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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독선적 진리의 포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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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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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에서는 참으로 끔직한 종교 간의 갈등과 싸움과 처절했던 피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싸움은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되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긴장이 계속되는 동안 서로는 서로에게 테러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 동안 테러로 인하여 3,170명이 사망하고 36,68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30년 전쟁도 역시 신교와 구교 간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시작은 종교전쟁이었지만 점점 권력과 영역주권에 대한 국제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싸우고 있는 나라가 많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그렇고,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리카에서도 종교 간의 갈등은 곧잘 살육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한민국만큼 종교 간의 긴장이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신교는 신교대로 구교는 구교대로 별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잘 지냅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긴장이 심했던 구라파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는 그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에 피차 싸울 필요가 없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종교다원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태적으로 종교다원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처음부터 신교나 구교 간에, 혹은 기독교와 불교 간에 충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생태적으로 종교다원주의적인 대한민국에 종교다원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목회자가 wcc 좋다고 했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대처하는 것을 보면 신학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여러 다른 신학사상과 건전하지 못한 운동에 대처할 때 스스로 표방하는 신학을 시금석으로 활용할 능력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한 때는 보수교회들이 신정통주의나 신복음주의도 거부했지만 그런 신학사상이 자기들이 표방하는 신학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한 확신에서가 아니라 심정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평가하게 되는 이유는 그러한 신학이 낳은 포용주의와 은사주의와 세속주의가 보수교회들에게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릇된 신학과 사상과 운동이 교회의 저항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환영받고 있습니다. 그런 위험을 간파하고 안 된다고 했던 사람들은 융통성 없는 사람들이라고 교회가 외면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절에 가서 기도드리는 수녀들이 있고, 교회에 내려와서 염불을 하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그런 것을 아주 성숙한 종교의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스님들이 교회에 내려와 추리를 만들어 다는 일을 도와주고, 4월 초8일이 되면 수녀들이 절에 가서 연등 만드는 일을 도와줍니다. 개신교에도 그렇게 하는 목사님들과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웃에 사는 불교인이 김치를 담그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종교개혁자 칼빈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절에 가서 염불에 참여하는 것이나 스님이 교회당에 와서 염불을 하는 것은 예수님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으로 나는 믿습니다.

이런 예가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내가 노점에서 6불짜리 물건 6개를 샀습니다. 6x6=36이니까 36불을 내면 됩니다. 그런데 장사하는 아주머니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40불을 주면서 “4불은 그냥 두십시오.”라고 하여습니다. 그것은 너그러운 것입니다. 관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아주머니가 6불짜리 6개를 계산하면서 6X6=39라고 우기면 그것은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6X6=36을 마음이 너그럽다고 하여 “6X6=39도 될 수 있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36불과 39불은 불과 3불 차이입니다. 하지만 내가 6X6=36이니까 절대로 6X6=39가 될 수 없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목사가 그렇게 융통성이 없느냐고 하면서 비난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 내가 목사지, 목사가 양보해야지”라고 하면서 “6X6=39가 맞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요?

과학도 일종의 진리라고 할 수 있지만 과학이나 진리를 세우는 일에 포용성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과학자나 진리를 믿고 전하는 자의 일상의 삶에서는 너그러움과 포용성이 요구되지만 진리 자체를 세우고 전하는 일을 포용성 같은 것으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진리란 그 특성이 독단적이고 비타협적입니다. 타협을 하면 진리일 수 없습니다. 6X6=36이 6X6=39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과도 대치할 수 없는 분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운 신학이나 사상이나 태도를 나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그러움과 융통성을 보일 영역은 많습니다. 진리 이외의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양보할 수 있어야 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 하나를 절대 양보 못하는 대신에 그 외의 모든 것에서는 불신자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희생과 양보를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가 증거하고 전해야 할 진리의 복음은 철저히 배타적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태도와 인격까지 배타적이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뿐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나타내야 할 포용성이며 너그러움입니다. 진리는 추상같아야 하고 인품은 춘풍 같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예수의 영향력을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바로 그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죽으려고 환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용기는 거저 단순히 두려움을 모른다는 의미의 용기가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물로 뛰어드는 담대함입니다. 진리를 증거하고 선포함에 있어서는 이런 종류의 담대함이 요구됩니다. 불교에도 뭔가가 있을 것이고, 유교에도 인간에게 유익한 뭔가가 있을 것이고, 이슬람에도 뭔가가 있겠지만 구원 얻는 진리는 예수를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복음 진리의 배타성은 남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한 없이 독선적이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포용성으로 우리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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