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의 상대화, 사랑의 절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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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3-05-1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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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랑의 교회는 담임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 표절 문제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와중에 전임 목회자가 후임 목회자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가 인터넷에 공개되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전임자 자신이 직접 천거하여 청빙한 후임자에 대하여 적잖은 염려와 간곡한 목회적 사랑의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사적인 편지이기 때문에 그 편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 된 것은 틀림없이 후임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도 그 편지가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임자는 교회를 염려해서 진정어린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편지는 목회서신인 셈입니다.
신약의 서신서는 개인에게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교회에게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약간은 비밀스러운 편지입니다. 개인에게 프라이버시가 있듯이 가정도 교회도 나름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속사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고린도서가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다른 사람들이 읽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좋아했을 리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편지를 통해 개인의 사생활과 교회 사정이 가감 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고린도교회 문제는 사생활보호 차원에서 공개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듯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 편지가 잘 보전이 되고 널리 유포되다가 결국 정경(正經)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우리는 고린도 교회 내에 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고전 1:11, 3:3, 11:18). 바울이 전해들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성적인 부도덕(5:1-8, 6:12-20), 교인들 간의 소송 문제(6:1-11), 성찬식의 혼란(11:17-34),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논란(15:1-58) 등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질문하는 편지를 보냈었는데,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내용이 16장까지 계속됩니다. 7:1-40절까지는 기혼자들의 성관계에 대하여, 8:1-11:1절까지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12:1-14:40절까지는 은사 활용에 대하여, 16:1-4절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초대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도 이렇게 문제가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은사 문제로 생긴 분쟁에 대한 교훈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람들은 ‘사랑 장’이라고 부르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교훈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문을 읽거나 본문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나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다른 하나는 이 사랑의 실천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가지 반응 모두가 본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적 교훈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어떤 도덕적 가치로 여기는 것은 오해입니다.
본문에서 말한 대로의 사랑의 실천은 사실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지금 어떤 맥락에서 이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은 고전 12장과 14장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12장은 여러 은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14장은 방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방언은 여러 은사 중에서 고린도교회를 시끄럽게 만든 대표적인 은사입니다. 바울이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사랑을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바울은 은사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은사와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 하면서 은사는 상대적인 것이고 사랑은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 자체를 강조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도 은사 문제에 있어서는 고린도교회를 닮았습니다. 방언 하는 것, 예언하는 것, 병 고치는 것, 능력 행하는 것, 금식기도 하는 것, 성경 100독 하는 것, 제자 훈련 과정을 이수했다는 것, 전도를 많이 하는 것,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는 것,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 단기 선교 다녀오는 것, 고아나 홈리스를 돌보는 것,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것....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이 사랑에 기여할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40일 금식기도를 열 번 한 것 자체를 자랑으로 생각하지 말고 40일 금식기도를 10번 했으면 4일 금식기도 한 번 한 사람보다 100배 사랑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와 사랑을 비교하면서 사랑이 절대적임을 강조하고 은사를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사랑 없이도 은사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비밀, 지식, 믿음, 구제, 순교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사랑 없이 목사로 살 수 있고, 신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내 생일에 꽃을 사다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안아 줄 수 있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뽀뽀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생일에 꽃 사주고, 안아주고, 뽀뽀하고 옷도 사줄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것 안 하면서도 한 평생 서로 의지하고 아껴주며 살았습니다. 요즘은 생일, 결혼기념일,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온갖 명절 다 챙겨 선물하고 외식하고 여행하면서도 쉽게 이혼합니다. 그런 선물과 행위가 사랑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은사는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끝나고 맙니다. 성경, 즉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성취되면 예언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비로운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될 때 이런 신비로운 방식은 무의미합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해 감추어진 것을 아는 힘입니다. 철학, 물리학, 고고학, 경제학 등,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실 때 더 이상의 역할이 없어집니다.
