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민을 통해 한국교회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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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7-07-2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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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년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물위로 걸었지만 의심을 하다가 빠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걷다가 빠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베드로니까 그 정도라도 가능했지 아무나 물 위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12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확신을 얻은 이 청년은 베드로의 실패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의심하다가 빠졌지만 나는 의심하지 않고 물위를 걸으리라 마음먹고 강으로 달려가서 물 위로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다음 뛰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물 위로 걷기는커녕 수영도 잘 못하는 터라 구조대원이 건져주지 않았다면 죽을 뻔 하였습니다. 은근히 화가 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자기는 “믿습니다.”하고 물로 뛰어 들었는데 빠지고 말았으니 성경이 거짓말을 한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그 청년에게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하시면서 “혹시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시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이 아니라고 하자 목사님은 “그러니까 빠졌지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라고 해서 걸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는 우스개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면 물 위를 걷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 많은 청년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 순응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연 질서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만약 인간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대박 중의 대박일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바로 그런 것으로 시험하였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시험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 수 없으니까 시험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시험이 됩니다. 만약에 그 때 예수님께서 마귀의 말을 듣고 돌로 떡을 만드시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아마도 오늘 날의 교계가 공상과학영화의 무대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경우가 많은데 교인들이 모두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교회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분이시지만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지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집에 가셨을 때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시험 받으실 때 돌로 떡을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떤 때는 이적과 표적을 행하시고 어떤 때는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의 고민을 통해 한국교회를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초자연적인 능력을 생각할 때 그분께는 아무런 고민도 없어야 됩니다. 고민이란 극심한 불안과 근심을 동반한 걱정하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함과 로마의 정치적 힘이 결탁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발버둥 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싸운다고 하여도 승산이 있는 싸움이 못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고민하신 이유가 십자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십자가가 예수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역부족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민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보여주셨듯이 초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이 보낸 군졸들에게 체포되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들고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께서는 힘이 부족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체포하고 심문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단번에 물리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적들을 물리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민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민에는 그를 믿는 신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하는가 하는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신 것은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고 겁이 나서가 아닙니다. 물론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겁이 나서 고민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당하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결심입니다. 그렇다면 왜 고민하고 슬퍼하셨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몰랐다고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임을 아시고 계셨을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실례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데 꼭 십자가여야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고민은 승리에 대한 세상적 잣대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다름을 보여줍니다. 세상적 승리는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것입니다. 적이 나보다 강한 상태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보다 내가 더 강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힘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 증거가 능력 있기 위해서는 물리적 힘이 강하든지, 돈이 많든지, 권세가 높든지, 학문이 깊든지, 수단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권세를 추구하고, 돈을 추구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물리적 힘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은 가시적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매력이 대단합니다. 대중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런 것의 매력에 매료됩니다.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이런 점을 이용하여 가시적 효과를 노립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방법이라는 확신까지 가집니다.
