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신학의 역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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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6-02-2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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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를 암흑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18세기의 계몽 운동은 자연과학이 신학으로 말미암아 어둡게 된 것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계몽(enlightenment)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계몽이라는 말은 반갑고 매력적인 용어입니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정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반기독교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계몽 시대 끝에 독일에서 유명한 철학자 헤겔이 등장합니다. 헤겔은 자기 자신이 훌륭한 루터교 신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프러시아 왕국에서는 루터에게 훌륭한 기독교 철학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당시 헤겔에 대해서는 자타가 훌륭한 기독교 철학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헤겔을 기독교 철학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헤겔이 말하는 신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헤겔은 무신론자요, 범신론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대 사람들은 헤겔을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요, 훌륭한 루터교 신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헤겔의 영향을 받아서 신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데이비드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같은 학자는 헤겔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의 생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즉 헤겔의 철학을 근거하여 신학 책을 쓴 것입니다. 이쯤 되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에 아부(flattery)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세기에는 신학이 학문의 여왕이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는데, 계몽주의 이후로는 신학이 철학에 곁눈질(a wink)을 하기 시작하였고, 철학이 학문의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스트라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헤겔의 정반합의 논리를 적용하여 베드로파 정, 바울파 반, 합은 사도행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스트라우스의 책을 읽고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유명한 엥겔스입니다. 칼 막스와 함께 자본론을 쓰고 공산주의를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 엥겔스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주 경건하고 신앙이 독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신학자 스트라우스가 쓴 책 “예수의 생애”를 읽고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시를 쓸 만큼 경건하고 신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신학자가 쓴 신학 책을 읽고 신자가 무신론자가 되었다면 그 책이 어떤 책일까 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의 신학은 헤겔에게 아부를 하든지 그 때 일어난 자연 과학에 아부를 하든지 두 종류의 아부를 하면서 새로운 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생겨 난 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벨하우젠(J. Wellhausen, 1844-1918) 같은 신학자는 자연과학에 근거하여 성경에 칼질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위 문서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 결과 자유주의의 영향 아래 19세기의 구라파 교회는 다 죽어버렸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사교장에 불과하였습니다.
키엘케고르는 그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라는 책에서 그 당시의 교회의 형편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완전히 형식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 죽어가는 구라파의 교회를 다시 살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발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유주의로부터 구라파의 교회를 살리는 데는 큰 공헌을 하였지만 그의 실존주의 신학은 또 철학에 아부를 하여 생긴 신학의 하나였습니다. 칼 발트는 에밀 부룬너와 함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고르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existentialism)신학을 한 사람들입니다.
한국에는 왜정 시대 말에 이미 이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해방이 될 무렵에는 실존주의 신학까지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실존주의 신학이 2차 대전 이후에 크게 유행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960년대에 와서는 실존주의 신학과는 정반대의 신학이 또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입니다. 정치 신학자들은 칼 막스와 신막스주의자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헤겔과 자연주의에게 아부를 했고, 20세기 초의 실존주의 신학은 키엘케고르, 야스퍼스, 하이덱거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아부를 했고, 1960년대에 일어난 정치신학은 칼 막스 밎 신막스주의자들에게 아부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신학은 그 독자성(identity)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신학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중세와는 달리 중세 이후에는 지금까지 신학이 철학에 아부를 함으로써 그 주체성과 독자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이 아니라 상황으로부터 시작하는, 그야말로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부 신학자들이 칼 발트의 실존주의 신학에 호감을 가지고 받아들였다가 1960년대 이후에는 정치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실존주의 신학과 정치신학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신학의 흐름에서 한 사람이 한 때는 실존주의 신학을, 불과 몇 년 후에는 정치신학을 받아들이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실존주의 신학을 표방하던 신학자가 정치신학을 표방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표방했던 실존주의 신학을 포기한다고 양심선언을 하였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실존주의 신학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치신학은 개인보다는 정치적 상황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신학에 영향을 받은 신자들이 주체성과 일관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된 것은 한국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 신앙이 없는 신학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무신론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대학 안에 신학이 있습니다. 그 말은 신학이 단순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학교가 따로 없고 대학 안에서 학문의 일부로서의 신학이 있을 뿐입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의 산물입니다. 인간 이성의 산물로서의 신학은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고 복음도 아닙니다. 따라서 신앙이 아주 확실한 사람이 아니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상과 철학에도 흔들리지 않을 확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신학을 할 때 바른 신학을 할 수 있고 그 신학을 통하여 참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한복음 6:69절 -
