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계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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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6-09-2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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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 씨의 열다섯 자로 된 시가 있습니다. 제목은 “그 꽃”입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세상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도 많습니다. 만질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많고, 우리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도 많고, 만질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소리만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만 만지며 삽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술가들과 시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듣게 합니다. 그림이나 시나 음악 같은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듣게 되는 것으로 감탄하기도 합니다. 과학자들도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원리들을 발견하여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류는 이런 특별한 사람들이 발견한 진리와 사실과 원리와 가치들을 발견하여 그 혜택들을 누리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라갈 때는 보지 못한 꽃을 내려올 때 보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경험입니다. 이 시가 인상적인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그 일상의 경험을 시인은 인간 삶의 메타포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 시를 몇몇 분들에게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왜 올라갈 때는 보지 못하고 내려올 때 보았을까요?” 시인의 발견과는 상관없이 독자들은 저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공에 집착하여 산을 오르듯 사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꽃이 보이지 않지만 실패의 내리막길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보였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산을 오를 때는 시야가 좁아서 못 보았고 내려올 때는 시야가 넓어져서 볼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독자들은 한 시인의 발견을 통해 또 다른 사실과 진리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과 과학과 문학과 예술이 그렇고 농업과 목축과 산업도 숨겨져 있는 사실과 원리들을 발견하여 인류에게 공헌하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고 하나님 나라가 그렇고 하나님의 뜻이 그렇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드러낸다는 뜻인데, 드러낸다는 것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계시가 점진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가 점진적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본 계시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본 계시보다 더 밝은 계시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울에게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더 밝게 드러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아직까지 우리도 하나님의 계시를 희미하게 또는 부분적으로 알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전보다는 더 밝아졌지만 여전히 감추어진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객관적 계시와 주관적 깨달음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계시가 완성되었지만 종말과 내세를 생각할 때 여전히 감추어 진 부분이 많고, 이미 완연히 드러난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 각자가 주관적으로 깨닫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계시가 점진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도 비유를 사용하여 깨달은 진리를 설명합니다. 진리를 점진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된 계시이지만 그 완성 된 계시 안에 아직까지 감추어진 부분이 많습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계시가 드러내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도 시대와 개인에 따라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찾고 알고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알고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까지도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한 마리 양을 잃은 양치기’(3-7절) 비유, 둘째는 ‘드라크마 한 개를 잃은 여자’(8-10절) 비유, 세 번째는 ‘둘째 아들을 잃은 아버지’(11-32절) 비유입니다. 세 비유는 사실 한 가지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잃었다가 다시 찾은 자의 기쁨을 이야기 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나 드라크마 한 개나 집 나간 둘째 아들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가리킵니다. 그 죄인은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이 이 비유들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유란 어떤 사실이나 진리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당시에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을 설명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깨달음이 전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들을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왜곡하고 있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자타가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비유 자체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오해와 왜곡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와 집 나간 둘째 아들을 찾았다는 사실은 기쁨의 존재론적 토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경험이 많아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그건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모험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모험과 결단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숨어 있는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어 있는 그 무엇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생각도 안 하고 고민도 안 합니다. 백 마리 중 한 마리 정도 잃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 한 마리를 찾았다고 두 마리 양을 잡아 잔치를 하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스마트하고 이지적이고 합리적이고 똑똑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숨어 있는 진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드라크마 한 개를 잃어버려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찾아야겠다는 진지한 노력도 하지 않고, 그래서 그걸 찾는 기쁨도 모릅니다. 시인이나 예술가나 과학자 같은 이들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드라마를 만드는 작가나 영화를 만드는 이들조차 숨어 있는 그 무엇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바른 태도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은 정말 수준 낮은 인생입니다.