지난 24일 한국의 이어령 씨가 나이 75세에 세례를 받은 것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어령 씨는 한국의 두란노 교회가 일본 복음화를 위한 문화선교집회인 “러브소나타 도쿄대회” 현장에서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문화부 장관을 지냈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저명인사를 선교집회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집회를 주최하는 측의 의도대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 교회의 교회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목적이 수단이 되는 실수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성례는 거룩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세례와 성찬은 지극히 구별된 의식입니다. 세례의 의미 중에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선교 집회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이어령 씨는 세례를 받은 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아직 교회를 나가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신자가 된 것을 받아들일 교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의 신앙고백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어떤 교회가 그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교회는 또 다른 실수를 하는 셈이 됩니다. 동기가 선하고 옳다고 하여 어떤 방법이든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선교 집회에서 교회를 다니지도 않는 유명인사에게 세례를 주는 깜짝 이벤트가 선교 전략상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 사려 깊지 못한 실수입니다. 선교라는 선한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기 위한 고민 없이 확신과 열심만을 앞세우고 가시적 효과의 극대화만을 생각했기에 이런 기획을 하게 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아무리 확신이 있고 동기가 순수해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확 뚫린 신작로가 아닙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믿음은 용맹이 아닙니다. 용감한 것으로 말하자면 테러리스트들처럼 용감한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폭탄 조끼를 입고 버스를 폭파시키고, 폭탄을 가득 실은 차를 몰고 건물로 돌진하여 자폭합니다. 이런 무모함이 믿음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 샘물교회 의료봉사자들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게 억류되어 있고 한 분 목사님은 그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현지 선교사의 편지에 의하면 그 의료봉사 팀이 지나가다가 납치된 길은 아침에 이동을 해야 안전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숱한 단기 선교 팀이 다녀갔지만 그 안전 수칙을 지킨 팀이 없다고 합니다. 그 수많은 단기 선교 팀이 안전수칙을 안 지켰지만 별 사고가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샘물교회 의료봉사 팀이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의료 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야 순수하고 희생적인 분들일 것입니다. 그런 위험 지역에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것은 여간한 희생적 결심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 어려운 일은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숭고한 희생적 봉사자들이 인질로 잡혀 있고 죽기도 하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한국교회의 선교와 봉사를 뒤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처럼 그동안의 한국 교회는 명분과 실적에만 집착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선교와 봉사에 있어서 비둘기처럼 순수했는지는 모르지만 뱀처럼 지혜롭지 못한 점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샘물교회 의료봉사 팀의 납치사건도 봉사활동에 참가한 당사자들보다는 선교 기관과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1일자 뉴욕타임스는 한국인이 납치대상이 된 원인들 중의 하나는 작년 8월에 시도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에서의 평화대행진이라고 꼬집었습니다. 1천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평화행진’을 시도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서울출범식에서 노무현 정부가 테러를 빙자하여 선교를 막는다고 하면서 종교탄압 중단하라고 하며 카불에서의 평화행진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행사에 일천 교회 이상이 참가하였고 실제로 1200명 이상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까지 갔다가 추방당했습니다. 그 사건이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탈레반 세력에게까지 반감을 사게 한 것이 한국인들이 납치대상이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뉴욕 타임스의 지적입니다.
샘물교회 봉사단이 인천 공항을 떠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이 위험지역이라는 정부의 홍보 플래카드 아래서 기념사진을 찍고 떠났다는 사실도 사람들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합니다. 그들의 용감성은 위험한 지역이라고 선교를 안 하고 봉사를 안 하는 것은 비급한 행동이라는 강력한 메시지 같았습니다. 또 하나 한국인들만의 특이한 배짱이 납치를 자초하였다고 보여 지는 것은 모 선교 팀이 샘물교회 의료봉사 팀에게 위험한 루터로 가라고 충고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게 보면 두려워하지 말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격려이기도 하겠으나 나쁘게 보면 영웅심을 부추긴 것입니다. 어려운 자들을 돕겠다는 순수한 젊은이들의 열정일지라도 용기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는 고민도 있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PPP 십자가 대행진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판문점을 거처 평양까지 십자가 대행진을 한다는 계획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면 가장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북한에 기독교인들이 떼를 십자가를 앞세우고 행진을 한다는 것입니다. 2005년 8월 8-10일까지 예루살렘에서도 평화대행진을 했고, 지난해에는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에서도 하려고 했다가 추방당했는데 또 다시 평양에서의 십자가 대행진을 하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이미 대형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의 용감성을 드러내는지는 몰라도 현지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선교의 문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를 잘 하고 있던 선교사들까지 철수해야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대형 선교집회는 일본인들의 반감을 살 뿐 아니라 일본교회도 싫어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특별히 용감해서인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는 위험한 곳만 골라서 평화행진이니 선교대회니 하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복음이 전파되면 된다는 식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주님은 왜 고민하셨겠습니까?
선한 일과 옳은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지 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고민하고 슬퍼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용감하기만 합니다.
주님의 고민은 능력이 없어서 하는 고민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번에 적들을 때려 부술 수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세력을 무력화 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혀 놓고 대못을 땅땅 박을 때 “아, 시원하다. 못을 몇 개 더 박아라!”라고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십자가를 세웠을 때 “왜 이런 걸로 사람을 성가시게 하니”하시고 사뿐히 뛰어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바랐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 15:29-32).
한국 교회 같으면 지금 하는 것으로 보아 십자가에서 얼른 내려와 능력을 과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내게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확신 없이는 그 능력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정당한 권한이 있어도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 권한을 쓰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던 적이 많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 9:4-6).
