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살아내야 할 삶의 집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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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6-09-1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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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150개 시편은 그 내용이 찬송임과 동시에 기도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적 존재이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 삶의 모든 행위가 찬송과 기도의 특징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도 가사 내용이 기도인 것이 많은 것처럼 시편의 대부분이 찬송 시로 구성 되어 있지만 내용이 기도인 것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 존재와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 되었다는 전제에서 주는 교훈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와 찬송과 기도의 구체적 행위가 되는 특징을 드러내야 합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인간 삶의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가리켜 만민이 기도하는 집(마 21:13, 막 11:17, 눅 19:46)이라고 하신 것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기도를 드렸고 백성의 선생들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까지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도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기도해 왔지만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바르게 기도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신들이 전통적 가르침을 따라 드렸던 기도가 잘 못 된 기도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또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기도를 가르치고 배웠겠지만 기도의 완벽한 모델은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내용을 바르게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기도란 기도의 형식으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은 매일 새벽기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금요기도, 수요기도, 금식기도, 산기도, 연합으로 모여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렇게는 못해도 매일 아침 일어나서 잠깐 기도하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 간단하게 기도하기도 하고, 그 외에 따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식사 시간에 기도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기도 안 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제대로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기도는 기독교인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교인들은 묵주기도나 마리아에게 하는 기도나 성자에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성지 메카를 향하여 하루에 서너 번씩 엎드려 기도합니다. 불교도들도 기도를 합니다. 샤머니즘이나 민속종교를 믿는 이들도 나름대로 기도를 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고 심지어 무 종교인 사람들도 나름의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문제는 기독교인이 하는 기도가 이방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의 기도와 이방 종교의 기도를 비슷하거나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물질적 복이나 병을 치료하는 것이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굳이 기도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사고가 발생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에는 기도 하지 않아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는 경험과 확신 때문인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고가 난다면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이들은 남들이 하는 새벽기도 금요 철야기도를 하지 않아도 별 탈이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누구나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만나게 될까를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기도의 참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생물학적 아버지와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대상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할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입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잘 아는 지인에게도 어려운 문제를 의논하고 부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기도드릴 분은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밀접한 관계를 전제하고야 기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기도란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가깝지도 않으면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너무 어색합니다. 이는 마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경우 부탁하는 사람도 확신이 없고 부탁을 받는 사람도 도와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무엇을 부탁하거나 들어준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경험적 깊은 관계가 기도에 전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다는 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공통 관심사가 많다는 뜻이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대화가 많아지고 관계가 깊어지게 합니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기도가 곧 대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하나님과 나 자신의 공통 관심사가 있기나 한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 공통관심사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삶에서 현실로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 프로그램에는 성실하게 참여할 수 있어도 영적 생명은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나의 삶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토대입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와 같은 관계의 토대에서 무엇을 기도할지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기도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그렇게 절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왜곡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심판 주 이시며 만물과 일상의 현실을 규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생명을 왜곡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생명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까지 사람보다 자본이나 권력이나 인기와 명예를 더 귀한 가치로 취급합니다. 어떤 국가나 기업이 진정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생명을 자본이나 권력보다 귀하게 여길까요? 생명 존중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행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왜곡할 수밖에 없고 생명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반생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생명을 왜곡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한계와 수준을 성경적 시각으로 바르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마 6:9 -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인간 삶의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가리켜 만민이 기도하는 집(마 21:13, 막 11:17, 눅 19:46)이라고 하신 것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기도를 드렸고 백성의 선생들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까지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도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기도해 왔지만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바르게 기도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신들이 전통적 가르침을 따라 드렸던 기도가 잘 못 된 기도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또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기도를 가르치고 배웠겠지만 기도의 완벽한 모델은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내용을 바르게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기도란 기도의 형식으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은 매일 새벽기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금요기도, 수요기도, 금식기도, 산기도, 연합으로 모여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렇게는 못해도 매일 아침 일어나서 잠깐 기도하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 간단하게 기도하기도 하고, 그 외에 따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식사 시간에 기도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기도 안 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제대로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기도는 기독교인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교인들은 묵주기도나 마리아에게 하는 기도나 성자에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성지 메카를 향하여 하루에 서너 번씩 엎드려 기도합니다. 불교도들도 기도를 합니다. 샤머니즘이나 민속종교를 믿는 이들도 나름대로 기도를 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고 심지어 무 종교인 사람들도 나름의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문제는 기독교인이 하는 기도가 이방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의 기도와 이방 종교의 기도를 비슷하거나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물질적 복이나 병을 치료하는 것이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굳이 기도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사고가 발생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에는 기도 하지 않아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는 경험과 확신 때문인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고가 난다면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이들은 남들이 하는 새벽기도 금요 철야기도를 하지 않아도 별 탈이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누구나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만나게 될까를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기도의 참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생물학적 아버지와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대상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할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입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잘 아는 지인에게도 어려운 문제를 의논하고 부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기도드릴 분은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밀접한 관계를 전제하고야 기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기도란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가깝지도 않으면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너무 어색합니다. 이는 마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경우 부탁하는 사람도 확신이 없고 부탁을 받는 사람도 도와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무엇을 부탁하거나 들어준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경험적 깊은 관계가 기도에 전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다는 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공통 관심사가 많다는 뜻이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대화가 많아지고 관계가 깊어지게 합니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기도가 곧 대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하나님과 나 자신의 공통 관심사가 있기나 한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 공통관심사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삶에서 현실로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 프로그램에는 성실하게 참여할 수 있어도 영적 생명은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나의 삶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토대입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와 같은 관계의 토대에서 무엇을 기도할지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기도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그렇게 절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왜곡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심판 주 이시며 만물과 일상의 현실을 규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생명을 왜곡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생명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까지 사람보다 자본이나 권력이나 인기와 명예를 더 귀한 가치로 취급합니다. 어떤 국가나 기업이 진정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생명을 자본이나 권력보다 귀하게 여길까요? 생명 존중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행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왜곡할 수밖에 없고 생명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반생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생명을 왜곡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한계와 수준을 성경적 시각으로 바르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마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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