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죽는 것도 이기적이 될까 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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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3-04-3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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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귀하다는 것을 강조할 때 목숨과 비교하는 것은 목숨이 그만큼 귀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랑이 목숨보다 귀하다고 생각하여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그 목숨은 자기의 목숨입니다. 타인을 위한 사랑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랑도 목숨을 위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고 하셨습니다. 여기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라는 뜻입니다.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목숨이 이렇게 귀한 것이라면 그 목숨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목숨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목숨을 천하게 여기거나 함부로 다루는 것은 창조 원리에도 반하고 구속의 원리에도 반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목숨을 경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독재자나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목숨이 경시되었었지만 현대는 세속화된 가치관에 의해서 스스로 목숨을 경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모두 목숨을 보존하고 풍성하게 하려는 동기에서 발전을 해 왔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목숨을 귀하게 여길 필요를 못 느낀다면 아무것도 발전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 결과 아무것도 발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현대 정신이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증거가 바로 전통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마약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중에 마약 같은 것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 반대로 극단적인 휴머니즘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친절 봉사 희생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극단적인 예를 제시하였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사람은 공명심으로 목숨을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공명심으로 순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죽음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경우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위해 죽음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을 위해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종말론적 신앙으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감정을 귀하게 여기는 인문주의적 이상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내세지향적인 신앙 때문이 아닙니다. 내세 지향적으로 사는 이들은 현세를 평가절하 합니다. 그래서 윤리도 정의도 강조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불타 없어질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세가 중요한 만큼 현세도 중요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가 있지만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현세를 무시하는 내세 지향적 신앙의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 되어도 안 되고 지나치게 현세 지향적이 되어도 안 됩니다. 내세도 중요하고 현세도 중요합니다. 내세냐 현세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내세를 현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나름대로 독특한 특징과 문화와 가치관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부지런 하고 악착같은 특징이 있는데 반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한 협조정신은 형편없습니다. 종교에 따라서 사회 윤리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가 많은 나라는 개신교회가 많은 나라보다 정직성이 떨어집니다. 프랑스나 벨지움 사회는 거짓말과 속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나라를 여행하는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프랑스나 벨지움 사람들보다 훨씬 정직합니다.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정직하기는 하지만 인색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을 놀리는 농담이 있습니다. 화란 사람들을 놀리는 농담으로는 “폭스바겐에 10명을 태우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그 답은 “차 안에 1불을 던져 놓는다.”입니다. 차 안에 1불만 던져 놓으면 10명은 거뜬히 태울 수 있다고 합니다. 1불을 서로 차지하려고 10명이 폭스바겐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놀리는 유머로는, 강도가 스코틀랜드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돈이냐 목숨이냐?”라고 위협하면 “Let me think.”라고 한답니다. 돈을 줄지 생명을 내 놓을지 생각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농담에 우리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1불을 차지하기 위해 다섯 명 밖에 탈 수 없는 폭스바겐에 10명이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니다. 극단적으로는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확률로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이 도박인데 거기에 집착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사람처럼 우리 모두는 목숨이냐 돈이냐 라는 상황에서 조차 “Let me think.”라고 합니다. 돈이냐 목숨이냐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생각해 보고 갈등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심지어 절대 가치와 사소한 이익이 상치될 때조차 우리는 갈등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죽는다면 그것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들은 바울이 옥에 갇힌 것 때문에 담력을 얻어 더욱 열심히 전도했고 바울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이들은 바울을 괴롭히기 위해 더욱 열심히 전도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로 인해 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는데 바울은 그 두 반응 모두를 인하여 기뻐합니다. 그 두 가지 반응에 대한 바울의 평가와 대응에서 바울은 전혀 자신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자신의 자존심과 느낌과 이익을 고려해서 평가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고 나에게 손해가 되면 나쁜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기분을 나쁘게 하면 나쁜 놈, 내 기분을 좋게 하면 좋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한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부흥하는 일 때문에 유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죽는 것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는 것이 더 좋고 죽는 것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바울 개인으로는 죽는 것이 더 나은데, 사는 것이 복음의 열매를 맺는 일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는 사는 것이 좋고 자신을 위해서는 죽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둘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끼고 있습니다. 죽는 것을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그것을 택하는 것이 이기적이 될까봐 염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살기를 원하지만 바울은 죽음을 사는 것보다 선호하였습니다. 그에게 사는 것은 의무요 차선입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하다면 나타나게 될 신앙의 태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이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많은 염려와 갈등과 문제들이 풀어질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 빌립보서 1:21-22 -
