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왜곡 비판과 자신 살펴보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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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6-12-31관련링크
본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은 윤리적인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이 곧 윤리의 핵심입니다. 정의는 사랑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최종적인 가치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이 버려야 할 악들을 지적하고 지켜야 할 덕목들을 제시하였습니다. 버려야 할 악들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고 지켜야 할 덕목들은 거룩,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등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 교회에도 현대 교회처럼 윤리 도덕적인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초대 교회는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생활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쩔 수 없이 지배적인 세상 정치와 사상과 문화에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당시는 로마 문명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 문명은 그 규모나 영향력에서 그 시대를 지배하였습니다. 로마의 문명은 겉으로는 고상하고 세련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도덕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시대는 변해도 악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다섯 가지 악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미국의 문제나 대한민국의 문제나 어느 나라도 예외 없이 모양은 달라도 이 다섯 가지 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악이 이 시대에 지배적인 악의 이름이고 개념입니다. 아주 강렬하면서도 듣기만 해도 메스꺼움을 느끼게 하는 기분 나쁜 단어들입니다.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파괴적이고, 향락적입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 귀족들은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걸 즐겼습니다. 온갖 산해진미를 배부르게 먹고 배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토하고 나서 다시 먹었습니다. 연회장 옆에는 토하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자연스러웠고 고급한 수준의 음식문화였습니다.
당시의 성적 타락도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 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동성애는 물론 유아애도 유행하였습니다. 피임 기구나 방법도 전무했기 때문에 사생아들이 많이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로마 시 아무데나 버려졌고 포주들은 여자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서 창녀로 만들어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사창가를 자주 드나드는 남자들은 자기 딸을 상대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타락한 성문화와 교회가 무관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예문제도 교회가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노예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관습들을 그대로 용인하는 것을 사도들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귀족들과 그들의 아내들은 노예들의 목숨을 건 격투경기를 관람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으로 특징되는 악들에는 성적 타락과 폭력과 노예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천여 년 전 로마 문명만이 악하고 부패한 것은 아닙니다. 이곳 미국과 대한민국에서도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성범죄가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성적 범죄가 이렇게 다반사가 되는 것을 보아 사회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시대에 살아 있어 현대인의 악을 지적했다고 해도 이 다섯 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세기나 21세기나 인간이 죄인이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부정적 현실에 대해 지나치게 낙심할 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고 하나님 나라 영향력으로 모든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모습은 거룩함과 사랑 받는 자의 여유와 바름과 진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그 다음 단계에 대해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이념이나 행동이나 업적이나 그럴듯한 말이라도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고전 13장은 그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태산을 옮기는 믿음과 태산을 평지로 만드는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의 가치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전 13장으로 자신과 사회를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조금만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윽박지르고 논리도 경우도 없이 상대의 태도를 문제 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한 마디로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거나 받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이나 깨닫지 못한 것은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권위의식과 되지도 않는 주장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배우거나 노력해서 좀처럼 바꿔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고 고백이며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평강이란 아무런 염려나 걱정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그 누구도 평강에 지배 받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국가도 정치도 경제도 과학도 사람에게 평강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것은 실로 엄청난 대가를 당신께서 지불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바울은“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를 믿는 이들이 평강에 의해 지배 받는 사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이 참으로 귀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평강의 상태에 대한 좋은 예로 ‘한 몸’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 몸은 병들거나 장애가 아닌 한 그 조화와 안정에 있어서 그 어떤 슈퍼컴퓨터도 따라 할 수 없는 질서와 평강이 주장합니다. 우리 몸의 근육과 핏줄과 신경과 세포와 DNA 구조는 복잡하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유기적으로 조화로운지 모릅니다. 이러한 신비를 성경은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솜씨라고 노래합니다. 우주선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복잡한 우리 몸이 질서와 평강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그런 신비로운 조화로 질서 가운데 평강한 것처럼 성도들의 상호 관계에서 각자가 그리스도의 평강에 지배를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능력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에 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목하지 못하고 평안하지 못한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리거나 자기 성격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강을 위해 부름 받은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게 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평강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평강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를 통해 모두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이 버려야 할 악들을 지적하고 지켜야 할 덕목들을 제시하였습니다. 