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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현실주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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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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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1639년(인조 17)에,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입니다. 이 비문이 조선에게는 굴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삼전도비문을 지은 사람이 조선시대의 명재상 이경석입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에 패했지만 여전히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였습니다. 하여 청나라는 조선이 스스로 비를 세우게 함으로써 조선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 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던 조선 선비들 중에 개인과 집안의 명예 실추와 오명을 감수하며 항복비문을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삼전도비문을 쓸 경우 자신과 그의 가문은 후대까지 불명예를 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조는 네 명의 신하에게 비문 찬술을 명령했지만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웠고,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써서 채택되지 않도록 했고, 장유는 적절치 않은 인용문을 사용했고, 이경석의 글은 너무 소략하다는 질책을 받고 거절되었습니다. 인조는 결국 다시 이경석을 불러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이 때 이경석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명예를 지킬 것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삼전도비문의 찬술은 당시 조선 전체를 뒤흔드는 명분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경석은 삼전도비문을 찬술하였습니다. 경기도 분당에 이경석의 묘가 있는데, 생전엔 최고의 재상이었지만, 사후엔 그를 싫어하는 노론 파들이 그를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지조 없이 아첨한 인간으로 매도하였습니다. 특히 청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를 숭상하던 송시열이 그를 매도하였고, 조선 후기에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세력이 집권하면서 현재까지 이경석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던 노론들의 주장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 이경석은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선택하였습니다. 때문에 명분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던 조선의 선비들이 이경석을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이경석이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택했지만 이경석 개인으로는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택한 것입니다. 그는 나라를 지켜야 하는 실리를 선택하여 목숨보다 중한 자신과 가문의 명분을 희생하였는데, 이러한 이경석의 선택이야말로 저급한 현실주의와 허울뿐인 명분을 극복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명분과 현실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일생동안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둘 사이에서 갈등은 하지만 명분보다는 현실을 선택하게 됩니다. 물론 아예 갈등조차 안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안 하는 사람이 대범한 것 같고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 명분을 소홀히 하고 실리를 선택하여 낭패를 본 인물 중 한 사람이 에서입니다. 에서는 분명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동생 야곱은 저급한 현실주의보다 고급한 가치를 추구한 명분론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에서를 현실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이 야곱을 신앙과 인격적인 면에서 에서보다 더 낫다고 하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문제이고 자격 때문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만 에서라는 인물을 통해서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형 에서는 사냥꾼이 되어 사냥을 하기 위해 주로 들과 산으로 돌아다녔습니다. 동생 야곱은 성품이 조용하여 주로 집안에서 지냈습니다. 에서나 야곱은 각각 성품과 취향에 따라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어떤 일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고기를 좋아한 탓으로 사냥꾼인 에서를 좋아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야곱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건의 발단이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에서는 하루 종일 사냥을 하다가 허기에 지쳐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마침 야곱은 집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는 것을 본 에서는 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팥죽을 주는 대신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동생이 죽을 줄테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한 것이 실제로 심각한 딜이 아니고 농담으로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밥 먹여 주냐, 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거래가 성립되었습니다. 무슨 소꿉장난 같은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고 평가합니다. 이 장면을 지금 우리 앞에 펼쳐 놓고 재구성해 본다면 야곱보다 에서가 훨씬 남자다워 보입니다. 장자의 명분에 연연해하지 않는 모습이 대범해 보입니다. 나중에 실제로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을 때는 동생을 죽이려고 했지만, 외삼촌 집으로 도망갔던 동생이 20년 만에 돌아왔을 때도 에서는 야곱을 혈육의 정으로 대했습니다. 에서는 폭이 넓은 사람입니다. 만약 에서와 야곱 이 두 사람이 나의 친구라면 나는 야곱보다 에서를 훨씬 더 선호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를 선하하고 보기에 어떻든지 간에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가 선호하는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록 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절). 야곱이 선하고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한 것은 아니고, 에서가 잘못이 많아서 하나님이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일방적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런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해 보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알고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으니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누구도 재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출애굽기 33장 19절을 인용하여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에서처럼 배고프다는 현실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족장 시대에 장자의 명분을 유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에서의 문제는 인간성의 문제도 아니고 부도덕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의 문제는 현실에 치우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장자의 명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고픈 것을 당장 해결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라고 한 말은 “내가 죽게 되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밥 먹여주냐?”라는 식입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먹고 마시며 배설하고 노동하며 자식을 낳고 살아야 합니다. 가능한 대로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일방적으로 떨어진 삶의 태도입니다. 허기를 채우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기 때문에 에서는 그 모든 삶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현실론자이며, 극단적인 실용주의자입니다.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 그는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함께 길을 갈 것입니다.

에서는 현대인의 한 전형입니다. 현대인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잘 알고 있는 듯이 살아갑니다. 집을 세우고, 사업을 늘리고, 건강을 체크하고, 노후를 설계하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거기에 몰두합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사냥에서 막 돌아온 에서처럼 늘 허기가 져 있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병에 걸린 듯합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각해지다 못해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정치도 기업도 대학교도 병원도 심지어 교회도 완전히 영리만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정치가도 기업인도 의사도 목사도 모두가 에서처럼 ‘내가 배고파 죽게 되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이 중요하리요’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북한이 극단적인 전형입니다. 하지만 모든 국가와 개인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에 매여 사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 마 6:3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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