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갱신, 열린 예배, 예배 회복의 목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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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7-07-1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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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설날에 어른들께 찾아가서 세배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본래 세배란 신에게 무사형통을 기원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조상 숭배를 거처 살아있는 어른들에게 존경의 뜻으로 축원을 담아 절을 올리는 것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배를 하는 사람은 축원으로“만수무강하십시오.”,“백수상수 하십시오.”,“금년에는 사업이 더욱 번창하십시오.”라는 뼈?합니다. 이 때 세배를 받는 어른은 아랫사람에게 덕담을 하고 세배상을 내리거나 세뱃돈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배를 할 때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예를 갖추어 하는 것입니다. 몸을 깨끗이 씻고, 이발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어른께 존경하는 마음으로 세배를 합니다. 세배의 유래가 비성경적이긴 하지만 어른을 존경하는 미풍양속으로 정착을 하게 되어 기독교에서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설날 뉴스를 전하던 앵커가 고향을 찾아가는 자녀들의 손에 들린 선물 꾸러미를 뇌물성 보따리라고 하였습니다. 세배하러 가는 자식들이 부모님께 잘 보여서 유산을 더 많이 받으려고 준비한 뇌물성 선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옛 말에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세배에는 마음이 없고 유산에만 마음이 있다는 비뚤여진 세배 행태를 꼬집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저도 어릴 때 세배를 많이 다녔는데 어른들을 존경하는 마음보다는 “세배상”에 관삼이 많았습니다. 그 때는 세뱃돈을 주는 분도 없었고 받았다는 아이들도 없었기 때문에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배상이라고 해야 아이들에게는 콩 볶은 것이나 강냉이 튀긴 것을 한 주머니씩 넣어주었습니다. 엿을 주는 집도 있고, 콩강정, 과 등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연세 높으신 노인들에게 세배를 하러 가면 묵이나 떡국을 차려 내곤 하였습니다. 그 때도 세배상을 기대하고 세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세배상은 한 그릇 떡국이나 묵 같은 것이었기에 문제될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자녀들이 유산을 바라고 선물 보따리를 들고 세배하러 가는 것은 물질의 위력 앞에 미풍양속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도 없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나 공경하는 마음보다 부모의 재물을 탐내는 것은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자녀들의 그런 속셈을 눈치 챈 부모의 마음은 세배가 전혀 기쁘지 않을 뿐 아니라 괘씸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께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참 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최고의 존경과 높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신자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불신자가 예배에 참여하면 안 된다거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자가 비록 하나님을 모르고 예배가 무엇인지 몰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고 그 자신에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불신자가 예배에 참여하여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불신자 중심이 아니라 신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되고, 복음이 증거되지만 예배는 전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가 전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전도를 등한시 하는 것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전도의 수단으로 생각하면 진정한 예배의 뜻이 왜곡 되어 예배와 전도를 다 그르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전도의 수단으로서의 예배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예배에서 은혜(?) 받기를 기대합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지도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생략 하겠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큰 감격과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을 체험하기도 하고 큰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받는 것이 예배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못 받아도 그것 가지고 예배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란 이미 은혜 받은 자들이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못마땅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지나치게 은혜 받는 것에 집착하는 태도 때문에 너무나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그의 백성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서 은혜 받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예배의 목적에서 빗나가게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신자는 이미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통하여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데 모든 관심과 정성과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요즘 열린 예배와 예배 갱신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런 경향의 운동을 확산시킨 것은
첫째, John Wimber를 중심으로 시작된 빈야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야드 운동의 기원은 플러신학교에서 친분을 맺어 왔던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와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의 설립목사인 존 윔버, 그리고 빈야드(Vineyard)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된 교회의 목사인 켄 걸릭슨(Kenn Gulliksen)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표적과 기사가 규범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표적과 기사는 “그 나라로 통하는 전화카드”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전도에는 능력이 뒤따라야 하며, 단순한 복음 선포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능력전도를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표적을 보여주고 들려 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에는 진기한 광경이 일어납니다. 기이한 울음, 웃음, 진동, 극심한 공포, 환상, 넘어짐(혹은 종종 '성령 안에서의 죽음'-being slain in the Spirit-이라 불리는 것), 성령에 취함, 그리고 그 외 다른 체험이 계속되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성령 임재의 증거라고 합니다. 이들은 합리적인 서구사상을 배격하고 신비한 동양적인 세계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치유와 예언은 배워서 습득하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신이라기보다는 능력의 원천으로, 인격체가 아닌 힘으로, 혹은 힘의 공급자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능력에 매혹되어 복음의 실제 내용에 대한 관심을 등한시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보다 실용주의에 빠졌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체험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게 취급합니다.
