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낙관주의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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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06-01-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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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하나님의 권위에 절대 복종할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안에는 비판이란 발붙일 곳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많은 선지자들도 비판을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비판을 하셨으며, 무엇보다 복음 자체가 세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가 비판을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이성의 자율성을 전제한 인본주의 사상가들이 그 용어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비판이란 비판될 수 없는 절대적 표준을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누구나 무엇을 비판하려면 참 된 표준에 의하여 비판해야 하고, 만약 거짓되거나 불완전한 표준을 적용한다면 그 표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은 이러한 자기비판에 의해 학문적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합리론 자들은 인간의 경험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였으며 경험논자들은 합리논자들의 분석적 방법을 배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쳐 신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신자들까지 합리논자와 경험논자로 갈라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까지나 성경적이지 합리론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론에 기대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는 합리론이나 경험론의 어느 전제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론을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되고 경험론을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그것들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경험론은 일상의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며 합리론은 합리적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합리론의 약점은 실증할 수 있는 사실만 인정하고 그 외의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경험론의 약점은 객관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철학은 아무 전제도 인정하지 않고 비판되지 않은 어떤 절대적인 것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제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도 비판되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은 그런 전제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모든 것을 이성에 근거하여 비판하였으나 칸트 이후 이성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성 자체를 비판하는 것 역시 결국은 이성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것을 판단하는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다가 칸트에 의해 이성의 권위가 무너지자 헤겔은 철학의 명제를 절대적인 것이 아닌 더 나은 것을 찾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절대권위를 상실한 철학은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판단할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딜레마를 풀려고 한 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느낌과 깨달음을 중시하는 사상입니다. 객관적 사실과 진리는 중요하지 않고 개인이 어떻게 느끼느냐를 중요시 합니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전형적인 인본주의 사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절대적 진리의 표준이 없는 철학은 그것이 이성이나 합리성에 근거하건 경험이나 직관에 근거하건 인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본주의의 함정은 지나친 낙관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비판한다는 것은 더 나은 무엇이 가능하리라고 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을 방법으로 삼는 철학의 역사관은 거의가 낙관적인 역사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비판을 통해 모든 거짓과 오류를 제거하고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비판을 소중히 여기지만 이런 낙관주의는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적 역사관은 낙관적도 비관적도 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기독교의 역사 방향은 하나님의 비밀에 속합니다. 성경은 궁극적 구원을 말하고, 최종적 심판도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역사는 계속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후퇴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가장 정통한 칼빈주의 철학자들인 도여베르트나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롯한 신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죄와 십자가의 취지를 다소 소홀히 하여 낙관적이 될 위험이 있다 하겠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미래가 필연적으로 더 좋고 아름답게 되리라고 전제하지 않고, 다만 거짓과 우상을 배격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에 성령을 따라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최근 기독교 안의 진보적인 진영과 보수적인 진영이 각기 자기주장을 펴고 있으나 성경의 입장에 충실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편성하므로 주장은 각기 다를지라도 결국은 지나친 낙관론에 처하게 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진보적인 한국정부의 지도자들과 신세대들의 약점을 지나친 낙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개혁의지로 모든 것을 최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일찍이 칼 막스가 공산주의라는 낙관론에 속았고 현대 사상가들이 낙관론에 속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회와 신자들까지 다분히 지나치게 낙관론에 빠져 있는 듯 하여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수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바른 성경의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비성경적인 사상이 그들의 사상 속에 스며들었던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영향을,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파스깔은 데까르트의 영향을, 키엘케골은 헤겔의 영향을, 도여베르트는 칸트와 훗설의 영향을, 리꿜은 훗설과 프로이드의 영향을, 폴란팅가는 분석철학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상이나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여 반드시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주된 사상이 기독교적이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오늘날의 교회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는 세속적인 낙관주의를 분별하여 배격하기를 기대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잠언 27:1, 약 4:14절 -
누구나 무엇을 비판하려면 참 된 표준에 의하여 비판해야 하고, 만약 거짓되거나 불완전한 표준을 적용한다면 그 표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은 이러한 자기비판에 의해 학문적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합리론 자들은 인간의 경험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였으며 경험논자들은 합리논자들의 분석적 방법을 배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쳐 신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신자들까지 합리논자와 경험논자로 갈라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까지나 성경적이지 합리론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론에 기대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는 합리론이나 경험론의 어느 전제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론을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되고 경험론을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그것들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경험론은 일상의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며 합리론은 합리적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합리론의 약점은 실증할 수 있는 사실만 인정하고 그 외의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경험론의 약점은 객관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철학은 아무 전제도 인정하지 않고 비판되지 않은 어떤 절대적인 것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제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도 비판되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은 그런 전제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모든 것을 이성에 근거하여 비판하였으나 칸트 이후 이성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성 자체를 비판하는 것 역시 결국은 이성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것을 판단하는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다가 칸트에 의해 이성의 권위가 무너지자 헤겔은 철학의 명제를 절대적인 것이 아닌 더 나은 것을 찾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절대권위를 상실한 철학은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판단할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딜레마를 풀려고 한 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느낌과 깨달음을 중시하는 사상입니다. 객관적 사실과 진리는 중요하지 않고 개인이 어떻게 느끼느냐를 중요시 합니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전형적인 인본주의 사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절대적 진리의 표준이 없는 철학은 그것이 이성이나 합리성에 근거하건 경험이나 직관에 근거하건 인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본주의의 함정은 지나친 낙관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비판한다는 것은 더 나은 무엇이 가능하리라고 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을 방법으로 삼는 철학의 역사관은 거의가 낙관적인 역사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비판을 통해 모든 거짓과 오류를 제거하고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비판을 소중히 여기지만 이런 낙관주의는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적 역사관은 낙관적도 비관적도 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기독교의 역사 방향은 하나님의 비밀에 속합니다. 성경은 궁극적 구원을 말하고, 최종적 심판도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역사는 계속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후퇴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가장 정통한 칼빈주의 철학자들인 도여베르트나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롯한 신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죄와 십자가의 취지를 다소 소홀히 하여 낙관적이 될 위험이 있다 하겠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미래가 필연적으로 더 좋고 아름답게 되리라고 전제하지 않고, 다만 거짓과 우상을 배격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에 성령을 따라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최근 기독교 안의 진보적인 진영과 보수적인 진영이 각기 자기주장을 펴고 있으나 성경의 입장에 충실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편성하므로 주장은 각기 다를지라도 결국은 지나친 낙관론에 처하게 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진보적인 한국정부의 지도자들과 신세대들의 약점을 지나친 낙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개혁의지로 모든 것을 최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일찍이 칼 막스가 공산주의라는 낙관론에 속았고 현대 사상가들이 낙관론에 속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회와 신자들까지 다분히 지나치게 낙관론에 빠져 있는 듯 하여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수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바른 성경의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비성경적인 사상이 그들의 사상 속에 스며들었던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영향을,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파스깔은 데까르트의 영향을, 키엘케골은 헤겔의 영향을, 도여베르트는 칸트와 훗설의 영향을, 리꿜은 훗설과 프로이드의 영향을, 폴란팅가는 분석철학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상이나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여 반드시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주된 사상이 기독교적이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오늘날의 교회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는 세속적인 낙관주의를 분별하여 배격하기를 기대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잠언 27:1, 약 4: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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