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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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ㆍ2010-11-2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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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쟁반같이 둥그런 보름달이 샛노란 빛을 발하여 더욱 청승스런 기운을 뿜어내는 늦가을 밤, 갈바람 소리 스산해서인가 밤이 깊어가건만 어인 일인지 통 잠을 이룰 수 없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느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뒤척이고 있으려니까, 새까만 밤하늘의 별들처럼 두 눈은 점점 더 초롱거리고 머리는 더욱 맑아진다. 이런 때는 차라리 귀뚜라미의 합창소리나 들으며, 성삼문의 詩라도 한 편 읊어보리라, 창문을 드르륵 열고 쏟아져 내리는 달빛 속에 베토벤의 교향곡만큼이나 가슴 설레일 귀뚜라미들의 합창 소리를 기대하며 귀를 쫑긋 세워보지만, 귀뚜라미 소리는커녕, 개구리 한 마리 우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뿔싸,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시골 고향 집에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심의 밤, 하늘은 고향 하늘이고 달빛도 그 달빛이건만 그토록 청아하던 귀뚜라미의 노랫소리는 간곳없고, 여태껏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객들이 무섭게 밟아대는 자동차 엔진의 시끄러운 소리만 정적을 깨트리고 들려오는 삭막한 현실, 갑자기 으스스 한기가 느껴진다.
이기적 발로, 육신의 편리만을 위해, 온갖 욕심을 따라,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린 인간이 순수 자연의 소리를 그리워한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은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삶의 질을 높여줄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변질시켜 버린 인간에게 자연은 또 어떤 재앙으로 보복을 가할는지, 파괴, 변질, 폭동, 이런 무서운 단어들이 이 밤에 홀로 깨어 있는 나를 더욱 울적하게 만든다.
변질한 생태계, 엘니뇨 현상, 태풍과 지진, 이 모든 것이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것이 어찌 자연계에만 국한된 것일까? 어느 분야이건 변질된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편리와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켜나가야 할 질서도 무너뜨리고 갖추어야 할 예의범절도 한 순간에 짓밟아 버리는 험한 세상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진리가 길거리에 버려지는 세대에 살고 있다.’라고… 매 순간마다 그 말을 절감케 하는 현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최근, 암담한 교계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우리 게시판에는, 주의를 요망하기에 충분한 호소문이 하나 올라와 있다. 내용인즉, 어느 교회 담임 목사가, 성경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잣대(?)에 비추어 잘못된 성도들을 치리 하기 위해 개 교회 종교재판을 열었다는 충격적인 호소문이다. 뿐만아니라, 법정 효과(?)를 높이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동원, 교회 문을 닫아걸고, 그들을 가두었다는 말도 있다.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가슴이 아프다. 읽는 내내 분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 무슨 회괴한 일이란 말인가?
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system)가 문제인가, 신앙인격이 문제인가
과연 그들, 자칭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기존 교회의 시스템(system)이 갈아엎어 버려야 할 만큼 썩고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결코 그렇게 보지를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현 개신교계에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 문제가, 교리적으로나 시스템(system)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기보다는, 그 안에 몸담고 있는 개인 신앙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선교사로 헌신된 남편 목사님과 함께, 아주 젊은 날부터, 이곳저곳 여러 국가를 다니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만나본 사람들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 과학자, 교수들, 정치인들, 사업가, 농사꾼, 학생들, 혹은 평민들 등등…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예수님에 관한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중 예수님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던지, 믿지 않는 사람이던지,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들 중 상당수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싫고, 그래서 교회 나가기조차 싫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종합해 보면, 한 마디로, 변질한 성도들의 삶이 역겹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이타적인데, 예수를 따른다는 ‘예수 따르미’들의 삶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란 것이다. 입은 아주 믿음이 좋은 신앙인인데, 말과 행동은 다르다는 것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따로 국밥의 신앙,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변질한 신앙인의 형태, 가라지 신앙인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배척받아 마땅할 종교적 행위자라고 규정짓고 탄핵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포기했는가? 어쩌자는 것인가? 가장 많이 예수님을 닮아야 할 오늘날 교계 지도자들은 밥그릇 싸움이나 한다는 지적을 받고, 성추행, 간음, 횡령, 폭행, 사기 등등…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도 당당하다. 정말 기막히다. 그 옛날 주님께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 책망받던 과거 바리새인이 밟고 가던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머리로만 알았을 뿐, 행동과 실천 신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적인 우월감이었다. 그들은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변질’해 버린 것이다 고로, 현대 기독교가 배척을 받는 것은 분명, 제도적, 시스템적 문제가 결코 아니란 것이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성도는 변화를 받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 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데서 오는 것이다! 