모든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목숨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목숨을 천하게 여기거나 함부로 다루는 것은 창조 원리에도 반하고 구속의 원리에도 반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목숨을 경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독재자나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목숨이 경시되었었지만 현대는 세속화된 가치관에 의해서 스스로 목숨을 경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모두 목숨을 보존하고 풍성하게 하려는 동기에서 발전을 해 왔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목숨을 귀하게 여길 필요를 못 느낀다면 아무것도 발전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 결과 아무것도 발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현대 정신이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증거가 바로 전통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마약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중에 마약 같은 것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 반대로 극단적인 휴머니즘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친절 봉사 희생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극단적인 예를 제시하였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사람은 공명심으로 목숨을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공명심으로 순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죽음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경우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위해 죽음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을 위해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종말론적 신앙으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감정을 귀하게 여기는 인문주의적 이상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내세지향적인 신앙 때문이 아닙니다. 내세 지향적으로 사는 이들은 현세를 평가절하 합니다. 그래서 윤리도 정의도 강조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불타 없어질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세가 중요한 만큼 현세도 중요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가 있지만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현세를 무시하는 내세 지향적 신앙의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 되어도 안 되고 지나치게 현세 지향적이 되어도 안 됩니다. 내세도 중요하고 현세도 중요합니다. 내세냐 현세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내세를 현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나름대로 독특한 특징과 문화와 가치관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부지런 하고 악착같은 특징이 있는데 반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한 협조정신은 형편없습니다. 종교에 따라서 사회 윤리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가 많은 나라는 개신교회가 많은 나라보다 정직성이 떨어집니다. 프랑스나 벨지움 사회는 거짓말과 속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나라를 여행하는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프랑스나 벨지움 사람들보다 훨씬 정직합니다.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정직하기는 하지만 인색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을 놀리는 농담이 있습니다. 화란 사람들을 놀리는 농담으로는 “폭스바겐에 10명을 태우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그 답은 “차 안에 1불을 던져 놓는다.”입니다. 차 안에 1불만 던져 놓으면 10명은 거뜬히 태울 수 있다고 합니다. 1불을 서로 차지하려고 10명이 폭스바겐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놀리는 유머로는, 강도가 스코틀랜드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돈이냐 목숨이냐?”라고 위협하면 “Let me think.”라고 한답니다. 돈을 줄지 생명을 내 놓을지 생각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농담에 우리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1불을 차지하기 위해 다섯 명 밖에 탈 수 없는 폭스바겐에 10명이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니다. 극단적으로는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확률로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이 도박인데 거기에 집착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사람처럼 우리 모두는 목숨이냐 돈이냐 라는 상황에서 조차 “Let me think.”라고 합니다. 돈이냐 목숨이냐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생각해 보고 갈등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심지어 절대 가치와 사소한 이익이 상치될 때조차 우리는 갈등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죽는다면 그것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들은 바울이 옥에 갇힌 것 때문에 담력을 얻어 더욱 열심히 전도했고 바울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이들은 바울을 괴롭히기 위해 더욱 열심히 전도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로 인해 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는데 바울은 그 두 반응 모두를 인하여 기뻐합니다. 그 두 가지 반응에 대한 바울의 평가와 대응에서 바울은 전혀 자신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자신의 자존심과 느낌과 이익을 고려해서 평가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고 나에게 손해가 되면 나쁜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기분을 나쁘게 하면 나쁜 놈, 내 기분을 좋게 하면 좋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한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부흥하는 일 때문에 유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죽는 것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는 것이 더 좋고 죽는 것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바울 개인으로는 죽는 것이 더 나은데, 사는 것이 복음의 열매를 맺는 일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는 사는 것이 좋고 자신을 위해서는 죽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둘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끼고 있습니다. 죽는 것을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그것을 택하는 것이 이기적이 될까봐 염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살기를 원하지만 바울은 죽음을 사는 것보다 선호하였습니다. 그에게 사는 것은 의무요 차선입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하다면 나타나게 될 신앙의 태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이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많은 염려와 갈등과 문제들이 풀어질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 빌립보서 1: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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