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지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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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6-10-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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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찾고 만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넌센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같은 형상을 지니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어떤 형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 어떤 형상을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던 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엄히 경고했던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신 4:15)는 말씀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말씀하시고 일하시며 말씀과 하시는 일을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십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번제를 드릴 때 회막 문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 방법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자기 계시에 달렸지만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렘 29:13절에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고, 14절에“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라고 하셨는데, 개역성경은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만나 주시는 것으로 번역하였는데 개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수동적으로 “만나지겠고”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수동적으로 묘사한 것이 어색하여 능동적으로 바꾼 게 아닌가 싶지만 그것은 인간의 교리적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자의적이고 능동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만나지신다고 하신 것이 인간의 수준에 대한 세심한 배려 같아서 오히려 위로가 되고 참으로 인상적이고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을 만나듯이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뜻과 행위와 능력과 지혜를 보고 깨닫고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도 행하시고 공중을 나는 바람과 햇빛과 천체와 작은 미생물까지도 사랑으로 섭리하시고 통치하십니다. 법과 정의와 질서를 존중하고 지키며 그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과 손길을 발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전도와 봉사와 구제에 힘쓰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정치와 교육과 경제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좀 더 가슴에 와 닿는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가끔 미처 하지 못한 부엌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부는 그것을 의식하면서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설거지를 빨리 해 치우고 다른 일을 해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설거지 하고 성경공부 하러 가야지, 빨리 거실 청소하고 금요기도회에 가야지, 혹은 빨리 세탁기 돌리고 산책을 가거나 음악회에 가야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설거지나 청소는 빨리 해치워야 할 일입니다. 설거지 하는 일에 소중한 부분들, 이를테면 설거지나 청소 하는 일의 과정과 방법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쉽게 간과합니다. 물을 만지고 더러운 것을 씻고 깨끗한 그릇을 보고 만지는 좋은 느낌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너무 가볍게 또는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너무 하찮은 것이라면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설거지를 하면서 이웃에게 좋은 일하고 나아가서는 인류에게 좋은 일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을 아껴 사용하고 세제를 덜 쓰는 것도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하는 것이고 인류를 위하고 미래의 후손들을 위하는 일입니다. 생태환경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의 소중함을 깨닫고 행하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수단으로만 취급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목회, 선교, 교육, 구제, 봉사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나지만 청소나 설거지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설거지와 청소가 경우에 따라서는 기도회 참석하는 것이나 산책하는 것이나 음악회에 가는 것보다 소중할 수가 있습니다. 일 자체가 더 중요한 것도 있고 덜 중요한 것도 있지만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면 하찮게 여기거나 귀찮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흙을 만지는 것이 좋습니다. 흙 속에 온갖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흙이라는 토대가 없다면 무엇이 가능할까요? 흙이 땅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흙 한 줌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흙이 곧 토지이기 때문입니다. 흙에는 온갖 종류의 흙이 있습니다. 농사짓기 좋은 흙이 있고 건축하기에 좋은 흙이 있고 그릇 만들기에 좋은 흙이 있습니다. 이 흙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옵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인간이 사용하는 것이 모두 흙에서 나옵니다. 저는 흙과도 친하게 지냅니다. 그러다 보면 지렁이도 만나고 땅강아지도 만나고 거미도 만나고, 온갖 미생물이 거기서 상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신기합니다. 온갖 생명이 흙을 토대로 살아갑니다. 최첨단 과학기술도 흙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인류는 앞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흙의 신비를 다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컴퓨터나 기계 문명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더 공부해야 하고, 무엇보다 특히 현대인들은 흙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그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일반 서적 안에도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갖 원리와 진리가 그분께서 만드신 만물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발견하고 만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책을 읽거나 흙을 만지거나 청소를 하다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설교자의 기쁨입니다. 피상적으로 지나가면 발견하지 못하는 진리를 좀 생각하고 노력하면 발견하고 맛볼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합니다. 시인이나 예술가나 과학자들이 가만히 앉아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글을 잘 쓰시던데, 글 잘 쓰는 것도 기술인가 봅니다. 글 쓰시는 재주가 있으십니다.”라고 합니다. 칭찬으로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물론 기술이나 재주로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재주나 기술로 글을 쓰는 사람은 “지식의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나 글쓰기를 기술이나 재주로 하면 안 됩니다.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쓰는 일은 발견의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나 감격 없이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모두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발견의 기쁨은 그저 얻는 것이 아니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찾고 헤매다가 찾고 발견하여 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알게 된 것이든 그 알게 된 것을 토대로 생각하여 발견하게 된 것이든 그 발견은 즐거움이고 기쁨입니다. 그 발견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 설교요 글입니다.
우주와 우리 삶의 사소한 것에 숨어 계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당신을 계시하시지만 또한 온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자에게 만나지시는 하나님, 모든 인간은 그 하나님을 만날 때 궁극적인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신 특별 계시의 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 안에만 숨어 계시지 않으시고 만물 가운데도 숨어 계십니다.