둘째,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도자 예배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미국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와 새들백 교회에서 시작된 불신자를 중심으로 한 예배의 형태입니다. 예배의 형식이 전통적인 예전의 틀을 벗고, 자유로운 옷차림, 일상적인 말투, 비디오상영, 연극, 뮤지컬, CCM찬양 등 다양한 형태의 접근을 통해 “보여주는 예배의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경배와 찬양 운동입니다. 이것 또한 말씀 중심적인 전통적 예배의 형식을 깨고 찬양 중심적인 예배의 형태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세속음악에 빠져가는 젊은 층들에게 좋은 안내자 역할을 감당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지만 기존예배와의 이질화 및 이원화를 심화시켰고, 예배용 찬송가를 소홀히 하거나 유행에 뒤진다는 식의 인식을 심어 줌으로 기존 예배에 소극적인 자세를 낳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성경을 공부하며 어려운 교리와 씨름하던 젊은이들을 노래하는 젊은이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젊은 청년 대학생들이 교회에 모여 몇 시간씩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당연히 성경공부는 소홀히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운동과 경향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인간 중심의 예배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배는 사람이 고안하거나 발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인격적인 교제로 자신을 제공하시고 그의 백성인 우리는 그 크신 은혜에 응답하는 클라이맥스가 예배입니다. 개혁교회의 표지는“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에는 당연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교회의 표지가 “인간을 기쁘게 하고 인간의 만족을 찾는” 인본주의적인 예배로 변하고 있습니다.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실재는 인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예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 예배 갱신이나 열린 예배를 강조하게 된 요인은 교인 수 감소에 따른 위기감 때문입니다. 예배 갱신이나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최종적으로 교회의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교회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 갱신이나 열린 예배를 강조하는 이들이 결국은 교회의 수적 성장을 염두에 둔 방법론 차원에서의 예배를 생각하는 것은 정 궤도를 벗어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교회의 수적 성장의 수단으로 변질 되면 교회 성장 방법론이 메시지를 만드는 상황으로 가게 됩니다.
그 결과 진리와 테크닉을 혼동하게 되고 목회자는 대기업의 CEO와 같이 능력 있는 경영자가 되어야 성공한 목회자로 평가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이론이나 열린 예배의 이론은 다 같이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곧 사람의 필요와 현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배의 갱신에 있어서 Text보다 Context에서 출발하여 하나님보다 인간에게 먼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드라마가 도입되고 인도자는 말씀 선포가 아닌 토크 쇼 사회자처럼 대화식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열린 예배는 회중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보여주는 예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배의 관심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더욱 민감하게 좇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보다 참되게 섬기고 예배할 것인가에 대한 바른 예배에 대한 동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회중에게 더 흥미로운 예배를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교회들의 예배모습에서도 은사중심의 예배, 부흥회식 감정주의 예배, 열린 예배 등이 분별없이 받아들여지고 혼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이 믿고 확신하는 데로 예배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립니다.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된 바른 신학과 교리를 무시하고 감상적이 되어가고 예배가 단순한 인간의 축제 모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하는 것 같으나 결국 사람을 해치는 인본주의와 같습니다. 인간의 필요를 사회학적 차원에서 찾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려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인간의 욕구는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인간을 망하게 하려는 사단의 술수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예배가 인간의 그릇된 욕구에 부응하게 되어 인위적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하여 온갖 수단이 동원되는 것은 심히 염려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절
그런데 몇 년 전 설날 뉴스를 전하던 앵커가 고향을 찾아가는 자녀들의 손에 들린 선물 꾸러미를 뇌물성 보따리라고 하였습니다. 세배하러 가는 자식들이 부모님께 잘 보여서 유산을 더 많이 받으려고 준비한 뇌물성 선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옛 말에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세배에는 마음이 없고 유산에만 마음이 있다는 비뚤여진 세배 행태를 꼬집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저도 어릴 때 세배를 많이 다녔는데 어른들을 존경하는 마음보다는 “세배상”에 관삼이 많았습니다. 그 때는 세뱃돈을 주는 분도 없었고 받았다는 아이들도 없었기 때문에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배상이라고 해야 아이들에게는 콩 볶은 것이나 강냉이 튀긴 것을 한 주머니씩 넣어주었습니다. 엿을 주는 집도 있고, 콩강정, 과 등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연세 높으신 노인들에게 세배를 하러 가면 묵이나 떡국을 차려 내곤 하였습니다. 그 때도 세배상을 기대하고 세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세배상은 한 그릇 떡국이나 묵 같은 것이었기에 문제될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자녀들이 유산을 바라고 선물 보따리를 들고 세배하러 가는 것은 물질의 위력 앞에 미풍양속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도 없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나 공경하는 마음보다 부모의 재물을 탐내는 것은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자녀들의 그런 속셈을 눈치 챈 부모의 마음은 세배가 전혀 기쁘지 않을 뿐 아니라 괘씸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께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참 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최고의 존경과 높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신자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불신자가 예배에 참여하면 안 된다거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자가 비록 하나님을 모르고 예배가 무엇인지 몰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고 그 자신에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불신자가 예배에 참여하여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불신자 중심이 아니라 신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되고, 복음이 증거되지만 예배는 전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가 전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전도를 등한시 하는 것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전도의 수단으로 생각하면 진정한 예배의 뜻이 왜곡 되어 예배와 전도를 다 그르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전도의 수단으로서의 예배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예배에서 은혜(?) 받기를 기대합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지도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생략 하겠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큰 감격과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을 체험하기도 하고 큰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받는 것이 예배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못 받아도 그것 가지고 예배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란 이미 은혜 받은 자들이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못마땅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지나치게 은혜 받는 것에 집착하는 태도 때문에 너무나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그의 백성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서 은혜 받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예배의 목적에서 빗나가게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신자는 이미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통하여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데 모든 관심과 정성과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요즘 열린 예배와 예배 갱신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런 경향의 운동을 확산시킨 것은