버려야 할 악들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고 지켜야 할 덕목들은 거룩,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등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 교회에도 현대 교회처럼 윤리 도덕적인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초대 교회는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생활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쩔 수 없이 지배적인 세상 정치와 사상과 문화에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당시는 로마 문명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 문명은 그 규모나 영향력에서 그 시대를 지배하였습니다. 로마의 문명은 겉으로는 고상하고 세련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도덕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시대는 변해도 악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다섯 가지 악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미국의 문제나 대한민국의 문제나 어느 나라도 예외 없이 모양은 달라도 이 다섯 가지 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악이 이 시대에 지배적인 악의 이름이고 개념입니다. 아주 강렬하면서도 듣기만 해도 메스꺼움을 느끼게 하는 기분 나쁜 단어들입니다.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파괴적이고, 향락적입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 귀족들은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걸 즐겼습니다. 온갖 산해진미를 배부르게 먹고 배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토하고 나서 다시 먹었습니다. 연회장 옆에는 토하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자연스러웠고 고급한 수준의 음식문화였습니다.
당시의 성적 타락도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 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동성애는 물론 유아애도 유행하였습니다. 피임 기구나 방법도 전무했기 때문에 사생아들이 많이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로마 시 아무데나 버려졌고 포주들은 여자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서 창녀로 만들어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사창가를 자주 드나드는 남자들은 자기 딸을 상대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타락한 성문화와 교회가 무관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예문제도 교회가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노예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관습들을 그대로 용인하는 것을 사도들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귀족들과 그들의 아내들은 노예들의 목숨을 건 격투경기를 관람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으로 특징되는 악들에는 성적 타락과 폭력과 노예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천여 년 전 로마 문명만이 악하고 부패한 것은 아닙니다. 이곳 미국과 대한민국에서도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성범죄가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성적 범죄가 이렇게 다반사가 되는 것을 보아 사회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시대에 살아 있어 현대인의 악을 지적했다고 해도 이 다섯 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세기나 21세기나 인간이 죄인이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부정적 현실에 대해 지나치게 낙심할 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고 하나님 나라 영향력으로 모든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모습은 거룩함과 사랑 받는 자의 여유와 바름과 진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그 다음 단계에 대해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이념이나 행동이나 업적이나 그럴듯한 말이라도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고전 13장은 그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태산을 옮기는 믿음과 태산을 평지로 만드는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의 가치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전 13장으로 자신과 사회를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조금만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윽박지르고 논리도 경우도 없이 상대의 태도를 문제 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한 마디로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거나 받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이나 깨닫지 못한 것은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권위의식과 되지도 않는 주장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배우거나 노력해서 좀처럼 바꿔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고 고백이며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평강이란 아무런 염려나 걱정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그 누구도 평강에 지배 받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국가도 정치도 경제도 과학도 사람에게 평강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것은 실로 엄청난 대가를 당신께서 지불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바울은“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를 믿는 이들이 평강에 의해 지배 받는 사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이 참으로 귀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평강의 상태에 대한 좋은 예로 ‘한 몸’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 몸은 병들거나 장애가 아닌 한 그 조화와 안정에 있어서 그 어떤 슈퍼컴퓨터도 따라 할 수 없는 질서와 평강이 주장합니다. 우리 몸의 근육과 핏줄과 신경과 세포와 DNA 구조는 복잡하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유기적으로 조화로운지 모릅니다. 이러한 신비를 성경은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솜씨라고 노래합니다. 우주선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복잡한 우리 몸이 질서와 평강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그런 신비로운 조화로 질서 가운데 평강한 것처럼 성도들의 상호 관계에서 각자가 그리스도의 평강에 지배를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능력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에 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목하지 못하고 평안하지 못한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리거나 자기 성격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강을 위해 부름 받은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게 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평강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평강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를 통해 모두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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