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의 낭중지추-囊中之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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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07-08-1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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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故事成語)에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국시대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인 평원군(平原君:趙勝)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救援軍)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천(自薦)하고 나섰습니다. "대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다시 평원군이 말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 끝이 밖으로 튀어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것은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 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毛遂)를 20번째 수행원으로 뽑았습니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 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낭중지추란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인데, 곧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나지만 나쁜 점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겉으로는 진실한 것처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거짓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거짓은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진실 된 마음이든 거짓된 마음이든 속에 있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거짓은 숨기려고 하는 것으로 정체를 드러내어 거짓말의 필요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지만 진실은 침묵해도 웅변을 능가하는 설득력을 나타냅니다. 거짓은 사람을 추하고 악하게 만들지만 진실은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위엄 있게 합니다.
화려한 겉모습, 언뜻 보아 신령한 것 같고 인격적인 것 같은 소위 지도급 인사들의 뒷주머니를 뚫고 나온 송곳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명분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영적, 도덕적으로 파산한 이들이 교회 안에도 왜 이리 많은지, 이런 자들과 단순히 세속적 깊은 관련을 끊지 못해 진리를 배척하고 교회를 훼방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한 없이 어리석고 불쌍한 이들이 있습니다. 거짓과 편법으로 지혜를 삼는 지도자들, 진리와 정당성에 대한 고려 없이 패거리 의식으로 교회 안에서 분탕질을 하는 직분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복하려는 테러리스터들이 분명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직이 있어야 하고 모든 언행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정직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필요에 따라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하면 편할 텐데 굳이 정직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직하게 사는 것은 힘듭니다.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슬쩍 슬쩍 속이면 우선은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굳이 정직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말과 속이는 것이 나쁜 것은 그 결과가 모두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속이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아무리 이름 있는 목사나 유력한 장로나 재능 있는 집사라고 하여도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것으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는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정직함과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정직한 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겉으로만 진실한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는 진실을 원하십니다.
시편 51:6절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라고 하였는데, 진실함은 그 성격상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드러내고 떠드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로 보아 자랑하고 자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자는 진실 된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 선생은 어릴 적에 아버지가 아끼던 벼루를 깨트렸습니다. 그 때 하인들이 안중근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깼다고 할 테니까 도련님은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하인들의 그 제안에 “내가 깼는데 왜 너희들이 깼다고 하느냐?”며 하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려서 호되게 매를 맞았습니다. 하인들이 안타깝다는 듯이 매를 맞고 난 안중근에게 말했습니다. “도련님, 우리가 깨트렸다고 하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얼마나 아프십니까?”라고 위로하자 어린 안중근이 그랬다고 합니다. “다리는 아프다만 마음은 편하다.” 깊이 새겨 볼 말입니다.
정직을 위해서는 불편한 것을 좀 감수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않게 사는 것은 쉽습니다. 적당히 거짓말 하고 적당히 나쁜 짓 하고 사람들을 속이고 살면 우선은 쉽습니다. 하지만 쉽다고 정직하지 않게 살고 거짓말 하고 남을 속이는 것은 똑똑한 것 같지만 그게 바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우선은 불편합니다. 시간이 더 걸리고, 돈도 손해보고, 속도 상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하는 데는 목적이 없습니다. 정직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정직하면 복 받고 잘 된다는 어떤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복을 못 받아도 정직해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짓고 몹시도 괴로워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죄이기 때문에 숨기고 싶었습니다. 부하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여자가 임신을 하자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고 남편의 아이로 믿게 하기 위해서 전장에 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자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가 전쟁 중인데 편하게 아내와 잘 수 없다고 하면서 밖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윗은 그 계략이 실패하자 우리아를 고의로 극렬한 전장에 고립시켜 죽게 하였습니다. 자기 손으로가 아니라 적군의 손을 빌어 부하를 죽였습니다. 죄를 숨기려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죄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적인 살인까지 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았을 때 모든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파렴치하고 악랄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정직한 회개를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에 다윗의 이름이 880개절에 1043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정직한 내 종 다윗”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다윗 이후에 많은 악한 왕들이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악한 왕들을 꾸짖으실 때 내 종 다윗같이 정직하지 않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누구나 죄를 짓지만 정직한 회개를 하기보다는 남을 탓하기가 쉽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죄를 범한 것에 대하여 아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거짓됨과 가증함과 속됨을 인정했습니다. 자기의 거짓이 탄로 난 후에 어떻게 될까를 걱정하는 것은 정직이 아닙니다. 사울은 그 점을 염려하다가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기뻐하시는 데 우리는 거짓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을 원하시는데 우리에게는 정직이 없고 진실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 하면 진실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였습니다. 다윗은 죄를 감추는 것은 미련함이고 죄를 고백하는 것은 지혜로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비록 죄를 범하였지만 신속하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놀라운 결단입니다. 축복의 결단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보다 귀한 결단입니다. 그 회개의 결단을 통해 다윗은 성경적 인간 실존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하였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시편 51:10). 여기 “창조”라는 말에 우리가 주의하여야 합니다. 창조란 본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실은 본래 우리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진실과 정직이란 본래 내 마음 속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셔야 합니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셔야 합니다.
정직은 복원 근원입니다. 정직은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불행의 씨앗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너무도 잘 아는 영국 속담입니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라. 한 해를 행복하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 동안 행복하려면 정직하여라.”
