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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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ㆍ2017-01-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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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13
이 글은 KCSJ 의 두 번째 행사인 “샬롬! 예루살렘”에 대한 필자의 나름대로 반론을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림을 먼저 알리고 싶다.
물론 오늘날 복음에 대해 철저하게 닫혀있는 저 들의 마음을 여는 방법으로서, 반론의 여지는 있지만 유대인에 대하여 기독교가 행한 과오를 사과하는 모양새를 취하여서라도 어떤 시도를 취한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동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김인식 목사나 송만석 장로께서 주장하신 “이스라엘 회복”에 이르러서는 여러 번 머리가 갸우뚱해지기에 아멘넷 논객들과 이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싶다.
첫째,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의 현대적 정의이다.
2014년 현재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인구 중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는 구약의 유대인에 근접한 종교적 유대인은 세파디 유대인으로서 전체 인구의 15% ~ 20%에 불과하다.
이들은 율법을 절대적 원칙으로 여기며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을 “다윗의 왕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납세, 국방의 의무도 거부하며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일반 교육을 시키지도 않으며 자신들의 종교학교에서만 교육을 받게 한다.
그 이외의 상당수 유대인은 비(非)셈계의 유대인으로서 이들은 7세기경 하자르한국에서 유래된 아시케나지 유대인이며 백인계로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의 고급 주택지에 거주하며 이스라엘과 전세계의 정치경제문화를 리드하는 계층으로서 국제 금융과 정치계를 막후 조정하는 막강한 인종이다.
또한 아랍계 유대인, 흑인 유대인(에티오피아계 유대인), 인도계 유대인, 게다가 중국과 일본인 유대인도 있으니 누가 과연 이스라엘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기실 애매모호하며 따라서 이스라엘 회복을 주장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런 연유로 브리테니커 사전은 “현대 세계에서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유대인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누가 유대인인가는 논쟁과 충돌을 보이기에 이스라엘 정부는 현대적 의미의 시민 개념을 받아들여 자국민을 종교적 의미를 배제시킨 체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둘째, 회복이라는 단어이다.
김인식목사께서 설명하신 “이스라엘을 교회가 대체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눈이 감겼다가 회복되어져 그들에서도 믿는 자가 나오고 믿는 이방인과 더불어 결국은 한 새사람 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통치속에 들어가는 날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축원한다”라는 부분에서 만약 교회가 대체한 것을 부정한다면 이는 인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인 십자가의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초대교회 이래 복음의 전파를 위해 피를 흘린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를 부정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회복”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단어이기에 이 단어의 사용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 6,7)”
또한 김목사께서는 “때가 되어 성도들이 성경을 읽으니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스라엘 회복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라고도 말하였는데 이 “때”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때”라는 것을 재삼 이야기하고 싶고 그럴 경우 이에 대한 균형 있는 성경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한국 교회의 건강성을 해칠 수도 있음을 재삼 언급하고 싶다.
금단제 한복패션쇼, 뮤지컬 공연, 부채춤 공연 등등의 한국에서온 120명의 열정적인 노력을 보며 참석한 유대인들이 조금만이라도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필자에게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1938년 어느 17세의 유대인 소녀가 독일인 하급 관리를 총으로 살해했고 당시 유대인을 향한 히틀러의 증오심에 불을 질러 하룻밤 만에 무려 3만 명이나 투옥하고 살해했던 사건이 벌어진다.
회당은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집에서 쫓겨났다. 당시 시퍼런 히틀러의 권력 앞에서 그 학살에 이의를 제기하고 유대인의 편에 섰던 인물이 있으니 바로 본 훼퍼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항의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크리스마스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끝내 1945년 4월 5일 , 히틀러의 사형 허가로 형장에서 교수되기 직전에도 “이것이 끝이지만 내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라며 무릎을 끓고 기도했던 본 훼퍼는 항상 강조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억눌린 사람들과 똑같이 되는 것” - 그런데 과연 2014년 현재 뉴욕의 플러싱에 위치한 Tample Gates of Prayer 에 운집한 유대인들이 억눌린 자인지 아니면 뉴욕의 성실한 한인 tenant들을 억누르는 landlord 인지 선뜻 판단이 안선다.
초대교회 이래 교회는 무수한 도전과 역경과 변화를 맞이했다.
세속화, 성의 혁명, 동성연애, 지구촌, 세계화, 다원주의, 생명공학, 인공지능, 인터넷 등등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생소한 단어들이 추가될지 그것은 분명히 “ 하나님의 권한이다”.
1914년 헨리 스콧의 선언이다.
“교회는 결코 서 있지 않았고, 움직이고 떠밀리고 미끄러지고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선다. 걸려 넘어지고 앞으로 떠밀리고 쓰러지다가 결국에는 제자리를 찾는다.”
