론에서 개진해 온 것이
모두 귀신의 작용을 근거로한 질문님식 영적원리이고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서 또는 질문님이 변론에 지쳐서 ,시간이
없어서 중단하였다가 또 다시 반복하혔다가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이름아이콘 교제
2011-01-15 17:42
24.xxx.123
토론을 마감할때 마감하더라도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그러니
별똥별님께서는 제가 이러는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님 지투유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앞에 있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계시와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으니 성령=말씀이라는 공식을
세우고 긍정하는 두 분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방언에 대해서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성경말씀
그대로 받으셨으면 합니다.
질문님의 견해:[그 언어가 방언하고 연관되고 방언의 본질이
"본인이 알지 못하는 언어" 곧 사도 시대땐 "지방언어" 지금은
"하늘언어" 그런 연관성을 연결 못하시리라곤 생각이 안드는데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하면 짐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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