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에 복음을 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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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7-06-1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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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 뻬째르 브르그에 에르미타즈 궁이 있습니다. 에르미타즈 궁은 뻬째르 황제의 겨울 궁전입니다. 그곳에 말로만 듣던 황금마차가 있었습니다. 온통 궁전 전체가 황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궁전 여기저기는 황금으로 만들어졌고 장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궁전 안에는 16-17세기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에르미타즈 궁에 가면 16세기의 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 중의 하나인 “탕자의 귀환”이라는 그림을 꼭 보라고 누군가 일러주었습니다.
렘브란트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입니다. 회화 650점, 동판화 200점, 데생 200점, 그 밖에도 수백 점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이 천재 화가가 직접 그린 진품 그림을 본다는 생각에 그림을 잘 모르는 나였지만 약간은 가슴 설레는 것을 느꼈습니다. 실물보다 약간 큰 것 같은 그림 앞에서 그 그림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다른 사람보다 좀 오래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헨리 뉴우웬(Henri J. M. Nouwen)이라는 분은 이 그림 한 점을 감상하기 위해 1년을 넘게 날마다 그곳에 가서 그림 앞에 앉아서 혹은 서서, 자리와 위치를 바꾸어가며 그 그림을 감상하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화란 노트르담 대학, 예일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치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 그림 한 점에서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감동적으로 담겨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그림 한 점에 4복음서의 내용이 담겨 있고 구원의 진리가 담겨 있음을 보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어떻게 한 폭의 그림에 복음의 내용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요?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라이덴 시에 있는 한 방앗간 주인의 여섯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렘브란트는, 형들은 다들 기술을 배워 생활전선으로 나섰지만 그는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학문에는 흥미를 잃고 미술에 심취하여 대학을 중퇴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한 미술 공부로 26세에 그의 천재성이 빛을 보게 되어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스키아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무절제하였습니다.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으로 렘브란트를 교육하였으나 그가 부와 명예를 얻자 그의 생활은 더욱 무절제하게 되었습니다. 과분한 집을 사고, 지나친 소비로 빚에 쪼들리게 되었고, 처갓집의 고소로 아내의 지참금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아내와 세 아이를 얻었지만 불행하게도 둘째 딸이 태어나자 첫째 아들이 죽고, 셋째 딸이 태어나자 둘째 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1640년에는 셋째 딸이 죽었습니다.
그 무렵 그가 마음으로 그렇게도 의지해 오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642년에는 그가 깊이 사랑하던 아내 사스키아 마저 죽었습니다. 그 후 그는 생후 아홉 달 되는 아들과 단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들 양육을 위하여 데려온 유모 헤이르체르와의 불행한 관계는 여러 차례 법정 소송을 거쳐 그녀를 보호시설에 감금함으로서 끝이 났습니다. 그 후 그가 헨드리케 스토펠스와 재혼하여 평온을 되찾았으나 재혼한지 10년 만에 그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픔과 슬픔을 삭이며 배 다른 남매를 키우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아들 타이타스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그에게 따른 혹독한 시련은 탕자가 겪은 바로 그 시련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우여곡절의 역정을 겪었습니다. 명예를 누릴 때의 그의 자화상은 화려한 모자에 비싼 옷을 걸친 거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방탕하였고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었으며 윤리적 타락은 밑바닥 인생의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한 짓거리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생활은 그대로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기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탕자처럼 살았던 그가 모든 것을 다 잃고 그의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무렵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탕자인 자신이 죄인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이 그림에 담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죄인인 탕자 아들을 받아주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한 폭의 그림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둘러선 몇몇 사람들과 그들의 표정과 의상과 모습과 명암을 통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적인 복음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귀향이란 말의 의미는 떠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집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즉 멀리 갔다가 다시 복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렘브란트는 그 자신이 처절한 탕자의 경험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에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귀향을 환영하는 아버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아버지의 이 큰 기쁨은 용서와 평안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되어 탕자 아들의 커다란 슬픔과 깊은 회한을 일순간 다 상쇄시켜버렸습니다. 복음,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가 얼마나 나쁜 죄인인가를 깨닫는 깊이만큼 체험하고 깨닫게 되는 듯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5,6절-
