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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말씀과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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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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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용어는 과학적인 용어와 달라서 그 의미가 매우 애매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적인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논리나 합리나 과학으로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용어의 의미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현실적인 생활은 거의 과학이나 합리나 논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이성적 판단에 의해 모든 것을 선택하거나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교리적인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는 지나치게 이성을 무시하고 구체적 현실에서는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의 대상이 이성의 인식 한계를 넘어선다고 해서 신앙의 영역에서 논리와 합리와 과학과 이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성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신앙은 과학과는 그 영역이 달라서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신앙의 영역이 과학이나 이성의 영역을 초월한다고 해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용어나 개념에 대해서는 아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나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 신앙생활이 마치 아무 개념 없이 뜬 구름 잡는 것과 같은 부작용을 낳게 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신앙고백이나 믿는 내용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열정이나 진정성이 곧 믿음인 것으로 확신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태초, 말씀, 생명, 빛, 은혜, 영광 등의 용어는 우리가 잘 알고 많이 사용하는 용어들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쉽게 설명하려고 이 용어들을 사용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습니다. ‘태초’라는 용어를 우리가 흔히 사용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의하려면 너무나 엄청나서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이런 용어들은 그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성경을 읽는 이들이 그 뜻을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아 신앙생활에 신앙의 거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거품을 제거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와 국민 경제에도 거품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도 거품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품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은 주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말씀’과 ‘영광’에 대해 설명을 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말씀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λογος)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본래 철학 용어입니다. 요한이 이 용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시도는 아주 획기적입니다. 요한이 철학의 용어인 로고스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한 이유는 요한복음의 독자가 헬라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고스는 헬라철학의 한 분파인 스토아학파가 사용한 그들의 철학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으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세상은 매우 조화로운 질서의 세상, 즉 코스모스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로고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는 밤낮이 교차하고 계절이 순환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 년은 365일입니다. 낮이 되고 밤이 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됩니다. 달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합니다. 해와 달과 지구와 그 외의 수많은 천체들이 질서 있게 운행합니다. 창세 이래 이것들의 질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대 기상학자들이 이상기후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지만 밤낮의 질서가 바뀐 적이 한 번도 없고 계절이 생략 되거나 바뀌지도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는 홍수 이후에 이 질서가 깨어질까봐 심각하게 두려워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우주의 질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나름대로 생각하였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그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도(道)라고 설명하였고,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질서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고 믿습니다. 이 질서에 대한 설명에서 기독교와 헬라 철학은 싸우기도 하였고 대화도 하였고 경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헬라 철학자들이 만물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한 그 로고스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프리카 오지에 선교하러 간 선교사가 그 원주민의 언어를 배워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교사가 그 원주민의 언어를 배워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들의 이방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듯이, 요한이 헬라 철학의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이 세상 질서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라는 용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했던 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번역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중국에 들어간 선교사들은 하나님을 상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상재란 하늘의 신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을 상재로 번역하여 중국인들은 하나님을 그들이 알고 있는 상재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일본어로 신은 ‘가미’인데 일본에는 신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미로 번역하니까 하나님을 그 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이해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일본인들은 멸치도 신으로 섬기니까 하나님이나 멸치나 동급이 되어버리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한계점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기존의 하느님이라는 신이 있었는데, 민간 신앙의 신인 하느님을 토시 하나 바꿔서 하나님으로 번역을 하여 기독교의 하나님과 민간 신앙의 하느님을 구별할 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이런 언어의 복을 모든 나라가 다 누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마다하고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되 그들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차원, 즉 성경이 이야기 하려고 하는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가 헬라 철학자들이 사용한 로고스와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란‘육신을 이루었다.’또는 ‘육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로고스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그 분 안에서 우주의 질서가 가능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로고스이기는 하지만 헬라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로고스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질서를 주시는 로고스라고 하였습니다. 헬라 철학을 잘 알고 있었던 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가히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스토아 철학자들의 로고스는 절대 초월적인 존재인데, 절대 초월적인 존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나 인간과는 절대로 일치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요한이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한 것은 철학의 근간을 뒤집어 버리는 행동이었습니다. 요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헬라 철학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요한이 설명하는 복음은 헬라 철학의 ABC도 모르는 무식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 즉 성경의 가르침에 익숙해 있어서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 없이 믿지만 헬라 철학자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헬라 철학자들에게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헬라인들이 볼 때는 한 없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참고 . 고전 1:23). 헬라 철학자들은 복음을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즉 헬라어로 미련하다는 말(μωρία)은 어리석고 엉터리없는 짓이나 허튼 소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헬라 철학자들에게 이런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수준 이하거나 광신자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은 기독교인을 광신자나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로 보았던 것입니다. 헬라인들이 복음 전도자들을 그렇게 취급했다는 것은 바울의 서신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울은 헬라인들이 자기를 바보 취급하고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취급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어리석거나 미쳤지만 그는 그가 전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복음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무너지면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요한은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천명하고 난 다음 그 사실을 믿음 안에서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설명입니다. 말이 안 되는 설명이라면 설명 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요한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설명이 안 되지만 믿음 안에서는 또 설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논리도 합리성도 과학도 이성도 문학도 예술도 정치와 경제도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이 제시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출 33:18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했더니 하나님께서“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영광’을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얼굴은 못보고 등은 본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의 얼굴과 등을 우리의 몸과 관련해서 이해합니다. 얼굴은 볼 수 없고 등은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놀라운 하나님의 행위를 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등은 인간의 상상이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정예 기마병들이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놀라우면서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시내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하늘, 땅, 풀, 나무, 공기, 물, 불, 번개, 눈, 지진, 온갖 생물과 무생물 수많은 생물학적 원리와 물리학적 원리, 자연의 원리와 질서, 자연과 인간의 역사와 문명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절정으로 드러난 사건이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보았고 우리도 요한이 본 것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온 땅과 우주에 충만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 영광을 봅니다. 물리적이고 현상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자 되는 것이나 성공하는 것이나 건강하게 장수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요한이 제시하는 또 다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약속하는 것은 건강이나 성공이나 부나 권력이나 신비한 체험이나 화려한 경력이나 그 어떤 세상적 행복과도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경험하게 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모든 것들을 잃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태양이 비치는 대낮에 손전등처럼 별로 필요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새 생명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논리에 맞지 않는다느니 합리적이지 않다느니 바보라느니 어리석다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생애로 담아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살았고 베드로도 요한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이나 지혜나 능력으로는 생산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고 누리는 자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눈을 뜨게 된 장님이나 앉은뱅이였다가 일어나 걷게 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나므로 돈이나 권력이나 성공이나 학문이나 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일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 영광 가운데서 그 영광을 누리고 사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 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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