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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통계, 신뢰 안 가지만 他山之石으로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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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2-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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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연세 대학 교목 실에서 그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입학할 때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졸업할 때는 가톨릭 신자가 되거나 불교인이 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나는 그 조사에 의문을 갖습니다. 물론 진지하게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가 철저한 유대교 신자였을 때는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 줄로 알았다가 예수님을 만나 개종한 후에는 그것이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앞의 통계에 나타난 개종자들은 바울 같은 경우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신교인이었던 사람이 불교인이 되었거나 가톨릭 교인인 된 경우는 아마 처음부터 참 개신교 신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 개신교 신자였다면 그렇게 되기가 어렵고 그 반대 또한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 불교나 가톨릭으로 옮긴 사람들은 진정한 불교신자나 가톨릭 신자가 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를 선택할 때 자기의 판단에 따라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옮겨 간 종교에서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또 다른 종교로 옮기거나 무종교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문 조사의 “왜 개신교에서 가톨릭이나 불교로 옮겼습니까?”라는 질문에, 첫째, 개신교는 요란하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고 했고, 둘째는 개신교 지도자들의 자질을 믿을 수 없다고 했으며, 셋째는 교회가 물질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개신교회를 떠난 이유가 깊이가 없고, 지도자들의 자질을 믿을 수 없으며, 물질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라니, 개신교회의 수준이 부끄럽고 또한 그런 이유로 개신 교회를 떠난 이들이 안타깝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가 사실이기 때문에 부끄럽고, 그들이 옮겨간 불교나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깊이가 있고 지도자들을 신뢰할 수 있으며 물질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내가 개신교 목사라서가 아니라 개관적 평가에 의하면 불교도가 많은 나라나 가톨릭 교인이 많은 나라보다는 그래도 개신교인이 많은 국가와 사회가 더 정의롭고 부정부패가 적습니다. 개신교회가 요란하고 깊이가 없고, 지도자들의 자질을 믿을 수 없으며, 물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지적이 다 사실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지만, 불교나 가톨릭이 그런 면에서 개신교보나 더 낫다는 생각이나 주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개신교회는 그들이 개신교회가 싫어서 떠난 이유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타산지석이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기 구슬을 가는데 소용이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고사 성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열심히 믿는 것보다 바르게 믿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바른 원리의 토대위에서 열심을 내야지, 바른 원리도 없이 열심만 내기 때문에 소리만 요란하고 깊이가 없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에 그런 경향이 심각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잘못된 원리 위에서 열심을 냈는데, 그것은 곧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깊이가 있습니다. 학문적 깊이가 아니라 원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 뜻이 깊고 심오합니다. 진리가 없는 신앙의 특징은 요란하고, 진리에 뿌리를 내린 신앙은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조용하면서도 세속을 개혁하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인간관계에서 무식하고 용감한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바른 원리가 없으면서 용감하면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개신교 지도자의 자질을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에 귀 기우려야 합니다. 설교하는 동안 성경을 찾아 읽고 암송하기도 하며 다른 이야기 하지 않고 성경만 이야기 하는데 도무지 성경이 증거 하는 메시지를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성경적이라는 말이 가장 비성경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인들은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 계시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정과 사업과 직장과 인간관계와 경제와 정치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에 바른 교리와 신학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우리는 무능하고 우둔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이 분명하지 못하면 빛도 될 수 없고 소금도 될 수 없으며 설교도 교육도 상담도 말재간으로만 하게 됩니다.

설교나 성경공부에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선동적이거나 자극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감상적인 용어가 너무 빈번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 비전, 영성, 성공, 야성 등과 같은 용어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고 증거 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좋은 용어들이 아닙니다. 이런 용어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명심에 들뜨게 하거나 감정적으로 치우치게 하거나 인위적인 열심을 내게 하기 쉽습니다. 성경에 좋은 용어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경건, 착함, 진실, 선, 깨끗함, 옳음, 정의, 지혜, 겸손, 충성, 희생, 열심, 등, 이런 좋은 용어들을 묵상하고 실천하고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온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 그들의 형편을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겔 7:26)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물질에 너무 집착한다는 지적은 곧 교회 지도자나 교인 모두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 평가 또한 사실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 안의 모든 분쟁은 물질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돈이 많은 교회는 선교도 구제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선교나 구제를 많이 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나 구제를 많이 해도 안 좋은 교회 일 수도 있습니다. 큰 교회에는 국회의원도 많고 장관도 많고 교수나 판검사나 의사나 부자도 많습니다. 그들이 물질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신자라면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말아야 합니다. 돈과 권력 앞에 경건도 정의도 염치도 상식도 포기해 버리는 교인이 아니라 돈과 명예와 권력을 비웃을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인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 생각하고 그 외 모든 것을 상대화 할 수 있는 믿음이 능력 있는 믿음입니다. 교회나 신자에게 돈이 너무 많으면 돈의 위력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인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어떤 통계, 신뢰가 가는 것은 아니지만 타산지석으로 삼는 겸손과 지혜가 절실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언 3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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