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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케 하는 직분과 소외(疏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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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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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疏外, alienation)란 사회과학에서 자신의 주변, 노동 및 노동의 산물, 자아로부터 멀어지거나 분리된 듯한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상식적 의미로서의 소외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위 왕따를 당하거나 무관심의 대상이 될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구 사상에서조차 소외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19세기 때부터 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켕, 페르디난트 퇴니에스, 막스 베버, 게오르크 지멜의 사회학에 소외개념이 암시적 또는 명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중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소외개념이 가장 유명합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의 산물은 타인이 전유(專有)함으로써 노동자를 소외시키고, 노동자 자신은 노동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폴란드의 철학자 아담 샤프(Adam Schaff)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소외에 대한 정의를 잘 내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에 의하면 “소외란 인간의 행동결과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자기를 만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후일 마르크스를 비판하다가 폴란드에서 추방당하여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이 소외 개념은 현대 사회생활을 분석하는 데 많이 이용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의미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무력감:자신의 운명이 자기 스스로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외적인 힘이나 숙명, 또는 운이나 제도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듯한 느낌, ② 무의미성:세상사나 대인관계와 같은 모든 활동영역에서의 이해가능성 또는 일관된 의미의 부재, 또는 삶에 대한 전반적인 목적상실감 등, ③ 무규범성:공유된 사회적 행위규범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광범위한 비행의 확산, 불신, 무제한적인 개인의 경쟁 등을 초래하는 것, ④ 문화적 소외:사회의 기존가치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듯 한 감정으로, 예를 들면 관습적인 제도에 대한 지식인이나 학생들의 저항에서 볼 수 있는 감정, ⑤ 사회적 고립:사회적 관계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나 배척 감, 즉 소수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고립감, ⑥ 자기소외:정의 하기가 가장 어려운 개념으로서 여러 가지 점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괴리감이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외 현상은 성경적 입장에서 볼 때 창조된 본래의 모습이 아니고 인간의 범죄 때문에 일그러진(deformed) 상태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개발한 모든 것이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창조의 본래의 모습이 일그러진 상태에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인간은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그 문명까지도 결국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문명이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현상을 사회학자들은 소외라고 본 것입니다. 자동차, 비행기, 핵, 의약품 등 거의 모든 과학의 발전과 제도가 인간의 고통을 덜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인간에 의해서 통제 되지 않는 힘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문명이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혁(reformed)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복음은 일그러진 상태를 본래대로 되돌려 놓는 것 이상이지만 소외를 제거할 유일한 대안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소외란 죄의 결과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모든 고통과 불안과 두려움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물과 인간 문명이 인간에게 소외로 작용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부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일그러진 현상을 치료하기 위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증거로서 성도 상호 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소외 현상이 교회 안에서조차 심화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밖에서까지 치료자의 사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소외 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 직분자들이 소외 현상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옥에서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교회가 바울이 로마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에게 에바브로디도를 보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가 보낸 물질을 가지고 바울에게 가서 잘 도와줍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중병에 결렸습니다. 그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빌립보교회가 듣고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빌립보교회가 알게 된 것 때문에 또 걱정을 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나 빌립보교회 모두를 다 걱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어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나았다는 소식과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 준 도움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인사와 자신의 소송 사건에 대한 소식도 전하려고 디모데를 보냅니다. 디모데가 가면 에바브로디도의 소식과 바울의 소식도 잘 전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직접 보내려 합니다. 그 이유는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교회와의 관계가 특별히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인 것을 배려해서입니다. 빌립보교회가 말로 듣는 것보다 건강하게 된 에바브로디도의 모습을 직접보고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자기 곁에 남겨 두면 여러 가지로 유익하겠지만 빌립보교회를 먼저 생각하여 그리하였습니다. 이것이 화목한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를 지키는 일이고, 둘째는 성도 간의 화목입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의 문제이고, 화목은 성도 간의 수평적 관계에서의 문제입니다. 진리를 고수하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바로 되지 않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고, 그 수직적 관계는 성도 간의 수평적 관계로 입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선 진리의 말씀 위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 간의 화목으로서 진리 위에 바로 서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바른 교회는 그 교회가 외적으로 어떤 활동을 얼마나 크게 하느냐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 위에 바로 서서 성도의 화목을 이루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 간의 화목을 이루려면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목적은 같은데 방법에서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서로 양보하지 못하여 다투고 싸우는 것은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이익이나 만족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성도가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다투고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자기 마음으로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화목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서부터 희생하고 양보하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소한 일로도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까지 삼가야 합니다. 오히려 사소한 일로도 다른 사람의 마음과 이익을 배려해야 합니다. 시기는 미움을 낳고 교만은 분쟁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사랑을 낳고 배려는 화목을 낳고 화목은 평화를 낳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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