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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발치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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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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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그 시작에서부터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까지가 줄곧 박해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도 시련과 박해와 죽음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기독교에 가해지는 시련과 박해는 궁극적으로 기독교를 없애려는 목적 하에 자행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시련과 박해는 기독교가 건강하게 자라는 숙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시련과 박해는 기독교가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있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좋은 토양이 된 것입니다. 시련과 박해가 기독교를 얼마나 건강하게 자라게 했던지 얼마 안 가서 기독교는 자기에게 시련과 박해를 가하던 세력들을 완전히 점령해 버렸습니다. 물론 기독교가 물리적으로 강하게 되어 적들을 점령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으로, 땅에 심겨진 겨자씨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간 것입니다.

이 같이 기독교가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세상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이론과 방법론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누룩과 겨자씨로서의 하나님 나라 정체성에 충실 하려는 노력 밖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인 로마를 복음으로 평정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로마 제국을 복음으로 점령하기 위해 어떤 선교 프로젝트를 기획한 적도 없고 모든 교회가 의도적으로 힘을 집결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의도적인 기도회나 연합회나 대회 같은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 같은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에만 충실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 나라 능력으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이 아닌 방법론을 메시지로 삼는 현대 교회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하나님 나라 원리에 대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부터 교회는 세상 정부의 강력한 물리력의 보호 아래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세상 정부가 제공하는 안녕과 특권과 향응에 도취되어 빛과 소금의 정체성을 점점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러한 상황을 걱정하는 몇몇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와 세상 정부가 손을 잡은 상황에서는 권력과 부가 곧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라는 논리가 너무나 쉽게 정당화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경건한 개인도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대한 경건한 사람들의 대안이 교회와 세속 정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도원 운동입니다.

시련과 박해의 한 가운데 있던 교회의 최고의 가치는 순교였습니다. 순교가 지고의 가치로 여겨지던 자리를 권력과 부의 향유가 점령하게 되자 경건한 자들은 수도원으로 들어가 그 자리를 금욕의 덕으로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수도원 생활은 독신 생활과 금욕 및 금식을 예찬하는 데서 일종의 영적 유토피아 운동으로 부각되었습니다.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지도자들은 영과 육의 대립관계를 금욕으로 해결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적 풍토 속에 기독교 수도원을 최초로 창설한 사람은 주후 250년경에 이집트 코마에서 태어난 안토니우스였습니다. 그는 성 안토니우스, 대수도원장 안토니우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사막의 안토니우스, 은자 안토니우스, 압바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모든 수사들의 교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와 콥트 교회에서는 1월 30일을 그의 축일로 지키고 가톨릭교회에서는 1월 17일을 축일로 지킵니다.

그는 유명한 초대 교부 아다나시우스와 콘스탄틴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감화를 끼쳤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은둔 수도원은 후에 파코미우스에 의해 개혁되면서 수도원의 사회성이 강조되어 사회에 기여하는 수도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이 바로 이집트 사막의 금욕주의자 안토니우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은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강조하던 이집트 사막의 수도원 운동을 개혁 발전시켜 자신들의 구원문제에만 집착하던 데서 사회봉사, 교육활동, 선교사업 등에도 주력하였습니다. 베네딕트는 당시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금욕주의나 초인간적인 훈련 방법이나 지나친 신비주의를 지양하고, 기도하며 일하라는 명제를 내걸고 노동과 명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수도원(修道院)은 현실에서 격리된 장소에서 기독교의 수도사나 수녀들이 생활하는 장소입니다.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매일 미사와 성무시도(聖務時禱)를 행하고 또 학문을 연구하고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였습니다. 중세에 세워진 수도원은 금역(禁域)으로 수도자와 특정한 사람밖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수도원은 집회실, 객실, 응접실, 성당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큰 수도원은 수련원, 병실, 채원(菜園), 축사(畜舍), 묘지까지 일체의 것을 갖추고 있어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수도원 내에서는 하루 종일 또는 일정한 시간 침묵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대부분 수도사 양성을 위하여 수도원학교를 운영하였으나 외부의 그리스도인 자녀를 입학시켰던 수도원도 있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순례자들을 유숙시키는 시설을 갖춘 곳도 많았습니다.

근세에 설립된 수도원은 그 폐쇄성이 완화되어 수도자가 외부에 나가 전도, 교육, 사회사업 등에 종사하고 수도원은 그 활동의 본부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세워지는 수도원은 수도원 정신을 이어 받은 기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 운동은 교회가 그 본래의 정체성을 잃게 되자 예수님 잘 믿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총체적 세속화의 거센 영향을 거스를 수 없어서 속된 현실을 떠나 사막이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경건하게 살고자 한 것입니다. 수도원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경건 운동입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그 정체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 예수님 잘 믿는 것이었고, 중세에는 철저히 금욕하는 것이 예수님 잘 믿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수도원의 금욕생활에서는 노동과 기도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이후에는 수도원이 아닌 시장 한 가운데서의 금욕생활이 바른 경건생활임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사막이나 산속에 들어가 경건하게 금욕적으로 사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시장 한가운데서의 금욕을 강조하였습니다. 시장 한가운데서의 금욕이란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이익을 근검 절약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 개혁 이후에 이러한 노력으로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어느 정도는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21세기의 교회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시련과 박해를 받아오던 초대교회가 로마 국 교회가 되면서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되자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처럼 21세기 교회는 자본주의의 향응에 도취되어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회는 은사 주의 운동을 도입하기도 하고, 사회 활동을 강조하기도 하고, 선교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방법들 가운데 이 시대의 세속적 영향인 자본주의 기복적인 가치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현대 교회가 하는 활동들은 거의 돈과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현대 교회가 하는 활동과 일들은, 즉 현대 교회의 능력은 한 마디로 돈과 권력입니다. 한국의 예를 들면 순복음중앙교회, 금란교회, 사랑의 교회는 돈과 권력이 교회의 능력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몇 큰 교회를 예로 들었지만 이런 교회들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도 한국에 있는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누구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바로 보려는 노력입니다. 선교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고, 부흥은 돈과 권력을 확보하려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돈과 권력의 확보는 소위 자본주의의 향응을 즐기며 갑질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많은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본연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 놓고 마르다는 음식 장만하는 여러 가지 일로 염려하며 근신하였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 듣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일 잘 하는 성실한 보통 사람이었으나 여러 가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였고 마리아는 한 가지 일에 즐겨 참여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자기를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가 못마땅하여 자기를 돕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보다 마리아의 선택이 좋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엌일과 말씀 듣는 일을 비교하신 것이 아니고 많은 일로 인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과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따라 중요한 한 가지 일에 기쁨으로 집중하는 것을 비교하셨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여자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상당한 결단이 필요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경건한 삶의 태도를 제시하는 모델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일로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분주하게 많은 일을 하느라 염려하고 근심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 많습니다. 그 염려와 근심 때문에 갈등과 분쟁과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일이 음식 만드는 일이든 말씀을 듣는 일이든 중요성의 우선순위에 따라 한 가지 일에 집중한 마리아의 좋은 선택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눅 10:4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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