첫째, John Wimber를 중심으로 시작된 빈야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야드 운동의 기원은 플러신학교에서 친분을 맺어 왔던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와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의 설립목사인 존 윔버, 그리고 빈야드(Vineyard)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된 교회의 목사인 켄 걸릭슨(Kenn Gulliksen)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표적과 기사가 규범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표적과 기사는 “그 나라로 통하는 전화카드”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전도에는 능력이 뒤따라야 하며, 단순한 복음 선포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능력전도를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표적을 보여주고 들려 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에는 진기한 광경이 일어납니다. 기이한 울음, 웃음, 진동, 극심한 공포, 환상, 넘어짐(혹은 종종 '성령 안에서의 죽음'-being slain in the Spirit-이라 불리는 것), 성령에 취함, 그리고 그 외 다른 체험이 계속되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성령 임재의 증거라고 합니다. 이들은 합리적인 서구사상을 배격하고 신비한 동양적인 세계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치유와 예언은 배워서 습득하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신이라기보다는 능력의 원천으로, 인격체가 아닌 힘으로, 혹은 힘의 공급자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능력에 매혹되어 복음의 실제 내용에 대한 관심을 등한시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보다 실용주의에 빠졌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체험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게 취급합니다.
둘째,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도자 예배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미국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와 새들백 교회에서 시작된 불신자를 중심으로 한 예배의 형태입니다. 예배의 형식이 전통적인 예전의 틀을 벗고, 자유로운 옷차림, 일상적인 말투, 비디오상영, 연극, 뮤지컬, CCM찬양 등 다양한 형태의 접근을 통해 “보여주는 예배의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경배와 찬양 운동입니다. 이것 또한 말씀 중심적인 전통적 예배의 형식을 깨고 찬양 중심적인 예배의 형태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세속음악에 빠져가는 젊은 층들에게 좋은 안내자 역할을 감당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지만 기존예배와의 이질화 및 이원화를 심화시켰고, 예배용 찬송가를 소홀히 하거나 유행에 뒤진다는 식의 인식을 심어 줌으로 기존 예배에 소극적인 자세를 낳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성경을 공부하며 어려운 교리와 씨름하던 젊은이들을 노래하는 젊은이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젊은 청년 대학생들이 교회에 모여 몇 시간씩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당연히 성경공부는 소홀히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운동과 경향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인간 중심의 예배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배는 사람이 고안하거나 발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인격적인 교제로 자신을 제공하시고 그의 백성인 우리는 그 크신 은혜에 응답하는 클라이맥스가 예배입니다. 개혁교회의 표지는“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에는 당연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교회의 표지가 “인간을 기쁘게 하고 인간의 만족을 찾는” 인본주의적인 예배로 변하고 있습니다.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실재는 인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예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 예배 갱신이나 열린 예배를 강조하게 된 요인은 교인 수 감소에 따른 위기감 때문입니다. 예배 갱신이나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최종적으로 교회의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교회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 갱신이나 열린 예배를 강조하는 이들이 결국은 교회의 수적 성장을 염두에 둔 방법론 차원에서의 예배를 생각하는 것은 정 궤도를 벗어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교회의 수적 성장의 수단으로 변질 되면 교회 성장 방법론이 메시지를 만드는 상황으로 가게 됩니다.
그 결과 진리와 테크닉을 혼동하게 되고 목회자는 대기업의 CEO와 같이 능력 있는 경영자가 되어야 성공한 목회자로 평가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이론이나 열린 예배의 이론은 다 같이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곧 사람의 필요와 현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배의 갱신에 있어서 Text보다 Context에서 출발하여 하나님보다 인간에게 먼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드라마가 도입되고 인도자는 말씀 선포가 아닌 토크 쇼 사회자처럼 대화식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열린 예배는 회중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보여주는 예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배의 관심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더욱 민감하게 좇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보다 참되게 섬기고 예배할 것인가에 대한 바른 예배에 대한 동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회중에게 더 흥미로운 예배를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교회들의 예배모습에서도 은사중심의 예배, 부흥회식 감정주의 예배, 열린 예배 등이 분별없이 받아들여지고 혼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이 믿고 확신하는 데로 예배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립니다.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된 바른 신학과 교리를 무시하고 감상적이 되어가고 예배가 단순한 인간의 축제 모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하는 것 같으나 결국 사람을 해치는 인본주의와 같습니다. 인간의 필요를 사회학적 차원에서 찾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려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인간의 욕구는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인간을 망하게 하려는 사단의 술수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예배가 인간의 그릇된 욕구에 부응하게 되어 인위적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하여 온갖 수단이 동원되는 것은 심히 염려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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