바울은 은사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몇 가지 다른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와 같으며, ‘희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어린 아이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방언을 비롯한 상대적인 은사를 절대적인 양 과대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뭐 하나 잘한다고 하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잘 싸웁니다. 자기가 옳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가지지 않은 장난감 하나 가지게 되면 자기가 최고인 줄 압니다. 그게 어린아입니다. 우리가 그런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분쟁과 파당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갈렸고, 누구의 은사가 더 큰가 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심지어 성찬식 문제로 서로를 구별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미성숙하거나 인격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사 자체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것으로는 일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은사중심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람이 해야 할 일만을 강조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내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은사중심주의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좋은 것들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고, 희미한 것들이고,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의 것들입니다. 사랑에 비해 사소하고 부분적인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온전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를 상대화시킵니다. 모든 은사를 상대화 시키는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사는 이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은사일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은사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이 없다면 아예 사랑의 실천을 포기해야 할까요? 은사로 인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진다면 은사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까요? 이게 어려운 문제이지만 은사는 상대적 위치에 놓고 사랑은 절대적 위치에 두어야 합니다. 은사, 부분적인 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손상 받지 말아야 하고 다른 이들의 영혼에 손상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온전한 것, 즉 사랑에 마음을 기울이면 성령께서 도우셔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실 수 있으십니다. 상대적 은사를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은사는 절대적 사랑에 부응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8-10 -
신약의 서신서는 개인에게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교회에게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약간은 비밀스러운 편지입니다. 개인에게 프라이버시가 있듯이 가정도 교회도 나름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속사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고린도서가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다른 사람들이 읽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좋아했을 리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편지를 통해 개인의 사생활과 교회 사정이 가감 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고린도교회 문제는 사생활보호 차원에서 공개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듯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 편지가 잘 보전이 되고 널리 유포되다가 결국 정경(正經)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우리는 고린도 교회 내에 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고전 1:11, 3:3, 11:18). 바울이 전해들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성적인 부도덕(5:1-8, 6:12-20), 교인들 간의 소송 문제(6:1-11), 성찬식의 혼란(11:17-34),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논란(15:1-58) 등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질문하는 편지를 보냈었는데,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내용이 16장까지 계속됩니다. 7:1-40절까지는 기혼자들의 성관계에 대하여, 8:1-11:1절까지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12:1-14:40절까지는 은사 활용에 대하여, 16:1-4절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초대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도 이렇게 문제가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은사 문제로 생긴 분쟁에 대한 교훈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람들은 ‘사랑 장’이라고 부르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교훈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문을 읽거나 본문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나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다른 하나는 이 사랑의 실천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가지 반응 모두가 본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적 교훈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어떤 도덕적 가치로 여기는 것은 오해입니다.
본문에서 말한 대로의 사랑의 실천은 사실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지금 어떤 맥락에서 이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은 고전 12장과 14장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12장은 여러 은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14장은 방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방언은 여러 은사 중에서 고린도교회를 시끄럽게 만든 대표적인 은사입니다. 바울이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사랑을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바울은 은사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은사와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 하면서 은사는 상대적인 것이고 사랑은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 자체를 강조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도 은사 문제에 있어서는 고린도교회를 닮았습니다. 방언 하는 것, 예언하는 것, 병 고치는 것, 능력 행하는 것, 금식기도 하는 것, 성경 100독 하는 것, 제자 훈련 과정을 이수했다는 것, 전도를 많이 하는 것,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는 것,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 단기 선교 다녀오는 것, 고아나 홈리스를 돌보는 것,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것....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이 사랑에 기여할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40일 금식기도를 열 번 한 것 자체를 자랑으로 생각하지 말고 40일 금식기도를 10번 했으면 4일 금식기도 한 번 한 사람보다 100배 사랑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와 사랑을 비교하면서 사랑이 절대적임을 강조하고 은사를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사랑 없이도 은사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비밀, 지식, 믿음, 구제, 순교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사랑 없이 목사로 살 수 있고, 신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내 생일에 꽃을 사다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안아 줄 수 있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뽀뽀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생일에 꽃 사주고, 안아주고, 뽀뽀하고 옷도 사줄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것 안 하면서도 한 평생 서로 의지하고 아껴주며 살았습니다. 요즘은 생일, 결혼기념일,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온갖 명절 다 챙겨 선물하고 외식하고 여행하면서도 쉽게 이혼합니다. 그런 선물과 행위가 사랑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은사는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끝나고 맙니다. 성경, 즉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성취되면 예언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비로운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될 때 이런 신비로운 방식은 무의미합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해 감추어진 것을 아는 힘입니다. 철학, 물리학, 고고학, 경제학 등,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실 때 더 이상의 역할이 없어집니다.
바울은 은사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몇 가지 다른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와 같으며, ‘희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어린 아이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방언을 비롯한 상대적인 은사를 절대적인 양 과대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뭐 하나 잘한다고 하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잘 싸웁니다. 자기가 옳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가지지 않은 장난감 하나 가지게 되면 자기가 최고인 줄 압니다. 그게 어린아입니다. 우리가 그런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분쟁과 파당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갈렸고, 누구의 은사가 더 큰가 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심지어 성찬식 문제로 서로를 구별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미성숙하거나 인격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사 자체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것으로는 일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은사중심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람이 해야 할 일만을 강조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내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은사중심주의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좋은 것들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고, 희미한 것들이고,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의 것들입니다. 사랑에 비해 사소하고 부분적인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온전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를 상대화시킵니다. 모든 은사를 상대화 시키는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사는 이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은사일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은사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이 없다면 아예 사랑의 실천을 포기해야 할까요? 은사로 인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진다면 은사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까요? 이게 어려운 문제이지만 은사는 상대적 위치에 놓고 사랑은 절대적 위치에 두어야 합니다. 은사, 부분적인 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손상 받지 말아야 하고 다른 이들의 영혼에 손상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온전한 것, 즉 사랑에 마음을 기울이면 성령께서 도우셔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실 수 있으십니다. 상대적 은사를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은사는 절대적 사랑에 부응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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