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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신학적 역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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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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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학자들은 “기독교는 반드시 역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연이나 신비나 합리적인 경험 속에서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체적 역사 안에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계시의 대상자인 인간이 구체적 역사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역사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역사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비교적 건전하고 역사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거의 잘못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탁월해도 역사를 무시하거나 역사에 무지하면 교만하게 되고 교만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악입니다.

흔히 역사를 두 가지 의미로 말합니다. 첫째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고 둘째는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고 합니다. 전자는 객관적 역사이고 후자는 주관적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는 이 둘을 구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객관적 과거는 히스토리에(Historie)라고 하고, 과거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게쉬테(Geschichite)라고 합니다. 히스토리에는 가능한 공정한 연구와 중립적인 관찰을 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게쉬테는 과거가 나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란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와 이를 토대로 역사가(歷史家)가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역사의 두 측면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사실로서 역사를 강조한 대표적인 학자는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입니다. 그는 역사란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과거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역사가는 자신을 숨기고 역사적 사실만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랑케의 이러한 입장은 실증적 역사 연구 방법을 확립하는 데는 크게 이바지 하였으나 역사의 주관적 측면은 철저하게 배제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비판한 학자가 20세기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크로체(Croce, 1866~1952)입니다. 그는 “모든 역사는 오늘의 역사다”라고 하였습니다. 랑케가 주장하는 객관적 역사 서술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역사가의 입장과 시각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역사란 과거에 대한 주관적 해석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크로체의 이러한 입장은 자칫 역사적 상대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역사에 대해 객관성을 강조한 랑케나 주관성을 강조한 크로체 모두를 비판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입니다. 카는 랑케와 크로체 모두가 극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두 입장을 조화시키려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즉,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존재로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반대로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이 없는 무의미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역사를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보았습니다.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 줄 사료(史料)를 가지고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그 결과를 그 자신의 사관에 입각하여 주관적으로 서술하는 학문이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역사 이해에는 몇 가지 유형들이 있습니다. 첫째, 순환론적 역사관이 있습니다. 이 입장은 역사를 돌고 도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자연계에서 계절이 순환하는 것으로부터 유추하여 역사도 순환 유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순환론적인 역사관의 특징은 비관적입니다. 고대 희랍철학과 거의 모든 자연종교는 이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진보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이 입장은 역사에서 기독교의 신인 하나님을 배제해 버렸습니다. 과학과 도덕 모두는 진보하여 좋은 세상이 온다는 면에서 낙관적이라고 합니다. 셋째, 역사주의가 있습니다. 이는 18세기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사상으로 진보주의 역사관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였습니다. 역사주의는 역사가 일직선 적이라는 개념을 배제하였습니다. 역사는 다양한 문화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역사가의 임무는 감정이입을 통해 자신의 문화와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넷째,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입니다. 칼 마르크스의 모든 사상의 전제는 인간이 자신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노동하기 때문에 인간에 의하여 역사 과정이 창출된다는 신념의 유물사관에서 비롯된 역사관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입장을 계몽주의와 역사주의로부터 끌어낸 사상들을 혼합시킨 헤겔의 입장을 자신의 견해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다섯째, 기독교 역사관입니다. 기독교 역사관은 역사를 하나님의 통제 하에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는 개념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의 개요는 역사를 강조하되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점으로 봅니다. 그리고 역사의 의미와 개인의 창조적 역할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구속사관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역사관도 여러 복잡한 견해들이 있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역사는 현실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낙관적인 역사관이라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역사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간에 역사 이해의 기본은 시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일반화 된 시간 이해를 제공한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두 가지로 설명했는데 하나는 순환적 시간관이고 다른 하나는 직선적 시간관입니다. 아직까지 이 이론을 뒤엎은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본 사람은 어거스틴이 최초입니다. 성경이 시간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직선적인 것으로 이야기 하는데 어거스틴 이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순환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시간과 역사를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강조점은 달라집니다. 