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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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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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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4일 황상하 목사의 신앙덕담 『 전제와 같이 』 공자의 “논어"는 그가 죽은 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편집하여 만든 책입니다. 그 책 위정편(爲政篇)에 공자가 자신의 인생론을 여섯 줄로 줄인 대목이 나옵니다.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이립(三十而立), 서른 살에 뜻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입장이 뚜렷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사십이 되어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어졌고,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오십이 되어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육십이 되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따를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70이 되고 보니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법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가 않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공자는 철저한 자기 훈련을 통해 실로 대단한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흔히 우리가 실속 없는 이론적 주장을 공자왈 맹자왈이라고 비하하지만 공자는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대단히 절제를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심오한 깨달음에 도달하였으면서도 자서전 한 권 쓰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서신을 기록하였지만 그의 생애를 단 세 구절로 요약하였습니다. 그 세 구절의 핵심은 자신의 생애가 전제와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은 공자의 가르침을 능가하는 교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자의 깨달음은 인간의 지혜이고 바울의 교훈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한 성경을 읽고 배우면서도 감동이 없고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딱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예수다.’는 것이고, 둘째는 ‘너의 곁에 있는 약자가 예수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곁의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를테면 아내에게 잘 하는 것이 예수님께 잘 하는 것이고 자녀에게 잘 하는 것이 예수님께 잘 하는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나보다 약한 사람이 다 예수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은 ‘네가 예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만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교훈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작은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그런 의식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엡 2:17절에서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에 가셔서 평안을 전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치 예수님께서 직접 에베소에 가셔서 평안을 전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바울 자신이 에베소에 간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가신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예수님의 ‘네가 예수다.’라는 교훈이 육화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갈 2:20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은 내가 내가 아니라 내가 곧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 온 자기의 생애를 단 세 구절로 줄였습니다(딤후 4:6-8).

공자와 바울의 다른 점은, 공자는 자기가 노력하여 높은 수준이 도달했다는 것이고,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고 한 점입니다. 공자는 자기를 실현하는 것에 집중하였고, 바울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다릅니다. 실존주의는 자기실현에 집착합니다. 자기실현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설교하는 설교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에 집착합니다. 실제로는 자기를 실현하는 데 집착하면서도 말로만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기름을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전제는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 부어 드렸다는 의미로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는 말로 자기 생을 묘사하였습니다. 자기의 생애를 주를 위하여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자기 성취에 집중하였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소비하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의 생애를 관제처럼 온전히 다 부어드렸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재물도 건강도 시간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 써 버렸습니다.

좋은 연료는 완전하게 연소되는 연료입니다. 완전히 다 타서 매연이 없는 연료입니다. 모두가 에너지로 소모되는 연료입니다. 주유소에 가면 어떤 개스를 넣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옵션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울트라, 혹은 수퍼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프리미엄이고 가장 싼 것이 레귤러입니다. 좋은 개스는 옥탄가(octane value)가 높은 것입니다. 옥탄 밸루가 높을수록 연소율이 좋고 파워도 좋고 그렇지 못한 개스보다 친환경적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애를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완전 연소한 인생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옥탄 밸루가 높아 매연을 별로 일으키지 않은 생을 산 것입니다. 스러져 한줌의 재만 남긴 인생입니다. 여력이 없습니다. 다 바친 인생입니다. 바울의 생애는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어서 위대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아무 것도 남기는 것이 없이, 관제처럼 부어지는 생애로 마감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승리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맨발의 왕자 아베베 비킬라는 올림픽 마라톤에서 2연속 금메달을 딴 에티오피아 선수입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과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동경 올림픽에서 마라톤 결승점에 들어와서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트랙을 돌면서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아직도 더 뛸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직 15km는 더 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대단한 마라토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마라토너는 아닙니다. 훌륭한 마라토너는 꼴인 지점에 도착하여 푹 하고 쓰러져야 훌륭한 마라토너입니다. 그 쓰러짐이 사력을 다하여 달렸다는 메시지입니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는 꼴인 지점에 도착하여 더 이상 뛸 수 없어서 푹 쓰러졌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한 바퀴 돌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황영조는 정말 훌륭한 마라토너입니다. 아베베는 최선을 다하여 뛰지 않았습니다. 황영조는 최선을 다하여 뛰었습니다. 마라토너가 15km나 더 뛸 수 있는 힘을 무엇 하러 남겨 놓았을까요? 최선을 다하는 선수가 훌륭한 선수입니다. 더 이상 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선수,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한 선수, 에너지를 완전히 다 연소시킨 선수가 위대한 선수입니다. 황영조처럼 결승점에 도착하여 푹 쓰러지는 선수가 훌륭한 선수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주를 위해 관제처럼 쏟아 부어졌습니다. 한 방울의 남김도 없이 주님을 위해 그의 인생을 완전하게 연소시켜버렸습니다. 완전 연소의 인생입니다. 부러운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아베베처럼 힘을 남기려고 합니다. 마라톤 선수의 남은 힘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도 그렇습니다. 남길 필요가 없습니다. 다 쓰고 가야 합니다. 전제처럼 부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썼습니다. 전제처럼 부어지고도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산 자신의 생을 의의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고,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생애입니다. 후회가 없는 생애입니다. 부러운 생애입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생애입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디엘 무디, 조나단 에드워즈, 브레이너드,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김용기, 박윤선, 한경직 같은 분들이 그렇게 산 분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그렇게 사는 것을 예수님에게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물과 피를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쏟으셨습니다. 바울이 완전 연소의 생을 산 것은 예수님께 배운 것입니다. 바울도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은 전제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어지는 생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바울처럼 “전제와 같이”로 고백되고 설명되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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