이 비유들이 잃어버린 그 무엇, 우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는 것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찾지 않고 사는 이들에게 좀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살라는 교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들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소중한 진리를 찾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잃어버린 것이란 결국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상이나 음성이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계시하시기도 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밝히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미미하여 소홀히 여겨지고 관심조차 두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뜻만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쩌시면 그들에게 숨어계시는지도 모릅니다. 뉴욕 복음화와 조국의 통일과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열심을 내면서 법을 어기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약하고 소외된 자를 무시하고 명예나 인기나 돈을 좋아하고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까지 숨어 계실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 1:5 -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술가들과 시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듣게 합니다. 그림이나 시나 음악 같은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듣게 되는 것으로 감탄하기도 합니다. 과학자들도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원리들을 발견하여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류는 이런 특별한 사람들이 발견한 진리와 사실과 원리와 가치들을 발견하여 그 혜택들을 누리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라갈 때는 보지 못한 꽃을 내려올 때 보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경험입니다. 이 시가 인상적인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그 일상의 경험을 시인은 인간 삶의 메타포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 시를 몇몇 분들에게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왜 올라갈 때는 보지 못하고 내려올 때 보았을까요?” 시인의 발견과는 상관없이 독자들은 저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공에 집착하여 산을 오르듯 사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꽃이 보이지 않지만 실패의 내리막길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보였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산을 오를 때는 시야가 좁아서 못 보았고 내려올 때는 시야가 넓어져서 볼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독자들은 한 시인의 발견을 통해 또 다른 사실과 진리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과 과학과 문학과 예술이 그렇고 농업과 목축과 산업도 숨겨져 있는 사실과 원리들을 발견하여 인류에게 공헌하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고 하나님 나라가 그렇고 하나님의 뜻이 그렇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드러낸다는 뜻인데, 드러낸다는 것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계시가 점진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가 점진적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본 계시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본 계시보다 더 밝은 계시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울에게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더 밝게 드러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아직까지 우리도 하나님의 계시를 희미하게 또는 부분적으로 알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전보다는 더 밝아졌지만 여전히 감추어진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객관적 계시와 주관적 깨달음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계시가 완성되었지만 종말과 내세를 생각할 때 여전히 감추어 진 부분이 많고, 이미 완연히 드러난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 각자가 주관적으로 깨닫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계시가 점진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도 비유를 사용하여 깨달은 진리를 설명합니다. 진리를 점진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된 계시이지만 그 완성 된 계시 안에 아직까지 감추어진 부분이 많습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계시가 드러내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도 시대와 개인에 따라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찾고 알고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알고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까지도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한 마리 양을 잃은 양치기’(3-7절) 비유, 둘째는 ‘드라크마 한 개를 잃은 여자’(8-10절) 비유, 세 번째는 ‘둘째 아들을 잃은 아버지’(11-32절) 비유입니다. 세 비유는 사실 한 가지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잃었다가 다시 찾은 자의 기쁨을 이야기 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나 드라크마 한 개나 집 나간 둘째 아들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가리킵니다. 그 죄인은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이 이 비유들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유란 어떤 사실이나 진리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당시에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을 설명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깨달음이 전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들을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왜곡하고 있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자타가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비유 자체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오해와 왜곡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와 집 나간 둘째 아들을 찾았다는 사실은 기쁨의 존재론적 토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경험이 많아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그건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모험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모험과 결단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숨어 있는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어 있는 그 무엇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생각도 안 하고 고민도 안 합니다. 백 마리 중 한 마리 정도 잃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 한 마리를 찾았다고 두 마리 양을 잡아 잔치를 하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스마트하고 이지적이고 합리적이고 똑똑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숨어 있는 진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드라크마 한 개를 잃어버려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찾아야겠다는 진지한 노력도 하지 않고, 그래서 그걸 찾는 기쁨도 모릅니다. 시인이나 예술가나 과학자 같은 이들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드라마를 만드는 작가나 영화를 만드는 이들조차 숨어 있는 그 무엇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바른 태도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은 정말 수준 낮은 인생입니다.
이 비유들이 잃어버린 그 무엇, 우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는 것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찾지 않고 사는 이들에게 좀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살라는 교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들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소중한 진리를 찾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잃어버린 것이란 결국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상이나 음성이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계시하시기도 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밝히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미미하여 소홀히 여겨지고 관심조차 두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뜻만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쩌시면 그들에게 숨어계시는지도 모릅니다. 뉴욕 복음화와 조국의 통일과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열심을 내면서 법을 어기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약하고 소외된 자를 무시하고 명예나 인기나 돈을 좋아하고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까지 숨어 계실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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