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이론(對立理論)의 필요와 위험성
페이지 정보
황상하 ㆍ2006-10-02관련링크
본문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절대적인 것을 상대화시키므로 사람들에게 전통적 가치의 혼란을 겪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정신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마저 도전을 받으며 인간의 윤리적 바탕 또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불신자가 절대적인 하나님과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짙을수록 별이 빛나듯이 참 신자는 절대적 진리까지 상대화 된 시대일수록 더욱 희소가치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절대적인 것의 가치를 높이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상대적인 것을 상대화 하는 것인 줄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자라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될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예를 들면 기쁨과 슬픔, 부와 빈곤, 위와 아래, 검은 것과 흰 것, 정지와 운동, 사랑과 미움, 낙심과 희망 등 모든 것을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경험이 증가함에 따라 대립으로만 알았던 것들이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 중세 영주보다 더 편하게 산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현대의 고등학생의 지식이 과거의 유명한 사상가보다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아이가 처음 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울면서 웃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하겠지만 결혼을 할 때는 울면서 웃는 어머니를 이해하게 됩니다. 기쁨이나 슬픔도 독립된 순수한 감정이 아니라 때로는 기쁨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또 다른 때는 슬픔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두 감정 중 어느 쪽이 지배적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위와 아래의 개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나와 정반대인 것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미성숙할 때는 대립개념과 흑백논리에 의해 지배받다가 세상에는 상대적인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겸허하게 되고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와 비진리는 상대화 될 수 없고 하나님과 악한 영도 상대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흑암의 영 사이에 가로놓인 무한한 간격은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근본적으로 세속적 사상과 대립합니다. 모든 기독교 신자는 이 사실을 수긍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우리 신자는 이 절대적 대립의 의미를 기독교적 원리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성과 절대주권을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방법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스스로 철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일반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복음이 세속과 대립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나친 대립이론이 위험한 것은 우리 모두는 상대성의 한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2권에서,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쓴 시나 철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일지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각양 좋은 은사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세상은 무조건 악하고 망할 세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나 신비로운 체험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에는 어디나 임하고 역사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통찰과 분별없는 상대적인 기준에 따른 정죄와 판단을 통해서도 저질러 질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상대적 대립이론이 지배합니다. 교회 안에도 상대적 대립이론이 지지기반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상대적 대립이론이 세상을 멸망의 낭떠러지 끝까지 몰고 갔던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대립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의 필연적 결과로 신자의 순전한 생활의 고무적인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교와 내분과 분열의 위험성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상대적인 것으로 인한 대립은 그 끝이 파멸로 가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 상대적 대립이론의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의 바른 교훈으로 깊이 삼가며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모두가 의의 병기로 쓰임 받기를 힘쓸 때 진리와 비진리의 대립의 진정한 의미를 효과적으로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절-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자라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될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예를 들면 기쁨과 슬픔, 부와 빈곤, 위와 아래, 검은 것과 흰 것, 정지와 운동, 사랑과 미움, 낙심과 희망 등 모든 것을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경험이 증가함에 따라 대립으로만 알았던 것들이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 중세 영주보다 더 편하게 산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현대의 고등학생의 지식이 과거의 유명한 사상가보다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아이가 처음 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울면서 웃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하겠지만 결혼을 할 때는 울면서 웃는 어머니를 이해하게 됩니다. 기쁨이나 슬픔도 독립된 순수한 감정이 아니라 때로는 기쁨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또 다른 때는 슬픔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두 감정 중 어느 쪽이 지배적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위와 아래의 개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나와 정반대인 것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미성숙할 때는 대립개념과 흑백논리에 의해 지배받다가 세상에는 상대적인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겸허하게 되고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와 비진리는 상대화 될 수 없고 하나님과 악한 영도 상대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흑암의 영 사이에 가로놓인 무한한 간격은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근본적으로 세속적 사상과 대립합니다. 모든 기독교 신자는 이 사실을 수긍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우리 신자는 이 절대적 대립의 의미를 기독교적 원리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성과 절대주권을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방법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스스로 철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일반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복음이 세속과 대립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나친 대립이론이 위험한 것은 우리 모두는 상대성의 한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2권에서,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쓴 시나 철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일지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각양 좋은 은사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세상은 무조건 악하고 망할 세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나 신비로운 체험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에는 어디나 임하고 역사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통찰과 분별없는 상대적인 기준에 따른 정죄와 판단을 통해서도 저질러 질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상대적 대립이론이 지배합니다. 교회 안에도 상대적 대립이론이 지지기반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상대적 대립이론이 세상을 멸망의 낭떠러지 끝까지 몰고 갔던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대립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의 필연적 결과로 신자의 순전한 생활의 고무적인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교와 내분과 분열의 위험성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상대적인 것으로 인한 대립은 그 끝이 파멸로 가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 상대적 대립이론의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의 바른 교훈으로 깊이 삼가며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모두가 의의 병기로 쓰임 받기를 힘쓸 때 진리와 비진리의 대립의 진정한 의미를 효과적으로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절-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