교회의 앞날은 하나님의 권한이기에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KCSJ 의 두 번째 행사인 “샬롬! 예루살렘”에 대한 필자의 나름대로 반론을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림을 먼저 알리고 싶다.
물론 오늘날 복음에 대해 철저하게 닫혀있는 저 들의 마음을 여는 방법으로서, 반론의 여지는 있지만 유대인에 대하여 기독교가 행한 과오를 사과하는 모양새를 취하여서라도 어떤 시도를 취한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동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김인식 목사나 송만석 장로께서 주장하신 “이스라엘 회복”에 이르러서는 여러 번 머리가 갸우뚱해지기에 아멘넷 논객들과 이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싶다.
첫째,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의 현대적 정의이다.
2014년 현재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인구 중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는 구약의 유대인에 근접한 종교적 유대인은 세파디 유대인으로서 전체 인구의 15% ~ 20%에 불과하다.
이들은 율법을 절대적 원칙으로 여기며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을 “다윗의 왕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납세, 국방의 의무도 거부하며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일반 교육을 시키지도 않으며 자신들의 종교학교에서만 교육을 받게 한다.
그 이외의 상당수 유대인은 비(非)셈계의 유대인으로서 이들은 7세기경 하자르한국에서 유래된 아시케나지 유대인이며 백인계로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의 고급 주택지에 거주하며 이스라엘과 전세계의 정치경제문화를 리드하는 계층으로서 국제 금융과 정치계를 막후 조정하는 막강한 인종이다.
또한 아랍계 유대인, 흑인 유대인(에티오피아계 유대인), 인도계 유대인, 게다가 중국과 일본인 유대인도 있으니 누가 과연 이스라엘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기실 애매모호하며 따라서 이스라엘 회복을 주장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런 연유로 브리테니커 사전은 “현대 세계에서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유대인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누가 유대인인가는 논쟁과 충돌을 보이기에 이스라엘 정부는 현대적 의미의 시민 개념을 받아들여 자국민을 종교적 의미를 배제시킨 체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둘째, 회복이라는 단어이다.
김인식목사께서 설명하신 “이스라엘을 교회가 대체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눈이 감겼다가 회복되어져 그들에서도 믿는 자가 나오고 믿는 이방인과 더불어 결국은 한 새사람 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통치속에 들어가는 날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축원한다”라는 부분에서 만약 교회가 대체한 것을 부정한다면 이는 인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인 십자가의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초대교회 이래 복음의 전파를 위해 피를 흘린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를 부정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회복”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단어이기에 이 단어의 사용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 6,7)”
또한 김목사께서는 “때가 되어 성도들이 성경을 읽으니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스라엘 회복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라고도 말하였는데 이 “때”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때”라는 것을 재삼 이야기하고 싶고 그럴 경우 이에 대한 균형 있는 성경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한국 교회의 건강성을 해칠 수도 있음을 재삼 언급하고 싶다.
금단제 한복패션쇼, 뮤지컬 공연, 부채춤 공연 등등의 한국에서온 120명의 열정적인 노력을 보며 참석한 유대인들이 조금만이라도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필자에게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1938년 어느 17세의 유대인 소녀가 독일인 하급 관리를 총으로 살해했고 당시 유대인을 향한 히틀러의 증오심에 불을 질러 하룻밤 만에 무려 3만 명이나 투옥하고 살해했던 사건이 벌어진다.
회당은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집에서 쫓겨났다. 당시 시퍼런 히틀러의 권력 앞에서 그 학살에 이의를 제기하고 유대인의 편에 섰던 인물이 있으니 바로 본 훼퍼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항의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크리스마스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끝내 1945년 4월 5일 , 히틀러의 사형 허가로 형장에서 교수되기 직전에도 “이것이 끝이지만 내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라며 무릎을 끓고 기도했던 본 훼퍼는 항상 강조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억눌린 사람들과 똑같이 되는 것” - 그런데 과연 2014년 현재 뉴욕의 플러싱에 위치한 Tample Gates of Prayer 에 운집한 유대인들이 억눌린 자인지 아니면 뉴욕의 성실한 한인 tenant들을 억누르는 landlord 인지 선뜻 판단이 안선다.
초대교회 이래 교회는 무수한 도전과 역경과 변화를 맞이했다.
세속화, 성의 혁명, 동성연애, 지구촌, 세계화, 다원주의, 생명공학, 인공지능, 인터넷 등등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생소한 단어들이 추가될지 그것은 분명히 “ 하나님의 권한이다”.
1914년 헨리 스콧의 선언이다.
“교회는 결코 서 있지 않았고, 움직이고 떠밀리고 미끄러지고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선다. 걸려 넘어지고 앞으로 떠밀리고 쓰러지다가 결국에는 제자리를 찾는다.”
교회의 앞날은 하나님의 권한이기에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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