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은 당위의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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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2-03-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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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 소를 먹이러 나갔다가 잠시 눈을 돌리는 사이에 우리 소가 남의 논의 벼를 뜯어먹었습니다. 나는 논임자에게 눈물이 나도록 야단을 맞고 혼이 났습니다. 나는 너무 속이 상하여 소를 나무에 매어 놓고 많이 두들겨 팼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또 남의 논에 벼를 뜯어먹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두들겨 팼습니다. 나는 소를 때리면서 마치 부모가 아이들에게 매질을 할 때처럼 “또 그럴래, 이 나쁜 놈의 소 새끼, 내가 남의 곡식 뜯어 먹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라고 하며 소를 때렸습니다. 벼 주인에게 야단맞은 것 때문에 얼마나 소가 미웠든지 그렇게 소를 때렸는데도 분이 풀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가 좀 들어서 내가 소를 두들겨 팬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는 왜 남의 곡식을 뜯어먹으면 안 되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어맞아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남의 벼든 콩이든 가리지 않고 뜯어먹습니다. 소는 남의 것을 훔쳐 먹는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냥 거기 맛있는 것이 있으니까 먹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못 먹게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소 임자에게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왜 뜯어 먹지 말아야 할 남의 논의 벼나 남의 밭의 콩을 뜯어 먹었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소를 때린 것이 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는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소는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소의 행동은 악하다거나 혹은 선하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소에게는 당위가 없기 때문에 소의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도 짐승처럼 도덕적 평가를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습니다. 달리기를 잘 못하는 것이나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것도 도덕적 평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공부나 노래나 운동을 잘해도 착하다거나 혹은 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짐승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회사에 연구원으로 고용이 되었다면 연구하고 공부하는 행위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월급을 받고 연구해야 할 사람이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마땅히 해야 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그것을 당위적인 행위라고 합니다. 당위(obligatory)란 의무를 지우는, 의무적인, 강제적인, 필수 등의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당위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어른을 존경하는 것이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나 국민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 등도 당위에 속합니다. 옳고 선한 것은 해야 하고 악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당위에 속합니다.
그 다음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당위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이 정직해야 하는가, 왜 거짓 말 하면 안 되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철학에서 오랫동안 제기해 온 문제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목적론적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선하게 행동해야 행복하기 때문이고, 정의롭게 행동해야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하게 행동 하는 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 이것을 목적론적 이론이라고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착하게 행동해야 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가 벤덤(J. Bentham)과 밀(J. S. Mill)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개인이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모두가 행복해 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목적은 행복이고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 그 자체는 도덕적 가치가 아닙니다. 도덕적 가치는 그것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그러면 왜 우리가 행복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불행하면 어떤가, 왜 굳이 행복해야만 하는가?”여기에 대해 J.S. Mill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자연적으로 추구하게 되어 있는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마땅히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하였습니다.
목적론적 이론과는 정 반대의 이론은 의무주의적 설명, 혹은 이론입니다. 의무주의에서는 인간이 직관적으로 무엇이 악하고 선한가를 안다고 합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쁜데, 거짓말을 하면 그 사회가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이론의 대표적 학자가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E. Kant)입니다. 그는 정언명령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는데 네다섯 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 그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준칙은 개인의 행동원칙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한다.”라는 준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준칙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도 좋다면 필요할 때 얼마든지 거짓 말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은 그렇지 않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기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세상 모든 사람이 필요할 때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칸트의 전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이론은 신명론(Divine command theory)입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이 명령했기 때문에 해야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같은 神命論이라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입장이 다릅니다. 천주교의 입장은 무엇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론을 본체론(substantialism), 혹은 실체론이라고 합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 외에 무엇이 옳은가 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주의론(voluntarism)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합니다.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령 살인이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인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살인은 나쁘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표준이나 기준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옳고 그르다고 하면 그른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표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입장이고 개신교의 입장입니다. 천주교의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천주교 신학자들 중에도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학자가 많은데 그 중에 대표적인 학자가 파스칼입니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 이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본체론으로 돌아섰으나 피스칼 같은 이는 천주교인이었으나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랐습니다. 루터나 칼빈이 종교 개혁을 할 때 가장 미워했던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교 신학을 다 망쳐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면 무조건 옳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당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장로교인들은 당위와 예정 의 관계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예정을 이야기 할 때는 구원이 인간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정을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당위를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정을 당위의 근거와 이유로 제시하였고 믿음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의 예정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예정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선택하시고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결심하고 선택하고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 눅 9:51-56절 -
