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 못하는 ‘시간’에 대하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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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6-12-2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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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시간을 계산하는 겁(劫)이라는 단위가 있습니다. 이 시간의 단위는 우주의 생장과 소멸을 설명하는 데 적용되는 시간입니다. 우주가 생성되어 가는 성겁(成劫), 생성된 우주가 지속되는 주겁(住劫), 우주가 소멸되어 가는 괴겁(壞劫), 소멸된 끝에 결국 아무 것도 없는 공무(空無)의 상태가 지속되는 공겁(空劫)으로 나눕니다. 우주는 바로 이러한 네 단계의 겁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는 것이 불교의 설명입니다.
겁의 반대 개념으로서 가장 짧은 시간을 찰나라고 합니다. 두 남자가 마주 보며 5,000가닥의 명주실의 양쪽 끝을 잡아당기고, 제3의 남자가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그 실을 자를 때, 한 가닥의 명주실이 잘리는 동안 64찰나의 시간이 흐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찰나에 비해 겁이란 우리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개념입니다. 하늘에 살고 있는 선녀가 천년에 한 번 지상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오는 못이 있는데 그 못가에 길이와 높이가 40리나 되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선녀가 천년에 한 번식 목욕하러 내려올 때마다 선녀의 비단옷이 그 바위를 스치는데 그 커다란 바위가 선녀의 옷깃에 스쳐서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한 겁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억겁이라고 하면 그런 시간이 억 번 반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순환적 시간관이 만들어 낸 이런 시간의 개념에서 생각하면 사람의 일생이란 참으로 덧없이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억겁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길이의 시간 개념으로서 ‘영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이란 시간으로 잴 수 없는 시간 밖의 상태를 시간적 의미로 이해하기 위한 표현일 뿐 엄격한 의미에서 시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역사 안의 시간을 겁이란 단위로 세며 억겁을 이야기 하는 순환적 시간관은 인간을 한없이 무력하게 할만도 할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순환적 시간관의 영향아래서는 모두가 과거 지향적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고 느끼는 것도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과 같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탈레스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공자도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겁이라는 시간 개념에서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는 미래 지향적인 생각은 어쩌면 가능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간관에서는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돌고 도는 순환적 시간관에서는 발전이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을 개선하려는 의욕도 없고 무엇을 발전시켜야겠다는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또한 과거가 더 좋았다는 가치관 때문에 우리가 발전이라고 하는 것도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관의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나라가 불교나 유교나 힌두교 국가입니다. 이런 나라들 중에는 비위생적이고 미신적이고 게으르고 그릇된 윤리와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장실도 없고, 우물도 없고, 공중도덕이라는 것도 없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환생의 이론은 죽음을 새로 태어나는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를 않습니다. 더럽고 비위생적인 환경을 조금만 노력하면 개선할 수 있는데 개선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약을 쓰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온갖 배설물을 마구 흘러 보내면서 그 물에 몸을 씻고 그 물을 마십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못 느끼고 비참하게 살도록 한 것은 순환적 시간관에 영향을 받은 과거 지향적 가치관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병들고 일그러진 자연과 사회와 인간관계를 개선할 책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인간 상호간의 책임임과 동시에 창조주에 대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독 신자는 부지런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무엇보다 정직해야 합니다. 집안을 깨끗이 해야 하고 음식을 정갈하게 위생적으로 만들어 먹어야 합니다. 몸도 깨끗이 씻어야 하고 옷도 단정히 입어야 합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오염물질도 가능한 한 덜 배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고 계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으시고 산과 들과 강과 바다와 우물과 저수지와 논과 밭과 나무와 풀과 공기까지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시고 계십니다. 물론 자연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사회나 자연이나 점점 나빠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좋게 하시려고 악인에게도 공평한 일반은총을 베풀어 차별 없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십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간이 해야 할 일은 내일 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란 변화의 형식이다.”라고 했다는데, 우리 신자에게는 시간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보다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과 세월을 아껴 사는 지혜와 성실이 절실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
겁의 반대 개념으로서 가장 짧은 시간을 찰나라고 합니다. 두 남자가 마주 보며 5,000가닥의 명주실의 양쪽 끝을 잡아당기고, 제3의 남자가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그 실을 자를 때, 한 가닥의 명주실이 잘리는 동안 64찰나의 시간이 흐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찰나에 비해 겁이란 우리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개념입니다. 하늘에 살고 있는 선녀가 천년에 한 번 지상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오는 못이 있는데 그 못가에 길이와 높이가 40리나 되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선녀가 천년에 한 번식 목욕하러 내려올 때마다 선녀의 비단옷이 그 바위를 스치는데 그 커다란 바위가 선녀의 옷깃에 스쳐서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한 겁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억겁이라고 하면 그런 시간이 억 번 반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순환적 시간관이 만들어 낸 이런 시간의 개념에서 생각하면 사람의 일생이란 참으로 덧없이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억겁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길이의 시간 개념으로서 ‘영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이란 시간으로 잴 수 없는 시간 밖의 상태를 시간적 의미로 이해하기 위한 표현일 뿐 엄격한 의미에서 시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역사 안의 시간을 겁이란 단위로 세며 억겁을 이야기 하는 순환적 시간관은 인간을 한없이 무력하게 할만도 할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순환적 시간관의 영향아래서는 모두가 과거 지향적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고 느끼는 것도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과 같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탈레스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공자도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겁이라는 시간 개념에서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는 미래 지향적인 생각은 어쩌면 가능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간관에서는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돌고 도는 순환적 시간관에서는 발전이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을 개선하려는 의욕도 없고 무엇을 발전시켜야겠다는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또한 과거가 더 좋았다는 가치관 때문에 우리가 발전이라고 하는 것도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관의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나라가 불교나 유교나 힌두교 국가입니다. 이런 나라들 중에는 비위생적이고 미신적이고 게으르고 그릇된 윤리와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장실도 없고, 우물도 없고, 공중도덕이라는 것도 없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환생의 이론은 죽음을 새로 태어나는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를 않습니다. 더럽고 비위생적인 환경을 조금만 노력하면 개선할 수 있는데 개선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약을 쓰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온갖 배설물을 마구 흘러 보내면서 그 물에 몸을 씻고 그 물을 마십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못 느끼고 비참하게 살도록 한 것은 순환적 시간관에 영향을 받은 과거 지향적 가치관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병들고 일그러진 자연과 사회와 인간관계를 개선할 책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인간 상호간의 책임임과 동시에 창조주에 대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독 신자는 부지런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무엇보다 정직해야 합니다. 집안을 깨끗이 해야 하고 음식을 정갈하게 위생적으로 만들어 먹어야 합니다. 몸도 깨끗이 씻어야 하고 옷도 단정히 입어야 합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오염물질도 가능한 한 덜 배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고 계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으시고 산과 들과 강과 바다와 우물과 저수지와 논과 밭과 나무와 풀과 공기까지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시고 계십니다. 물론 자연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사회나 자연이나 점점 나빠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좋게 하시려고 악인에게도 공평한 일반은총을 베풀어 차별 없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십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간이 해야 할 일은 내일 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란 변화의 형식이다.”라고 했다는데, 우리 신자에게는 시간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보다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과 세월을 아껴 사는 지혜와 성실이 절실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
댓글목록
asdf님의 댓글
asdf
이래서 개독소리 듣는겁니다^^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위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