렘브란트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입니다. 회화 650점, 동판화 200점, 데생 200점, 그 밖에도 수백 점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이 천재 화가가 직접 그린 진품 그림을 본다는 생각에 그림을 잘 모르는 나였지만 약간은 가슴 설레는 것을 느꼈습니다. 실물보다 약간 큰 것 같은 그림 앞에서 그 그림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다른 사람보다 좀 오래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헨리 뉴우웬(Henri J. M. Nouwen)이라는 분은 이 그림 한 점을 감상하기 위해 1년을 넘게 날마다 그곳에 가서 그림 앞에 앉아서 혹은 서서, 자리와 위치를 바꾸어가며 그 그림을 감상하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화란 노트르담 대학, 예일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치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 그림 한 점에서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감동적으로 담겨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그림 한 점에 4복음서의 내용이 담겨 있고 구원의 진리가 담겨 있음을 보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어떻게 한 폭의 그림에 복음의 내용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요?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라이덴 시에 있는 한 방앗간 주인의 여섯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렘브란트는, 형들은 다들 기술을 배워 생활전선으로 나섰지만 그는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학문에는 흥미를 잃고 미술에 심취하여 대학을 중퇴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한 미술 공부로 26세에 그의 천재성이 빛을 보게 되어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스키아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무절제하였습니다.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으로 렘브란트를 교육하였으나 그가 부와 명예를 얻자 그의 생활은 더욱 무절제하게 되었습니다. 과분한 집을 사고, 지나친 소비로 빚에 쪼들리게 되었고, 처갓집의 고소로 아내의 지참금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아내와 세 아이를 얻었지만 불행하게도 둘째 딸이 태어나자 첫째 아들이 죽고, 셋째 딸이 태어나자 둘째 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1640년에는 셋째 딸이 죽었습니다.
그 무렵 그가 마음으로 그렇게도 의지해 오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642년에는 그가 깊이 사랑하던 아내 사스키아 마저 죽었습니다. 그 후 그는 생후 아홉 달 되는 아들과 단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들 양육을 위하여 데려온 유모 헤이르체르와의 불행한 관계는 여러 차례 법정 소송을 거쳐 그녀를 보호시설에 감금함으로서 끝이 났습니다. 그 후 그가 헨드리케 스토펠스와 재혼하여 평온을 되찾았으나 재혼한지 10년 만에 그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픔과 슬픔을 삭이며 배 다른 남매를 키우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아들 타이타스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그에게 따른 혹독한 시련은 탕자가 겪은 바로 그 시련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우여곡절의 역정을 겪었습니다. 명예를 누릴 때의 그의 자화상은 화려한 모자에 비싼 옷을 걸친 거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방탕하였고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었으며 윤리적 타락은 밑바닥 인생의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한 짓거리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생활은 그대로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기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탕자처럼 살았던 그가 모든 것을 다 잃고 그의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무렵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탕자인 자신이 죄인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이 그림에 담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죄인인 탕자 아들을 받아주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한 폭의 그림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둘러선 몇몇 사람들과 그들의 표정과 의상과 모습과 명암을 통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적인 복음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귀향이란 말의 의미는 떠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집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즉 멀리 갔다가 다시 복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렘브란트는 그 자신이 처절한 탕자의 경험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에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귀향을 환영하는 아버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아버지의 이 큰 기쁨은 용서와 평안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되어 탕자 아들의 커다란 슬픔과 깊은 회한을 일순간 다 상쇄시켜버렸습니다. 복음,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가 얼마나 나쁜 죄인인가를 깨닫는 깊이만큼 체험하고 깨닫게 되는 듯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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