그런데 나중에 나이가 좀 들어서 내가 소를 두들겨 팬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는 왜 남의 곡식을 뜯어먹으면 안 되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어맞아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남의 벼든 콩이든 가리지 않고 뜯어먹습니다. 소는 남의 것을 훔쳐 먹는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냥 거기 맛있는 것이 있으니까 먹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못 먹게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소 임자에게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왜 뜯어 먹지 말아야 할 남의 논의 벼나 남의 밭의 콩을 뜯어 먹었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소를 때린 것이 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는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소는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소의 행동은 악하다거나 혹은 선하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소에게는 당위가 없기 때문에 소의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도 짐승처럼 도덕적 평가를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습니다. 달리기를 잘 못하는 것이나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것도 도덕적 평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공부나 노래나 운동을 잘해도 착하다거나 혹은 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짐승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회사에 연구원으로 고용이 되었다면 연구하고 공부하는 행위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월급을 받고 연구해야 할 사람이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마땅히 해야 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그것을 당위적인 행위라고 합니다. 당위(obligatory)란 의무를 지우는, 의무적인, 강제적인, 필수 등의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당위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어른을 존경하는 것이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나 국민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 등도 당위에 속합니다. 옳고 선한 것은 해야 하고 악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당위에 속합니다.
그 다음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당위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이 정직해야 하는가, 왜 거짓 말 하면 안 되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철학에서 오랫동안 제기해 온 문제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목적론적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선하게 행동해야 행복하기 때문이고, 정의롭게 행동해야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하게 행동 하는 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 이것을 목적론적 이론이라고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착하게 행동해야 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가 벤덤(J. Bentham)과 밀(J. S. Mill)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개인이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모두가 행복해 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목적은 행복이고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 그 자체는 도덕적 가치가 아닙니다. 도덕적 가치는 그것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그러면 왜 우리가 행복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불행하면 어떤가, 왜 굳이 행복해야만 하는가?”여기에 대해 J.S. Mill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자연적으로 추구하게 되어 있는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마땅히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하였습니다.
목적론적 이론과는 정 반대의 이론은 의무주의적 설명, 혹은 이론입니다. 의무주의에서는 인간이 직관적으로 무엇이 악하고 선한가를 안다고 합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쁜데, 거짓말을 하면 그 사회가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이론의 대표적 학자가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E. Kant)입니다. 그는 정언명령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는데 네다섯 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 그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준칙은 개인의 행동원칙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한다.”라는 준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준칙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도 좋다면 필요할 때 얼마든지 거짓 말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은 그렇지 않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기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세상 모든 사람이 필요할 때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칸트의 전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이론은 신명론(Divine command theory)입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이 명령했기 때문에 해야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같은 神命論이라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입장이 다릅니다. 천주교의 입장은 무엇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론을 본체론(substantialism), 혹은 실체론이라고 합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 외에 무엇이 옳은가 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주의론(voluntarism)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합니다.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령 살인이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인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살인은 나쁘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표준이나 기준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옳고 그르다고 하면 그른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표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입장이고 개신교의 입장입니다. 천주교의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천주교 신학자들 중에도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학자가 많은데 그 중에 대표적인 학자가 파스칼입니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 이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본체론으로 돌아섰으나 피스칼 같은 이는 천주교인이었으나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랐습니다. 루터나 칼빈이 종교 개혁을 할 때 가장 미워했던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교 신학을 다 망쳐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면 무조건 옳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당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장로교인들은 당위와 예정 의 관계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예정을 이야기 할 때는 구원이 인간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정을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당위를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정을 당위의 근거와 이유로 제시하였고 믿음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의 예정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예정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선택하시고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결심하고 선택하고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 눅 9:51-56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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