변화는 새로워지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지도자가 되었건, 평신도가 되었건, 우리는 모두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산다.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옛사람 그대로인 채, 다른 곳, 신사도 운동, 평신도 교회, 치유사역, 예언자 학교, 이런 곁길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면, 앞으로는 기독교인 수가 점점 더 줄어들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무서운 대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 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답하는 것이었고 그가 나치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응답하는 삶을 살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언제나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강조,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와 역사의 중심이고, 神과 자연의 중보자란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for me)라기 보다 ‘우리를 위하여 (for us), 결국에는 ‘타인을 위하여 (for others) 살아가셨던 분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는 ‘예수 따르미’의 숭고한 사상으로는 ‘남을 위한 존재 (dasein for andere, being for others)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고 그런 삶을 살다 끝내 희생되었다. 후대는 그런 그를 가리켜 ‘행동하는 신학자’, '실천하는 신학자' 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아니지만, 행동하는 삶의 좋은 예가 더 있다. 우리나라 육군 사관 학교에 가면, 교정에 높은 기념비가 하나 우뚝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기념비의 주인공은 계급이 남달리 높았거나 부유층이었거나, 참모총장이어서가 아니라, 기념비적 삶을 살다간 강재구 소령의 덕을 기리기 위함이다. 보통 남자라면, 특히, 군인이라면, 우리나라 60만 대군이 한결같이 그 어깨에 별(star)을 달아 보기를 소원할 것이다. 또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그 소원하던 별(star)이 되었다고 하여, 훗날에 그 별(star)을 기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유없이, 별(star)이라고 무조건 기념을 해 준 예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홀로 우뚝 선 기념비,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오전 10시 37분, 힘과 신념으로 옹찬 스물아홉의 한 젊은 장교가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시키던 중, 부하 한 명의 실수로 수류탄 1개를 오발, 병력 대부분이 유효반경 내에 있었기에, 큰 살상이 예상되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그는 자기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으로 그 수류탄을 덮쳤고, 수류탄과 함께 일순간에 산화했던 것이다.
이름없는 무명의 용사, 강재구 소령, 그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그의 삶이 기념비로 남게 된 것은, 그가 남보다 높은 학벌의 소유자였기 때문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을 소유했거나 인물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그는 바로 행동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로, 행동하는 신앙이란, 남을 위해 사는 삶, 열매를 맺는 삶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 따르미'들이 반드시 본받고 실천해야 할 거룩한 성도의 참모습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끝으로, 존경스런 우리 아멘넷의 몇몇 독자분 중 한 분이신, 짐보님께서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셨기에, 우리 모두 함께 귀 기울여 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직 허락받은 것은 아니나 허락해 주실 것을 믿고, 여기 옮겨 놓는다.
(자기 자신에게 꼭 물어보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목회가 교회중심인가? 예수중심인가?"
우리는 늘, 넓은 문과 좁은 문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인지,성령님의 인도를 간구하며
믿음의 분별과 신앙의 양심에 따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분별"이라 생각합니다.
분별을 잃어버린 세대...
우리 모두 그분의 긍휼로, 은혜로, 세상과 가치관이 분별된 믿음을 위해 회개해야할 때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 1-2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 24절 말씀) ”
아뿔싸,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시골 고향 집에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심의 밤, 하늘은 고향 하늘이고 달빛도 그 달빛이건만 그토록 청아하던 귀뚜라미의 노랫소리는 간곳없고, 여태껏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객들이 무섭게 밟아대는 자동차 엔진의 시끄러운 소리만 정적을 깨트리고 들려오는 삭막한 현실, 갑자기 으스스 한기가 느껴진다.
이기적 발로, 육신의 편리만을 위해, 온갖 욕심을 따라,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린 인간이 순수 자연의 소리를 그리워한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은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삶의 질을 높여줄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변질시켜 버린 인간에게 자연은 또 어떤 재앙으로 보복을 가할는지, 파괴, 변질, 폭동, 이런 무서운 단어들이 이 밤에 홀로 깨어 있는 나를 더욱 울적하게 만든다.
변질한 생태계, 엘니뇨 현상, 태풍과 지진, 이 모든 것이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것이 어찌 자연계에만 국한된 것일까? 어느 분야이건 변질된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편리와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켜나가야 할 질서도 무너뜨리고 갖추어야 할 예의범절도 한 순간에 짓밟아 버리는 험한 세상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진리가 길거리에 버려지는 세대에 살고 있다.’라고… 매 순간마다 그 말을 절감케 하는 현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최근, 암담한 교계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우리 게시판에는, 주의를 요망하기에 충분한 호소문이 하나 올라와 있다. 내용인즉, 어느 교회 담임 목사가, 성경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잣대(?)에 비추어 잘못된 성도들을 치리 하기 위해 개 교회 종교재판을 열었다는 충격적인 호소문이다. 뿐만아니라, 법정 효과(?)를 높이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동원, 교회 문을 닫아걸고, 그들을 가두었다는 말도 있다.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가슴이 아프다. 읽는 내내 분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 무슨 회괴한 일이란 말인가?