권한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배고픔과 고난과 실패의 길을 자처함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고민하시고 슬퍼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신앙의 태도와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8,39-
하지만 물 위로 걷기는커녕 수영도 잘 못하는 터라 구조대원이 건져주지 않았다면 죽을 뻔 하였습니다. 은근히 화가 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자기는 “믿습니다.”하고 물로 뛰어 들었는데 빠지고 말았으니 성경이 거짓말을 한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그 청년에게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하시면서 “혹시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시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이 아니라고 하자 목사님은 “그러니까 빠졌지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라고 해서 걸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는 우스개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면 물 위를 걷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 많은 청년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 순응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연 질서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만약 인간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대박 중의 대박일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바로 그런 것으로 시험하였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시험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 수 없으니까 시험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시험이 됩니다. 만약에 그 때 예수님께서 마귀의 말을 듣고 돌로 떡을 만드시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아마도 오늘 날의 교계가 공상과학영화의 무대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경우가 많은데 교인들이 모두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교회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분이시지만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지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집에 가셨을 때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시험 받으실 때 돌로 떡을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떤 때는 이적과 표적을 행하시고 어떤 때는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의 고민을 통해 한국교회를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초자연적인 능력을 생각할 때 그분께는 아무런 고민도 없어야 됩니다. 고민이란 극심한 불안과 근심을 동반한 걱정하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함과 로마의 정치적 힘이 결탁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발버둥 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싸운다고 하여도 승산이 있는 싸움이 못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고민하신 이유가 십자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십자가가 예수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역부족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민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보여주셨듯이 초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이 보낸 군졸들에게 체포되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들고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께서는 힘이 부족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체포하고 심문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단번에 물리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적들을 물리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민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민에는 그를 믿는 신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하는가 하는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신 것은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고 겁이 나서가 아닙니다. 물론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겁이 나서 고민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당하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결심입니다. 그렇다면 왜 고민하고 슬퍼하셨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몰랐다고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임을 아시고 계셨을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실례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데 꼭 십자가여야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고민은 승리에 대한 세상적 잣대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다름을 보여줍니다. 세상적 승리는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것입니다. 적이 나보다 강한 상태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보다 내가 더 강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힘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 증거가 능력 있기 위해서는 물리적 힘이 강하든지, 돈이 많든지, 권세가 높든지, 학문이 깊든지, 수단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권세를 추구하고, 돈을 추구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물리적 힘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은 가시적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매력이 대단합니다. 대중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런 것의 매력에 매료됩니다.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이런 점을 이용하여 가시적 효과를 노립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방법이라는 확신까지 가집니다.
지난 24일 한국의 이어령 씨가 나이 75세에 세례를 받은 것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어령 씨는 한국의 두란노 교회가 일본 복음화를 위한 문화선교집회인 “러브소나타 도쿄대회” 현장에서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문화부 장관을 지냈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저명인사를 선교집회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집회를 주최하는 측의 의도대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 교회의 교회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목적이 수단이 되는 실수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성례는 거룩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세례와 성찬은 지극히 구별된 의식입니다. 세례의 의미 중에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선교 집회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이어령 씨는 세례를 받은 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아직 교회를 나가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신자가 된 것을 받아들일 교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의 신앙고백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어떤 교회가 그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교회는 또 다른 실수를 하는 셈이 됩니다. 