천지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천지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 가운데 숨어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시기도 하면서 동시에 찾아지기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어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면서 자신을 숨기시는 은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찾아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고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학문을 통해서 정치와 경제를 통해서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파종과 추수를 통해서 사소한 일상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산 모범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시편 19편을 쓴 다윗입니다. 시편 19편 1-6절은 자연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고, 7-14절은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장 18절과 10장 18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에 대한 진노의 불가피성과 자연 계시만으로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만나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 렘 29:13-14 -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을 만나듯이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뜻과 행위와 능력과 지혜를 보고 깨닫고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도 행하시고 공중을 나는 바람과 햇빛과 천체와 작은 미생물까지도 사랑으로 섭리하시고 통치하십니다. 법과 정의와 질서를 존중하고 지키며 그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과 손길을 발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전도와 봉사와 구제에 힘쓰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정치와 교육과 경제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좀 더 가슴에 와 닿는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가끔 미처 하지 못한 부엌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부는 그것을 의식하면서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설거지를 빨리 해 치우고 다른 일을 해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설거지 하고 성경공부 하러 가야지, 빨리 거실 청소하고 금요기도회에 가야지, 혹은 빨리 세탁기 돌리고 산책을 가거나 음악회에 가야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설거지나 청소는 빨리 해치워야 할 일입니다. 설거지 하는 일에 소중한 부분들, 이를테면 설거지나 청소 하는 일의 과정과 방법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쉽게 간과합니다. 물을 만지고 더러운 것을 씻고 깨끗한 그릇을 보고 만지는 좋은 느낌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너무 가볍게 또는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너무 하찮은 것이라면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설거지를 하면서 이웃에게 좋은 일하고 나아가서는 인류에게 좋은 일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을 아껴 사용하고 세제를 덜 쓰는 것도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하는 것이고 인류를 위하고 미래의 후손들을 위하는 일입니다. 생태환경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의 소중함을 깨닫고 행하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수단으로만 취급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목회, 선교, 교육, 구제, 봉사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나지만 청소나 설거지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설거지와 청소가 경우에 따라서는 기도회 참석하는 것이나 산책하는 것이나 음악회에 가는 것보다 소중할 수가 있습니다. 일 자체가 더 중요한 것도 있고 덜 중요한 것도 있지만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면 하찮게 여기거나 귀찮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흙을 만지는 것이 좋습니다. 흙 속에 온갖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흙이라는 토대가 없다면 무엇이 가능할까요? 흙이 땅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흙 한 줌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흙이 곧 토지이기 때문입니다. 흙에는 온갖 종류의 흙이 있습니다. 농사짓기 좋은 흙이 있고 건축하기에 좋은 흙이 있고 그릇 만들기에 좋은 흙이 있습니다. 이 흙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옵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인간이 사용하는 것이 모두 흙에서 나옵니다. 저는 흙과도 친하게 지냅니다. 그러다 보면 지렁이도 만나고 땅강아지도 만나고 거미도 만나고, 온갖 미생물이 거기서 상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신기합니다. 온갖 생명이 흙을 토대로 살아갑니다. 최첨단 과학기술도 흙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인류는 앞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흙의 신비를 다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컴퓨터나 기계 문명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더 공부해야 하고, 무엇보다 특히 현대인들은 흙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그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일반 서적 안에도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갖 원리와 진리가 그분께서 만드신 만물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발견하고 만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책을 읽거나 흙을 만지거나 청소를 하다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설교자의 기쁨입니다. 피상적으로 지나가면 발견하지 못하는 진리를 좀 생각하고 노력하면 발견하고 맛볼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합니다. 시인이나 예술가나 과학자들이 가만히 앉아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글을 잘 쓰시던데, 글 잘 쓰는 것도 기술인가 봅니다. 글 쓰시는 재주가 있으십니다.”라고 합니다. 칭찬으로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물론 기술이나 재주로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재주나 기술로 글을 쓰는 사람은 “지식의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나 글쓰기를 기술이나 재주로 하면 안 됩니다.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쓰는 일은 발견의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나 감격 없이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모두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발견의 기쁨은 그저 얻는 것이 아니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찾고 헤매다가 찾고 발견하여 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알게 된 것이든 그 알게 된 것을 토대로 생각하여 발견하게 된 것이든 그 발견은 즐거움이고 기쁨입니다. 그 발견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 설교요 글입니다.
우주와 우리 삶의 사소한 것에 숨어 계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당신을 계시하시지만 또한 온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자에게 만나지시는 하나님, 모든 인간은 그 하나님을 만날 때 궁극적인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신 특별 계시의 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 안에만 숨어 계시지 않으시고 만물 가운데도 숨어 계십니다.
천지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천지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 가운데 숨어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시기도 하면서 동시에 찾아지기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어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면서 자신을 숨기시는 은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찾아진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고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학문을 통해서 정치와 경제를 통해서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파종과 추수를 통해서 사소한 일상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산 모범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시편 19편을 쓴 다윗입니다. 시편 19편 1-6절은 자연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고, 7-14절은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장 18절과 10장 18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에 대한 진노의 불가피성과 자연 계시만으로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만나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 렘 29: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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