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신앙 점검 > 지난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페이스 상패 제이미 제이미혜택



이곳은 2017년 이전에 올려진 아멘넷 오피니언 칼럼 글입니다. 이름으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황상하 | 김동욱 | 최송연 | 허경조 | 이수일 | 송흥용 | 김정국

지난 오피니언

대림신앙 점검

페이지 정보

황상하2014-12-06

본문

묵시문학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시대와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의 유대인들의 세계관에 사상적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은 당시 이와 같은 보편적인 세계관을 굳이 설명하지 않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이해하는 데 묵시문학 이해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그 시대의 보편적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묵시문학이 하나님 나라와 어떻게 다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묵시문학은 200 B.C.-A.D. 100 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셀류커스 왕조 하의 지배, 마카비 혁명과 하스모니안 왕조의 짧은 독립 국가의 탄생, 다시 로마의 지배, 로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 운동과 A.D. 70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로 그 어느 때보다 민족 독립의 열망이 강렬했던 때입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열망들이 묵시문학에 반영되었습니다. 문화 사상적으로는 헬레니즘의 영향권 하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이 헬레니즘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이에 반대하여 율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묵시문학은 경건한 의인에 대한 보상과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헬레니즘과 페르시아 종교의 도전을 유대교적으로 흡수한 결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구약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어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이 태동된 신학적인 배경으로서는 흔히 신정론(神正論)의 문제를 이야기 합니다. 묵시문학가들은 이 땅에서 의로운 자들이 보상받지 못하는 참담한 현상과 불의한 자들이 심판을 받지 않고 잘 살고 심판을 받지 않는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문제로 많은 갈등을 하였습니다. 묵시문학은 다음 두 가지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이 모순의 원인을 인간 세계의 차원에서 탈피하여 우주적인 지평에서 모색하였는데, 악은 먼저 천상 세계의 타락으로부터 왔으며, 인간들은 정한 때가 이르기 전까지 이 고통을 감내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악한 세상은 반드시 파멸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부활하여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며, 악인들 또한 부활하여 살았을 때의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현재의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의의 길을 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묵시문학의 사상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기원전 587년에 발생했던 바벨론 포로 사건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유대인들에게 그 사건은 이전의 모든 체계와 가치질서들이 허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고, 성전이 무너졌으며, 왕족과 지식인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재기의 지혜도 능력도 없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직접 개입은 우주의 대(大)파국과 모든 기존 질서의 해체입니다. 이러한 묵시문학이 제시하는 핵심 메시지는 위로와 저항입니다. 묵시문학의 메시지인 위로와 저항은 내세 지향적인 형태와 현실 정치적 메시야 기대라는 서로 상반되는 사상적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내세를 강조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에 대해 책임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는 자들은 과격한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전천년기설과, 후자는 후천년기설과 그 경향이 맞닿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묵시문학은 세대주의와 극단적인 시한부종말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궁극적으로는 내세 지향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 역동성과 하나님 나라 윤리가 매우 강조되고 있습니다.

대림신앙에는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신비하게 융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는 그 현현의 형식과 능력이 인간의 상식적 인식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그 나라와 메시야에 대한 이해를 역사와 논리와 합리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묵시문학이 구약의 다니엘서를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은 대 예언서로 취급하는 것도 지나치게 역사와 논리와 합리성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묵시문학의 입장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Eptuagint,LXX)이나 라틴어 역(Vulgate)을 따른 것이지만 정작 히브리어 성경인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MT)은 다니엘서를 성문서로 분류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기록되던 시대의 문화적 배경과 보편적 가치관 같은 것에 대한 부연 설명 없이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성경 말씀을 바르고 깊이 있고 풍성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수준에 우리를 머물게 합니다.

교회력으로 12월은 대림절(待臨節)입니다. 대강절(待降節)이라고도 합니다. 메시야 대림신앙을 강조하는 절기입니다. 누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을 할 때 그 의미는 실제로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올 길을 토목공사를 통해 준비하라는 것이라기보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예비하라는 그 내용으로 보아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사 40:3-5). 그 길을 준비하라는 것은 메시야가 임할 때 될 일을 미리 선포하고 알리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이 그 사실을 잘 설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림신앙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메시야의 길,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그릇된 신학과 사상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계시는 점점 더욱 풍성해지고 명확해지지만 메시야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여전히 인간의 인식 능력에 의해 완벽하게 파악되고 설명될 수 없고 인간의 생각과 태도는 하나님의 길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척하고 거역하는 특징을 드러냅니다. 종말론적 신앙이 우리에게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철저하고 경건한 신앙의 사람도 탁월한 신학자도 하나님의 길이 자기의 생각과 같을 것이라는 착각을 할 위험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림신앙으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자기의 언행에 대해 두려워해야 합니다. 무지 가운데 그릇된 판단과 그릇된 확신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게 될까 몹시 두려워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실, 믿고 있는 내용, 기대하는 소망, 행동하는 기준과 습관이 주님의 길과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를 수 있는 정도라기보다 거의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목회자의 목회와 선교사의 선교활동과 일반 성도들의 생활 전반이 예외 없이 해당됩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는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깨어 있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고 구역모임에도 열심이고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도 정성껏 내고 교회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몸이 상하기까지 열정적으로 목회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도 깨어 있다는 증거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는 증거로 점검하고 카운터 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민주주의 원칙과 정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 자본주의의 약점과 폐단을 개선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고 이용하는 것, 가능하면 나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 공익에 기여하지 않는 것, 남을 무시하는 것,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개똥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는 등의 속담에 걸맞은 생활은 주님의 길과 정반대입니다.

지금 내가 알고 믿는 바가 주님의 길과 다르다는 사실을 재림의 주님 앞에 서서 알게 된다면 너무 늦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 대림절에 주님의 길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기도하십시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그 날에 모든 것은 어떻게 달라질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 사 40:5-5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연락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