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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病床)일기(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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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201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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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9
제목을 병상일기라고 올리고 보니 무슨 대단한 병으로 누워있고 그래서 거창한 느낌이 드나 다른 제목이 안 떠오르기에 이대로 글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

난생 처음 몸에 수술 메스가 대어졌고 이틀 후부터 진통제는 끊었으나 아직 수술 부위의 통증은 그대로이다. 게다가 무릎의 근육이 굳어지기 전에 운동이 필요하다 하여 집으로 배달된 CPM machine 으로 두 시간씩 하루 두 번의 운동을 누워서 할 때마다 통증은 더욱 심하다.

또한 여름이라는 시기에 수술이 겹치다 보니 휴가도 못가고 침상에 누워있는 모습에 조금은 힘이 더 든다. 이제 목발을 의지하여 방안을 서성이기는 하나 창문 밖 산천초목은 강 건너 일이요 요즘 찌는듯한 여름 날씨가 계속 되다보니 불쾌지수가 고연히 더 올라간다.

그리고 졸지에 삼(三)식(食)이 세끼(?) 신세가 되다 보니 아내만 바빠져 매끼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음 메뉴는 무얼하지 ?”라는 것이 아내의 숙제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마이너스에도 불구하고 플러스가 있으니 덕분에 이전 보다 성경 보는 시간과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났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밤중에도 잠이 깨고 다시 잠이 쉽게 안 올라치면 자연히 손이 머리맡의 성경으로 가게 된다. 더욱이 얼마 전 장로 임직식에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큰글성경”은 글 보기도 쉬울 뿐만 아니라 말씀을 읽자마자 그 의미가 더 또렸이 깨달아지는 기쁨이 있어 큰 위안이 된다.

그런데 “ 왜 갑자기 성경 말씀에 이전보다 더 빨리 집중되고 그래서 그 의미가 마음에 깊이 와 닿는가 ?”라는 의문이 생겼고 이에 대해서 생각이 계속 되었고 그 생각을 말하고 싶다.

먼저 이 글의 제목처럼 병상(病床) 이라는 상황에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즈음 이라는 것이다. 내 몸에 메스가 대어지는 환자의 상태에서 전신마취가 혹시 깨어나지 않고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죽음은 필자의 생각에 이전보다 더욱 강하고 자주 접해져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정리가 이루어졌다.

그런 연고로 아내에게 만약시 어디에 생명보험 서류가 있는지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도 이야기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깨달음은 필자 자신의 현주소를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 모두가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진 이치요”(히 9:27)“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모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단명한 인생의 덧없음을 깊이 깨달았기에 시편 90장에서 “우리의 날수를 셈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필자 자신의 병 - 죽음이라는 상황과 나이를 먹고 인생의 덧없음을 알아가고 있는 시점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

흙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네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아다마’(흙)로 빗어진 ‘아담’(인간)들은 언젠가 다시 ‘아다마’(흙)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저 흙일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라틴어 humus(‘흙’)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가 humility(‘겸손’)이라고 하니, 결국 사람은 자신이 흙임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참된 겸손함이라는 것이 아니겠는지.

우리가 나다나엘처럼 무화과나무 아래서 지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삶의 진정한 GPS인 성경 말씀은 우리의 현주소와 우리의 가야할 주소가 정확히 입력되어야 올바른 작용이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정한 겸손이 매일매일 성경을 볼 때마다 재입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흙이라는 현주소와 흙이라는 가야할 주소를 입력하기를 잊어버린 상태로 말씀을 보면 말씀은 단지 내 것을 지키려는 나의 노력을 변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며 그래서 우리는 사회 언론을 숱하게 장식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컽게 만드는 변질된 목회자들과 진리를 변질시키는 총회장들과 자리 세습책에 골몰하는 대교회 당회장들과 우리 주위의 과거에 믿음 좋았던 이웃들의 변해진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닌지.

우리의 인생은 17홀쯤에 석양에 황홀하게 녹아나는 골프장에서 느껴지는 애잔함과 아쉬움 속에서, 세계인의 모든 관심과 환호 속에서 이제 결승을 향해 치닫는 월드컵의 그 화려함 뒤에 찾아올 적막감 속에서, 딜럭스한 시설과 온갖 산해진미와 달콤한 음악으로 치장한 고급 크루즈 선상에서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시간을 기다림 속에서 찾아오는 알지 못할 고독(죽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은 아무리 외면해도 누구에게나 반드시 오며 우리 생각보다 벌써(?) 오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리 말하지 않았던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이제 내게 남겨진 날 수 동안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왜냐하면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우리의 선악간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며 의의 면류관이 이것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하기에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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