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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신학의 역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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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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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신학자 멜데니우스(R. Meldenius)는 그의 모든 신학을 다음과 같은 삶의 원칙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In Necessariis, unitas; in no necessariis, libertas; in utrisque, caritas!)”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믿는 자들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기꺼이 동의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하는 이론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멜데니우스의 신학의 결론에서 얻어진 삶의 원칙을 적용하여 사는 것이 하나도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는 나름대로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성경적이고 이상적이라고 하는 입장조차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적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할 때 아무리 탁월한 신학자나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도 겸손과 공정성이 일차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겸손은 완전이나 통달이라는 환상을 제거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며 최종적 진술이라는 감상적인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합니다. 공정성이란 우리가 본질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지라도 그 선택의 실천이 선택의 과정보다 더 어려울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게 합니다.

신학은 신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에 대한 교리 혹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을 교리라고 부르는 것은 신학이 이해와 지식과 지혜와 학문과 같이 이성적 사고의 합리적 탐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된 분야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학문은 자체의 적용의 원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의 작업은 그 원칙들에 부응해야 합니다. 사는 것이 모든 것 중에 가장 고귀한 일이기 때문에 신학도 신자의 삶에 부응하는 연구이어야 하고 그 연구 또한 삶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삶은 살아계셔서 인간과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접근하여 사는 것이므로 신학적 삶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하여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그것이 사람의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에 기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경우가 많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조소와 로마제국의 박해에 세련된 논리와 탁월한 재간으로 응수하지 는 못했지만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는 로마제국이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어린 아이같이 서툴고 약한 교회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제국의 제도권 안에 들어간 기독교는 그 이전과는 정 반대의 위험에 봉착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생존의 위협이 되었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안정된 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름뿐인 기독교인을 양산하게 되었고 순수한 신앙을 변질시켰지만 또 한 편 수도원이라는 독특한 기독교적 삶의 양태를 만들어 내는 등의 방식을 통해서 기독교는 자신의 고유성을 잘 지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4세기 이후로 수도원과 수도사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사실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세속 권력을 지향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을 들어가는 기독교는 로마의 정신과 사상 전체를 지배할 만큼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은 기독교 신학의 발전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헬라 사상과 연결되면서 주도적 위치를 가졌던 기독교 사상이 이제는 로마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사상 체계로 나타나도록 요구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그 때까지는 논의의 다양성, 주장의 다양성이 당연했으나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교회, 특히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이끌 사상 체계로서 일사분란하고, 통일된 사상체계로서의 신학이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의 이러한 모습은 신학본래의 목적과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학적 주제들은 종교회의를 통해서 논의되었는데, 여기서 결정된 것들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교리가 되었고, 그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 남아있습니다.

어쨌든 이 시기에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이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정해졌고, 지금까지 교부들이 논의했던 여러 내용들이 정리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이 예수님의 신성 문제였습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라는 종교회의를 통해서 결말지어진 이 문제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확정한 가장 중요한 종교회의로 알려져 있지만 그 결정까지의 과정은 다른 많은 종교회의들과 마찬가지로 투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후대의 평가이고 보면, 그리고 여기서의 결정이 그 이후의 모든 신학적 논의의 기본 전제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부족한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별한 개입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불완전한 교회와 신학자들을 통하여 완전한 계시의 말씀을 지키고 계승하도록 하심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디모데전서 1:1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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