그러나 오늘날 헤겔을 기독교 철학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헤겔이 말하는 신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헤겔은 무신론자요, 범신론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대 사람들은 헤겔을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요, 훌륭한 루터교 신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헤겔의 영향을 받아서 신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데이비드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같은 학자는 헤겔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의 생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즉 헤겔의 철학을 근거하여 신학 책을 쓴 것입니다. 이쯤 되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철학에 아부(flattery)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세기에는 신학이 학문의 여왕이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는데, 계몽주의 이후로는 신학이 철학에 곁눈질(a wink)을 하기 시작하였고, 철학이 학문의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스트라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헤겔의 정반합의 논리를 적용하여 베드로파 정, 바울파 반, 합은 사도행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스트라우스의 책을 읽고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유명한 엥겔스입니다. 칼 막스와 함께 자본론을 쓰고 공산주의를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 엥겔스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주 경건하고 신앙이 독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신학자 스트라우스가 쓴 책 “예수의 생애”를 읽고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시를 쓸 만큼 경건하고 신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신학자가 쓴 신학 책을 읽고 신자가 무신론자가 되었다면 그 책이 어떤 책일까 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의 신학은 헤겔에게 아부를 하든지 그 때 일어난 자연 과학에 아부를 하든지 두 종류의 아부를 하면서 새로운 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생겨 난 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벨하우젠(J. Wellhausen, 1844-1918) 같은 신학자는 자연과학에 근거하여 성경에 칼질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위 문서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 결과 자유주의의 영향 아래 19세기의 구라파 교회는 다 죽어버렸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사교장에 불과하였습니다.
키엘케고르는 그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라는 책에서 그 당시의 교회의 형편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완전히 형식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 죽어가는 구라파의 교회를 다시 살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발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유주의로부터 구라파의 교회를 살리는 데는 큰 공헌을 하였지만 그의 실존주의 신학은 또 철학에 아부를 하여 생긴 신학의 하나였습니다. 칼 발트는 에밀 부룬너와 함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고르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existentialism)신학을 한 사람들입니다.
한국에는 왜정 시대 말에 이미 이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해방이 될 무렵에는 실존주의 신학까지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실존주의 신학이 2차 대전 이후에 크게 유행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960년대에 와서는 실존주의 신학과는 정반대의 신학이 또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입니다. 정치 신학자들은 칼 막스와 신막스주의자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헤겔과 자연주의에게 아부를 했고, 20세기 초의 실존주의 신학은 키엘케고르, 야스퍼스, 하이덱거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아부를 했고, 1960년대에 일어난 정치신학은 칼 막스 밎 신막스주의자들에게 아부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신학은 그 독자성(identity)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신학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중세와는 달리 중세 이후에는 지금까지 신학이 철학에 아부를 함으로써 그 주체성과 독자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이 아니라 상황으로부터 시작하는, 그야말로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부 신학자들이 칼 발트의 실존주의 신학에 호감을 가지고 받아들였다가 1960년대 이후에는 정치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실존주의 신학과 정치신학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신학의 흐름에서 한 사람이 한 때는 실존주의 신학을, 불과 몇 년 후에는 정치신학을 받아들이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실존주의 신학을 표방하던 신학자가 정치신학을 표방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표방했던 실존주의 신학을 포기한다고 양심선언을 하였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실존주의 신학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치신학은 개인보다는 정치적 상황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신학에 영향을 받은 신자들이 주체성과 일관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된 것은 한국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 신앙이 없는 신학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무신론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대학 안에 신학이 있습니다. 그 말은 신학이 단순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학교가 따로 없고 대학 안에서 학문의 일부로서의 신학이 있을 뿐입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의 산물입니다. 인간 이성의 산물로서의 신학은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고 복음도 아닙니다. 따라서 신앙이 아주 확실한 사람이 아니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상과 철학에도 흔들리지 않을 확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신학을 할 때 바른 신학을 할 수 있고 그 신학을 통하여 참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한복음 6:6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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