숨은 진실과 정직은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낭중지추(囊中之錐)되어 드러날 것이고, 다윗이 “정직한 다윗”이라는 별명을 얻었듯이 우리 또한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 “정직한 아무개”라는 별명을 얻는 것이 참 영예와 복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절-
전국시대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인 평원군(平原君:趙勝)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救援軍)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천(自薦)하고 나섰습니다. "대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다시 평원군이 말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 끝이 밖으로 튀어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것은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 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毛遂)를 20번째 수행원으로 뽑았습니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 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낭중지추란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인데, 곧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나지만 나쁜 점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겉으로는 진실한 것처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거짓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거짓은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진실 된 마음이든 거짓된 마음이든 속에 있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거짓은 숨기려고 하는 것으로 정체를 드러내어 거짓말의 필요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지만 진실은 침묵해도 웅변을 능가하는 설득력을 나타냅니다. 거짓은 사람을 추하고 악하게 만들지만 진실은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위엄 있게 합니다.
화려한 겉모습, 언뜻 보아 신령한 것 같고 인격적인 것 같은 소위 지도급 인사들의 뒷주머니를 뚫고 나온 송곳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명분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영적, 도덕적으로 파산한 이들이 교회 안에도 왜 이리 많은지, 이런 자들과 단순히 세속적 깊은 관련을 끊지 못해 진리를 배척하고 교회를 훼방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한 없이 어리석고 불쌍한 이들이 있습니다. 거짓과 편법으로 지혜를 삼는 지도자들, 진리와 정당성에 대한 고려 없이 패거리 의식으로 교회 안에서 분탕질을 하는 직분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복하려는 테러리스터들이 분명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직이 있어야 하고 모든 언행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정직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필요에 따라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하면 편할 텐데 굳이 정직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직하게 사는 것은 힘듭니다.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슬쩍 슬쩍 속이면 우선은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굳이 정직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말과 속이는 것이 나쁜 것은 그 결과가 모두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속이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아무리 이름 있는 목사나 유력한 장로나 재능 있는 집사라고 하여도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것으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는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정직함과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정직한 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겉으로만 진실한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는 진실을 원하십니다.
시편 51:6절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라고 하였는데, 진실함은 그 성격상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드러내고 떠드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로 보아 자랑하고 자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자는 진실 된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 선생은 어릴 적에 아버지가 아끼던 벼루를 깨트렸습니다. 그 때 하인들이 안중근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깼다고 할 테니까 도련님은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하인들의 그 제안에 “내가 깼는데 왜 너희들이 깼다고 하느냐?”며 하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려서 호되게 매를 맞았습니다. 하인들이 안타깝다는 듯이 매를 맞고 난 안중근에게 말했습니다. “도련님, 우리가 깨트렸다고 하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얼마나 아프십니까?”라고 위로하자 어린 안중근이 그랬다고 합니다. “다리는 아프다만 마음은 편하다.” 깊이 새겨 볼 말입니다.
정직을 위해서는 불편한 것을 좀 감수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않게 사는 것은 쉽습니다. 적당히 거짓말 하고 적당히 나쁜 짓 하고 사람들을 속이고 살면 우선은 쉽습니다. 하지만 쉽다고 정직하지 않게 살고 거짓말 하고 남을 속이는 것은 똑똑한 것 같지만 그게 바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우선은 불편합니다. 시간이 더 걸리고, 돈도 손해보고, 속도 상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하는 데는 목적이 없습니다. 정직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정직하면 복 받고 잘 된다는 어떤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복을 못 받아도 정직해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짓고 몹시도 괴로워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죄이기 때문에 숨기고 싶었습니다. 부하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여자가 임신을 하자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고 남편의 아이로 믿게 하기 위해서 전장에 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자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가 전쟁 중인데 편하게 아내와 잘 수 없다고 하면서 밖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윗은 그 계략이 실패하자 우리아를 고의로 극렬한 전장에 고립시켜 죽게 하였습니다. 자기 손으로가 아니라 적군의 손을 빌어 부하를 죽였습니다. 죄를 숨기려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죄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적인 살인까지 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았을 때 모든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파렴치하고 악랄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정직한 회개를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에 다윗의 이름이 880개절에 1043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정직한 내 종 다윗”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다윗 이후에 많은 악한 왕들이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악한 왕들을 꾸짖으실 때 내 종 다윗같이 정직하지 않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누구나 죄를 짓지만 정직한 회개를 하기보다는 남을 탓하기가 쉽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죄를 범한 것에 대하여 아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거짓됨과 가증함과 속됨을 인정했습니다. 자기의 거짓이 탄로 난 후에 어떻게 될까를 걱정하는 것은 정직이 아닙니다. 사울은 그 점을 염려하다가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기뻐하시는 데 우리는 거짓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을 원하시는데 우리에게는 정직이 없고 진실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 하면 진실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였습니다. 다윗은 죄를 감추는 것은 미련함이고 죄를 고백하는 것은 지혜로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비록 죄를 범하였지만 신속하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놀라운 결단입니다. 축복의 결단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보다 귀한 결단입니다. 그 회개의 결단을 통해 다윗은 성경적 인간 실존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하였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시편 51:10). 여기 “창조”라는 말에 우리가 주의하여야 합니다. 창조란 본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실은 본래 우리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진실과 정직이란 본래 내 마음 속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셔야 합니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셔야 합니다.
정직은 복원 근원입니다. 정직은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불행의 씨앗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너무도 잘 아는 영국 속담입니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라. 한 해를 행복하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 동안 행복하려면 정직하여라.”
숨은 진실과 정직은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낭중지추(囊中之錐)되어 드러날 것이고, 다윗이 “정직한 다윗”이라는 별명을 얻었듯이 우리 또한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 “정직한 아무개”라는 별명을 얻는 것이 참 영예와 복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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