기독교적 역사 이해와 해석이 그만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 역사가가 많지 않은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고 있는 역사가를 기독교인 역사가라고 한다면 기독교 역사가가 많겠지만 진정 신학적 역사해석을 할 수 있는 역사가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역사가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는 학문적 능력과 신학적 역사해석 능력을 고루 갖춘 기독교인 역사가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좋아하는 나는 그의 신학적 역사이해와 역사해석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재자(不在者) 하나님 개념을 몹시 싫어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은 부정하는 이신론 자들의 사상이고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관입니다. 물론 역사적 사건들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는 신학적으로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버터필드는 그 둘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역사에서 개인의 책임과 하나님의 섭리를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려 하기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나는 신학적 역사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개입은 물론 인간의 책임까지 강조합니다. 이 모두를 한 사람의 역사가가 다 강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의 역사관에는 성경적 인간관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개별적 인간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로 봅니다. 그가 인간을 그토록 고귀한 존재로 보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책임적인 존재라는 이해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히틀러의 그토록 끔찍한 정책들은 종족의 운명만을 중요시하고 개인의 고귀함과 가치를 알지 못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동일한 이해 선상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역사관도 비판하였습니다. 집단명사-종족, 민족, 민중, 백성, 국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들은 인격적 존재, 즉 책임적 존재인 개개인을 등한시하는 경향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조우하게 되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역사적 부품으로 전락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을 위한다는 구호를 외쳤지만 구체적으로는 자신들이 의식도 예상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개인을 무시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과학으로 자기들의 이론을 정당화 했고 그 정당화는 민중을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민중을 구성하는 개인을 이해하지 못하여 실패를 한 셈입니다.

기독교적 역사이해를 위해 노력하면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의 약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건의 역사성은 부인하면서 그 역사의 주관적 해석의 가치는 매우 강조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부활의 의미는 매우 강조합니다. 그래서 순진한 사람들이 속습니다. 웃지 못 할 아이러니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니고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그저 이솝 이야기나 희랍의 신화와 같을 뿐입니다. 이런 주장이 실존주의와 짝짜꿍이 되어 현대인의 감성에 상당히 어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2014년 12월 28일이라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난 일 년 간 국내외적으로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 관련성을 부인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만도 매우 중요합니다. 보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어떤 사건에 직접 관련 되었다면 그 영향은 더 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영향은 나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영향이 나를 통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보거나 경험할 때 어떤 관점에서 보고 경험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나를 통해 다시 밖으로 나가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숨 쉬고 심장이 뛰는 것을 살아 있다고 하는데,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반응하는 것이 나라는 존재와 삶의 스크린을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로 영향을 끼치는 이런 상호 작용이 영적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사물에 대하여 선하게 반응하고 작용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영적 생명의 존재형식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역사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위의 두 방법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첫째 방법이 전기와 같은 것이라면. 둘째 방법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규칙과 경향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함으로 알게 되는 방법이고, 기독교적 방법이란 신앙을 통해서 역사를 보고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을 논리적으로 조화시키기란 쉽지 않지만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것도 성경적 역사이해 방법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45장에 매우 감동적이고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는 요셉이 자신이 그들의 동생임을 밝히자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형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요셉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았고 강자의 너그러움으로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저지른 악까지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형들이 저지른 악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저지른 악에 대하여 신학적 해석을 하므로 그 일에 대하여 자신이 나서서 보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운명론이나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힘센 하나님이 맘대로 하신 일이니 내가 어떻게 하겠어!’라는 식이 아닙니다. 그 사건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들에서 자신과 자기 가족 모두의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애굽 백성들과 주변 여러 이방민족들의 생명까지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신학적 역사독해력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영성입니까? 얼마나 탁월한 역사 이해입니까? 얼마나 심오한 신학입니까? 얼마나 멋진 신앙고백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찬양입니까? 감탄할 수밖에 없는 신학적 역사해석입니다. 신학적 역사해석이 나와 나의 원수 모두에게 제공하는 부가적인 은혜는 나의 원수에게 내가 절대로 보복할 수 없음을 천명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 창 45: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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