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system)가 문제인가, 신앙인격이 문제인가
과연 그들, 자칭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기존 교회의 시스템(system)이 갈아엎어 버려야 할 만큼 썩고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결코 그렇게 보지를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현 개신교계에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 문제가, 교리적으로나 시스템(system)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기보다는, 그 안에 몸담고 있는 개인 신앙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선교사로 헌신된 남편 목사님과 함께, 아주 젊은 날부터, 이곳저곳 여러 국가를 다니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만나본 사람들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 과학자, 교수들, 정치인들, 사업가, 농사꾼, 학생들, 혹은 평민들 등등…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예수님에 관한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중 예수님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던지, 믿지 않는 사람이던지,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들 중 상당수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싫고, 그래서 교회 나가기조차 싫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종합해 보면, 한 마디로, 변질한 성도들의 삶이 역겹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이타적인데, 예수를 따른다는 ‘예수 따르미’들의 삶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란 것이다. 입은 아주 믿음이 좋은 신앙인인데, 말과 행동은 다르다는 것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따로 국밥의 신앙,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변질한 신앙인의 형태, 가라지 신앙인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배척받아 마땅할 종교적 행위자라고 규정짓고 탄핵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포기했는가? 어쩌자는 것인가? 가장 많이 예수님을 닮아야 할 오늘날 교계 지도자들은 밥그릇 싸움이나 한다는 지적을 받고, 성추행, 간음, 횡령, 폭행, 사기 등등…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도 당당하다. 정말 기막히다. 그 옛날 주님께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 책망받던 과거 바리새인이 밟고 가던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머리로만 알았을 뿐, 행동과 실천 신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적인 우월감이었다. 그들은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변질’해 버린 것이다 고로, 현대 기독교가 배척을 받는 것은 분명, 제도적, 시스템적 문제가 결코 아니란 것이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성도는 변화를 받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 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데서 오는 것이다! 변화는 새로워지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지도자가 되었건, 평신도가 되었건, 우리는 모두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산다.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옛사람 그대로인 채, 다른 곳, 신사도 운동, 평신도 교회, 치유사역, 예언자 학교, 이런 곁길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면, 앞으로는 기독교인 수가 점점 더 줄어들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무서운 대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 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답하는 것이었고 그가 나치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응답하는 삶을 살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언제나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강조,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와 역사의 중심이고, 神과 자연의 중보자란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for me)라기 보다 ‘우리를 위하여 (for us), 결국에는 ‘타인을 위하여 (for others) 살아가셨던 분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는 ‘예수 따르미’의 숭고한 사상으로는 ‘남을 위한 존재 (dasein for andere, being for others)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고 그런 삶을 살다 끝내 희생되었다. 후대는 그런 그를 가리켜 ‘행동하는 신학자’, '실천하는 신학자' 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아니지만, 행동하는 삶의 좋은 예가 더 있다. 우리나라 육군 사관 학교에 가면, 교정에 높은 기념비가 하나 우뚝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기념비의 주인공은 계급이 남달리 높았거나 부유층이었거나, 참모총장이어서가 아니라, 기념비적 삶을 살다간 강재구 소령의 덕을 기리기 위함이다. 보통 남자라면, 특히, 군인이라면, 우리나라 60만 대군이 한결같이 그 어깨에 별(star)을 달아 보기를 소원할 것이다. 또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그 소원하던 별(star)이 되었다고 하여, 훗날에 그 별(star)을 기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유없이, 별(star)이라고 무조건 기념을 해 준 예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홀로 우뚝 선 기념비,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오전 10시 37분, 힘과 신념으로 옹찬 스물아홉의 한 젊은 장교가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시키던 중, 부하 한 명의 실수로 수류탄 1개를 오발, 병력 대부분이 유효반경 내에 있었기에, 큰 살상이 예상되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그는 자기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으로 그 수류탄을 덮쳤고, 수류탄과 함께 일순간에 산화했던 것이다.
이름없는 무명의 용사, 강재구 소령, 그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그의 삶이 기념비로 남게 된 것은, 그가 남보다 높은 학벌의 소유자였기 때문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을 소유했거나 인물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그는 바로 행동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로, 행동하는 신앙이란, 남을 위해 사는 삶, 열매를 맺는 삶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 따르미'들이 반드시 본받고 실천해야 할 거룩한 성도의 참모습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끝으로, 존경스런 우리 아멘넷의 몇몇 독자분 중 한 분이신, 짐보님께서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셨기에, 우리 모두 함께 귀 기울여 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직 허락받은 것은 아니나 허락해 주실 것을 믿고, 여기 옮겨 놓는다.
(자기 자신에게 꼭 물어보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목회가 교회중심인가? 예수중심인가?"
우리는 늘, 넓은 문과 좁은 문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인지,성령님의 인도를 간구하며
믿음의 분별과 신앙의 양심에 따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분별"이라 생각합니다.
분별을 잃어버린 세대...
우리 모두 그분의 긍휼로, 은혜로, 세상과 가치관이 분별된 믿음을 위해 회개해야할 때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 1-2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 24절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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