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신학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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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6-02-0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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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아덴에서의 경험을 거울삼아 복음을 전할 때 다시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기로 마음에 결심하였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지혜나 철학이나 수려한 문장이나 웅변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님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간 바울은 자신의 그러한 심경을 의미심장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자세는 복음 전도자뿐 아니라 그 복음을 듣고 배우는 신자들의 자세 또한 그러해야함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바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도들도 복음과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관한한 이와 같은 자세를 견지(堅持)하였습니다. 성경의 저자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독자들 또한 성경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태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교리나 신학적으로 이론화 하게 된 것은 성경이 이론적이고 합리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인간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모든 사도들은 일관성 있게 인간의 지혜나 철학이나 이론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고 또한 전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영감을 따라 성경을 기록하였으며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난 주후 2세기쯤에 복음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 전파되었습니다. 이 때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전도의 방법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방법인“전도의 미련한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는 전도뿐 아니라 기독교를 공격하는 적들로부터 성경과 교회를 지켜야 했고, 새로운 개종자들과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첫째, 주후 2세기의 교회는 유대인들과 희랍철학자들의 복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경의 이론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는 유대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같은 주장이 당시 교회에게는 매우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을 비롯한 초기 전도자들이 복음을 로마 제국 곳곳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사람들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당국은 유대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유대교의 일부로 보아 포교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유대교도 아니면서 유대교에 편승하여 포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복음 전도를 방해할 뿐 아니라 로마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니라 이단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이미복음을 변명할 때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약속의 성취임을 이야기함으로서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지 않음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에는 교회가 유대인들의 공격에 대하여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성경에 대하여 이론화 작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희랍 철학의 도전입니다. 희랍의 철학은 기독교를 아주 무식한 자들의 미신이라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기독교는 이론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을 가르치고 전하는 저급한 수준의 미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도 희랍 철학의 이러한 공격을 받고 대응을 하였지만 사도시대 이후에는 더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대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부 저스틴(Justin)은“변명”(ἀπολογία, apology)이라는 책을 써서 기독교를 변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독교 변호는 복음이 철학보다 우월한 것을 증거 하지 않고 ‘기독교도 그렇게 무식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과 희랍 철학이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희랍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가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기독교의 가르침도 희랍 철학 못지않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 당시 기독교를 변호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오리겐(Origen) 같은 신학자는 플라톤을 존경하여 그의 영혼회귀설을 주장하면서 기독교도 영혼 회귀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신학자들을 통해 기독교는 복음의 탁월성을 증거 한 것이 아니라 희랍 철학에 이론적으로 아부를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이런 신학자들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터툴리안(Tertullian 150-160년경에 칼타고에서 출생) 같은 신학자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Quid Athenae Hierosolymis”,“모순되는 고로 나는 믿는다 credo quia absurdumn est”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희랍 철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성경이 비논리적인 것으로 봐서 철학보다 훨씬 믿을 만 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것은 철학적인 것이고, 철학적인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에는 서로 입장이 다른 신학자들이 각기 다른 자기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두 입장들은 상당한 논쟁을 통하여 두 노선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두 극단적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중립적인 입장이 생겨났고 그 중립적인 입장이 정통 기독교의 노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립적인 노력으로 생겨난 것이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니케아 신앙고백서, 삼위일체교리, 예수님의 양성 교리 등입니다. 이 교리들은 초대 교회가 직면한 다양한 공격으로부터 성경의 진리를 지키는데 요긴한 의의 병기가 된 셈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야고보서 1:17절 -
바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도들도 복음과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관한한 이와 같은 자세를 견지(堅持)하였습니다. 성경의 저자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독자들 또한 성경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태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교리나 신학적으로 이론화 하게 된 것은 성경이 이론적이고 합리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인간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모든 사도들은 일관성 있게 인간의 지혜나 철학이나 이론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고 또한 전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영감을 따라 성경을 기록하였으며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난 주후 2세기쯤에 복음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 전파되었습니다. 이 때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전도의 방법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방법인“전도의 미련한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는 전도뿐 아니라 기독교를 공격하는 적들로부터 성경과 교회를 지켜야 했고, 새로운 개종자들과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첫째, 주후 2세기의 교회는 유대인들과 희랍철학자들의 복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경의 이론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는 유대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같은 주장이 당시 교회에게는 매우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을 비롯한 초기 전도자들이 복음을 로마 제국 곳곳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사람들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당국은 유대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유대교의 일부로 보아 포교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유대교도 아니면서 유대교에 편승하여 포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복음 전도를 방해할 뿐 아니라 로마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니라 이단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이미복음을 변명할 때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약속의 성취임을 이야기함으로서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지 않음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에는 교회가 유대인들의 공격에 대하여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성경에 대하여 이론화 작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희랍 철학의 도전입니다. 희랍의 철학은 기독교를 아주 무식한 자들의 미신이라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기독교는 이론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을 가르치고 전하는 저급한 수준의 미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도 희랍 철학의 이러한 공격을 받고 대응을 하였지만 사도시대 이후에는 더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대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부 저스틴(Justin)은“변명”(ἀπολογία, apology)이라는 책을 써서 기독교를 변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독교 변호는 복음이 철학보다 우월한 것을 증거 하지 않고 ‘기독교도 그렇게 무식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과 희랍 철학이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희랍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가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기독교의 가르침도 희랍 철학 못지않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 당시 기독교를 변호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오리겐(Origen) 같은 신학자는 플라톤을 존경하여 그의 영혼회귀설을 주장하면서 기독교도 영혼 회귀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신학자들을 통해 기독교는 복음의 탁월성을 증거 한 것이 아니라 희랍 철학에 이론적으로 아부를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이런 신학자들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터툴리안(Tertullian 150-160년경에 칼타고에서 출생) 같은 신학자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Quid Athenae Hierosolymis”,“모순되는 고로 나는 믿는다 credo quia absurdumn est”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희랍 철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성경이 비논리적인 것으로 봐서 철학보다 훨씬 믿을 만 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것은 철학적인 것이고, 철학적인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에는 서로 입장이 다른 신학자들이 각기 다른 자기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두 입장들은 상당한 논쟁을 통하여 두 노선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두 극단적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중립적인 입장이 생겨났고 그 중립적인 입장이 정통 기독교의 노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립적인 노력으로 생겨난 것이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니케아 신앙고백서, 삼위일체교리, 예수님의 양성 교리 등입니다. 이 교리들은 초대 교회가 직면한 다양한 공격으로부터 성경의 진리를 지키는데 요긴한 의의 병기가 된 셈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야고보서 1:1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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