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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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6-06-0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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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물에게는 살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는 모든 생물을 번성하게 하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나 살기를 원하고 살고자 하는 욕구에 방해가 되는 모든 환경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라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살고자 합니다. 다른 생물은 본능적으로 살기만 하면 잘 사는 것이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만 살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모든 다른 생물은 본능적 욕구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조건 대항하고 극복하여 살기를 원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본능적 욕구를 거슬러 자기 생명을 희생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 중에도 다른 생물처럼 본능적 욕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위대한 사람들 중에는 본능적 욕구를 따라 살기보다는 의미 있게 죽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는 것은 패배요 사는 것은 승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국한되었다면 그것이 진리일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라면 그 어떤 것도 죽음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공세(攻勢)라는 말과 수세(守勢)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세라는 말 다음에는 꼭 “취한다.”는 말이 붙어 “공세를 취한다.”라는 식으로 쓰이고, 수세라는 말 다음에는 “몰린다.”는 말이 붙어 “수세에 몰린다.” 라는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내가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면 신이 나고, 수세에 몰리면 불안합니다. 사람에게는 공세나 승리는 좋아하고 수세나 패배는 싫어하는 인성(引性)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의 현충사에 가면 입구에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국난에 즈음하여 그를 따르던 군사들에게 준 정신적 교훈이었으며 참 사는 길을 가르친 것입니다. 수세로서 공세를 이긴 예라 하겠습니다.
일본은 우리 문화의 수혜자임에도 불구하고 틈만 있으면 한반도를 넘보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손찌검을 했고, 때로는 임진왜란과 같은 침약을 일삼기도 했으며,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한일합병(韓日合倂)을 강요하고, 끝내 한반도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한일 관계의 역사에서 일본은 언제나 공세였고 조선은 언제나 수세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원자탄의 가공할 파괴력에 의해 최초로 참담한 패배를 맛본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을 정복하고 이기려는 본능적 욕구는 결국 패배와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쓴 대화 『파이돈』에서 “참된 철학자는 죽기를 고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철학자는 본래 식욕이나 성욕을 비롯한 육체의 향락을 멀리해야 마땅하며, 궁극적으로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앎을 추구함에 있어서 육체의 감각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시각이나 청각을 비롯한 몸의 감각들은 언제나 인식 주체인 인간 자신에게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육체와 더불어 무언가를 탐구하려 하는 이는 언제나 속임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참된 철학자는 죽기를 바라야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순신의 “必生卽死 必死卽生”이나 소크라테스의 “참된 철학자는 죽기를 고대해야 한다.”는 사상이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깨달은 사상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이 성경을 통하지 않고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삶에서 터득했고 적용하여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삶을 한 알의 밀알로 비유하셨고, 그것은 곧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는 복음임과 동시에 그를 믿는 모든 신자가 생활에 적용해야 할 영적 원리입니다. 사람이 본능적 욕구를 따라 살고자 하면 죽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그 자신을 죽이면 산다는 원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원리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것과 하나님 나라의 것의 가치의 현저한 차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개똥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고 하지만 참 신자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나음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생을 예수 믿는 신자로 살면서도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욕심을 버리지 못함은 개똥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는 세상적 가치관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개역)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공동번역)-요 12:24-25, 빌 1:21-23절-
모든 다른 생물은 본능적 욕구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조건 대항하고 극복하여 살기를 원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본능적 욕구를 거슬러 자기 생명을 희생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 중에도 다른 생물처럼 본능적 욕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위대한 사람들 중에는 본능적 욕구를 따라 살기보다는 의미 있게 죽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는 것은 패배요 사는 것은 승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국한되었다면 그것이 진리일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라면 그 어떤 것도 죽음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공세(攻勢)라는 말과 수세(守勢)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세라는 말 다음에는 꼭 “취한다.”는 말이 붙어 “공세를 취한다.”라는 식으로 쓰이고, 수세라는 말 다음에는 “몰린다.”는 말이 붙어 “수세에 몰린다.” 라는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내가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면 신이 나고, 수세에 몰리면 불안합니다. 사람에게는 공세나 승리는 좋아하고 수세나 패배는 싫어하는 인성(引性)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의 현충사에 가면 입구에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국난에 즈음하여 그를 따르던 군사들에게 준 정신적 교훈이었으며 참 사는 길을 가르친 것입니다. 수세로서 공세를 이긴 예라 하겠습니다.
일본은 우리 문화의 수혜자임에도 불구하고 틈만 있으면 한반도를 넘보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손찌검을 했고, 때로는 임진왜란과 같은 침약을 일삼기도 했으며,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한일합병(韓日合倂)을 강요하고, 끝내 한반도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한일 관계의 역사에서 일본은 언제나 공세였고 조선은 언제나 수세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원자탄의 가공할 파괴력에 의해 최초로 참담한 패배를 맛본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을 정복하고 이기려는 본능적 욕구는 결국 패배와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쓴 대화 『파이돈』에서 “참된 철학자는 죽기를 고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철학자는 본래 식욕이나 성욕을 비롯한 육체의 향락을 멀리해야 마땅하며, 궁극적으로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앎을 추구함에 있어서 육체의 감각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시각이나 청각을 비롯한 몸의 감각들은 언제나 인식 주체인 인간 자신에게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육체와 더불어 무언가를 탐구하려 하는 이는 언제나 속임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참된 철학자는 죽기를 바라야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순신의 “必生卽死 必死卽生”이나 소크라테스의 “참된 철학자는 죽기를 고대해야 한다.”는 사상이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깨달은 사상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이 성경을 통하지 않고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삶에서 터득했고 적용하여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삶을 한 알의 밀알로 비유하셨고, 그것은 곧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는 복음임과 동시에 그를 믿는 모든 신자가 생활에 적용해야 할 영적 원리입니다. 사람이 본능적 욕구를 따라 살고자 하면 죽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그 자신을 죽이면 산다는 원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원리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것과 하나님 나라의 것의 가치의 현저한 차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개똥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고 하지만 참 신자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나음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생을 예수 믿는 신자로 살면서도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욕심을 버리지 못함은 개똥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는 세상적 가치관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개역)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공동번역)-요 12:24-25, 빌 1:21-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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