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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세상에 유익을 끼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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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2-10-28

본문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든지 아니면 마음에 상처를 주든지 손해를 끼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받기를 바라기 보다는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 한 마디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을 합니다. 특별히 선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냥 자기의 일을 착하고 성실히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큰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덕을 보기도 하고 그의 성실함과 정직함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는 경우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진정한 유익을 주어야 하고 기독교인 역시 그래야 합니다. 나는 가끔 내가 어릴 때 다니던 시골 교회를 생각합니다. 내가 다니던 시골 교회는 믿는 신자들에게뿐 아니라 마을 불신자들에게도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져서 마을에 미신이 없어졌습니다. 성경을 가르쳐서 문맹이 퇴치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의식이 깨어 부지런해져서 마을 골목과 우물이 청결하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귀신이 쫓겨나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병든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병을 고쳤습니다.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온 동네 가가호호에 떡을 나눠주었습니다. 음식이 귀하던 시절 떡 한 봉지는 여간 고마운 것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교회가 불신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릇된 관습과 게으름이 기독교 신자들에 의해 고쳐졌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가르치고 계몽시키는 선구자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가 세상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경영학이 도입되고, 경제학이 들어왔습니다. 세상 문화가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배에 세속 문화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세상을 가르치고 계몽시켰던 교회가 세상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면 세상을 가르칠 수 있고 계몽시킬 수 있어서 세상에 큰 유익이 되었지만, 교회가 세상의 것을 배우게 되면 교회에도 치명적 해가 되고, 그 결과 교회가 사회에 아무 것도 줄 것이 없게 됩니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이 갖지 못한 교회의 진정한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교회가 세상이 갖고 있는 힘을 조금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힘 같은 것으로는 교회가 세상에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베드로가 길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병든 자를 메고 와서 베드로가 지나가는 길에 누이고 그 그림자라도 그 위로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불신자들까지 사도들을 줄줄 따라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가면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줄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실제적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향력으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영향력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자세와 가치관을 가진 생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염려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우습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 자체가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초대교회 사도나 신자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향에는 오랫동안 애를 써서 세운 집이 있고, 재산이 있고, 가족이 있고, 친척이 있고, 친구가 있고, 삶의 터전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아브라함에게 힘이었고 의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는 것은 자기의 의지하는 것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와 친척과 재물과 집 대신에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의지를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도록 하시면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 때 그 결과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조카 롯이 덕을 보았고,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덕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처럼 사도들처럼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나라에 유익을 끼쳐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를 통해 이웃이 덕을 보고 사회가 안정되고 교회가 든든히 서가야 합니다.

벤허(Ben Hur)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 이 영화 안 보신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벤’은 아들이라는 뜻이고 ‘허’는 성경에 ‘훌’이라는 사람의 영어식 이름입니다. 벤허(Judah Ben-Hur)는 주후 26년경 로마 제국 시대에 예루살렘의 제일가는 유태 귀족이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오는데, 신임 총독 일행에 주둔 사령관으로 벤허의 옛 친구인 멧살라도 함께 옵니다. 그러나 옛날과는 달리 그들은 로마와 이스라엘의 적대적인 상황에 의해 우정에 금이 갑니다. 다음날 신임 총독의 부임 축하 행진 중에 벤허 여동생의 실수로 기왓장이 총독의 머리에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멧살라는 사고 인 줄 알면서도 유대인의 계획적인 음모라고 하여 벤허 가족을 잡아들입니다.

결국 어머니 미리암과 누이 티자와 애인 에스더는 감옥에 보내지고 재산은 몰수당한 채 벤허는 노예로 팔려 갑니다. 그로부터 5년 후 벤허는 죽음의 노예 함선을 저으며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벤허가 젓는 배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습니다. 배가 깨어지고 침몰하자 아리우스 제독은 간신히 나무 널판 조각 하나를 붙들고 살아납니다. 하지만 전쟁에 패한 줄 알고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 때 벤허가 말려서 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아군의 배가 와서 구출을 받아서 살아납니다. 그 때 함대 사령관 아리우스 제독이 벤허를 돌아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너를 구하기 위하여 로마에 승리를 주었구나.”

가슴을 찡하게 하는 말입니다. 불신자의 눈에도 하나님께서 벤허를 살리기 위해서 로마에 승리를 주었다고 보였습니다. 그 장면에서 모든 관객들은 함대 사령관 아리우스보다 큰 벤허로 인하여 믿음의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드라마에서 이 같은 역할을 잘 소화해 내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소망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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