동기가 선하고 옳다고 하여 어떤 방법이든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선교 집회에서 교회를 다니지도 않는 유명인사에게 세례를 주는 깜짝 이벤트가 선교 전략상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 사려 깊지 못한 실수입니다. 선교라는 선한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기 위한 고민 없이 확신과 열심만을 앞세우고 가시적 효과의 극대화만을 생각했기에 이런 기획을 하게 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아무리 확신이 있고 동기가 순수해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확 뚫린 신작로가 아닙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믿음은 용맹이 아닙니다. 용감한 것으로 말하자면 테러리스트들처럼 용감한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폭탄 조끼를 입고 버스를 폭파시키고, 폭탄을 가득 실은 차를 몰고 건물로 돌진하여 자폭합니다. 이런 무모함이 믿음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 샘물교회 의료봉사자들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게 억류되어 있고 한 분 목사님은 그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현지 선교사의 편지에 의하면 그 의료봉사 팀이 지나가다가 납치된 길은 아침에 이동을 해야 안전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숱한 단기 선교 팀이 다녀갔지만 그 안전 수칙을 지킨 팀이 없다고 합니다. 그 수많은 단기 선교 팀이 안전수칙을 안 지켰지만 별 사고가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샘물교회 의료봉사 팀이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의료 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야 순수하고 희생적인 분들일 것입니다. 그런 위험 지역에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것은 여간한 희생적 결심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 어려운 일은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숭고한 희생적 봉사자들이 인질로 잡혀 있고 죽기도 하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한국교회의 선교와 봉사를 뒤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처럼 그동안의 한국 교회는 명분과 실적에만 집착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선교와 봉사에 있어서 비둘기처럼 순수했는지는 모르지만 뱀처럼 지혜롭지 못한 점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샘물교회 의료봉사 팀의 납치사건도 봉사활동에 참가한 당사자들보다는 선교 기관과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1일자 뉴욕타임스는 한국인이 납치대상이 된 원인들 중의 하나는 작년 8월에 시도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에서의 평화대행진이라고 꼬집었습니다. 1천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평화행진’을 시도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서울출범식에서 노무현 정부가 테러를 빙자하여 선교를 막는다고 하면서 종교탄압 중단하라고 하며 카불에서의 평화행진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행사에 일천 교회 이상이 참가하였고 실제로 1200명 이상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까지 갔다가 추방당했습니다. 그 사건이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탈레반 세력에게까지 반감을 사게 한 것이 한국인들이 납치대상이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뉴욕 타임스의 지적입니다.
샘물교회 봉사단이 인천 공항을 떠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이 위험지역이라는 정부의 홍보 플래카드 아래서 기념사진을 찍고 떠났다는 사실도 사람들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합니다. 그들의 용감성은 위험한 지역이라고 선교를 안 하고 봉사를 안 하는 것은 비급한 행동이라는 강력한 메시지 같았습니다. 또 하나 한국인들만의 특이한 배짱이 납치를 자초하였다고 보여 지는 것은 모 선교 팀이 샘물교회 의료봉사 팀에게 위험한 루터로 가라고 충고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게 보면 두려워하지 말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격려이기도 하겠으나 나쁘게 보면 영웅심을 부추긴 것입니다. 어려운 자들을 돕겠다는 순수한 젊은이들의 열정일지라도 용기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는 고민도 있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PPP 십자가 대행진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판문점을 거처 평양까지 십자가 대행진을 한다는 계획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면 가장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북한에 기독교인들이 떼를 십자가를 앞세우고 행진을 한다는 것입니다. 2005년 8월 8-10일까지 예루살렘에서도 평화대행진을 했고, 지난해에는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에서도 하려고 했다가 추방당했는데 또 다시 평양에서의 십자가 대행진을 하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이미 대형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의 용감성을 드러내는지는 몰라도 현지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선교의 문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를 잘 하고 있던 선교사들까지 철수해야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대형 선교집회는 일본인들의 반감을 살 뿐 아니라 일본교회도 싫어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특별히 용감해서인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는 위험한 곳만 골라서 평화행진이니 선교대회니 하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복음이 전파되면 된다는 식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주님은 왜 고민하셨겠습니까?
선한 일과 옳은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지 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고민하고 슬퍼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용감하기만 합니다.
주님의 고민은 능력이 없어서 하는 고민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번에 적들을 때려 부술 수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세력을 무력화 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혀 놓고 대못을 땅땅 박을 때 “아, 시원하다. 못을 몇 개 더 박아라!”라고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십자가를 세웠을 때 “왜 이런 걸로 사람을 성가시게 하니”하시고 사뿐히 뛰어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바랐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 15:29-32).
한국 교회 같으면 지금 하는 것으로 보아 십자가에서 얼른 내려와 능력을 과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내게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확신 없이는 그 능력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정당한 권한이 있어도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 권한을 쓰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던 적이 많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 9:4-6).
권한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배고픔과 고난과 실패의 길을 자처함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고민하시고 슬퍼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신앙의 태도와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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