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특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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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6-08-0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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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은 모양과 성질과 그 외의 여러 가지 속성을 분석하거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모양이나 성질이나 그 어떤 속성을 분석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공기를 비롯하여 여러 화학물질 같은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어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공기나 어떤 화학물질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나 공간의 패러다임 안에서 규정할 수 없고 그래서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바울의 설명은 모든 존재에 대한 참으로 엄청난 무게와 권위를 지닌 진술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탐구한 모든 존재에 대한 온갖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이나 사상과 논쟁을 바울은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평정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인간을 비롯하여 교회까지도 포함됩니다. 인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죽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 없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고, 교회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교회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영원하지 않지만 예수를 믿어 부활하게 되면 영원한 존재가 되고, 땅 위의 교회는 영원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우리의 몸은 보이는 것이고 이 땅의 교회도 보이는 것이지만 부활의 몸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영원한 교회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우리의 몸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의 생명이 되면 영원합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부활은 절대적인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입니다. 더 이상 죄와 죽음이 개입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온갖 시련과 절망과 고통을 참고 견디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여기 겉 사람은 육체를 가리키고 낡아진다는 것은 죽음을 비롯하여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시련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고백적으로 증거 하였습니다. 고후 11:23절 이하를 보면 그는 투옥되고, 매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습니다. 또한 온갖 위험과 협박과 미움을 받았습니다. 암살당할 위기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런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고후 4:8-10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공동 번역이 “짓눌리고 찌부러지다”라고 사실적으로 잘 번역한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힘과 기독교의 힘을 비교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로마는 초강대국이고 기독교는 사이비 이단으로 취급 받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건강도 좋지 않아서 언제나 의사 누가를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위험한 뱃길, 열악한 감옥, 죄수의 몸, 유대교로부터 받는 이단 취급 등이 모두 그를 위축되고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까지 힘으로는 바울이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그들과 긴장이나 대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그를 짓누르고 찌부러지게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당당했던 것은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만 생각하면 젊음이 부럽지만 속 사람을 생각하면 나이 먹는 것이 즐겁기도 합니다. 김형석 교수는 자기가 살아보니까 65세에서 75세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니까 그러한 깨달음에 무게를 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기가 황금기라고 한들 그 시기도 잠깐 지나가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75세를 지나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바울은 고후 5:2절 이하에서 “지금 우리는 여기서 탄식하면서 하늘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을 몸이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혀지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잘못 이해하면 이원론적 설명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원론을 가르치는 영지주의를 매우 경계하고 싫어합니다. 바울의 설명은 몸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 생명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설명은 이원론도 아니고 어떤 철학적 설명도 아닙니다. 영적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으로 지금의 장막이 무너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신앙고백임과 동시에 복음에 대한 선언이고 설명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은 죽음에 지배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신앙의 경지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수준에서 보면 바울은 오르지 못할 나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바울의 수준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날로 새로워진다는 면에서는 바울이나 우리가 같습니다. 그리고 날로 새로워지는 것은 바울이나 우리나 다 같이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초월적 신앙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신앙은 하늘의 영원한 집에 대한 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광신자의 주장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집을 현실로 경험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늘의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절
따라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바울의 설명은 모든 존재에 대한 참으로 엄청난 무게와 권위를 지닌 진술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탐구한 모든 존재에 대한 온갖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이나 사상과 논쟁을 바울은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평정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인간을 비롯하여 교회까지도 포함됩니다. 인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죽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 없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고, 교회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교회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영원하지 않지만 예수를 믿어 부활하게 되면 영원한 존재가 되고, 땅 위의 교회는 영원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우리의 몸은 보이는 것이고 이 땅의 교회도 보이는 것이지만 부활의 몸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영원한 교회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우리의 몸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의 생명이 되면 영원합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부활은 절대적인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입니다. 더 이상 죄와 죽음이 개입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온갖 시련과 절망과 고통을 참고 견디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여기 겉 사람은 육체를 가리키고 낡아진다는 것은 죽음을 비롯하여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시련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고백적으로 증거 하였습니다. 고후 11:23절 이하를 보면 그는 투옥되고, 매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습니다. 또한 온갖 위험과 협박과 미움을 받았습니다. 암살당할 위기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런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고후 4:8-10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공동 번역이 “짓눌리고 찌부러지다”라고 사실적으로 잘 번역한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힘과 기독교의 힘을 비교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로마는 초강대국이고 기독교는 사이비 이단으로 취급 받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건강도 좋지 않아서 언제나 의사 누가를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위험한 뱃길, 열악한 감옥, 죄수의 몸, 유대교로부터 받는 이단 취급 등이 모두 그를 위축되고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까지 힘으로는 바울이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그들과 긴장이나 대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그를 짓누르고 찌부러지게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당당했던 것은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만 생각하면 젊음이 부럽지만 속 사람을 생각하면 나이 먹는 것이 즐겁기도 합니다. 김형석 교수는 자기가 살아보니까 65세에서 75세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니까 그러한 깨달음에 무게를 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기가 황금기라고 한들 그 시기도 잠깐 지나가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75세를 지나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바울은 고후 5:2절 이하에서 “지금 우리는 여기서 탄식하면서 하늘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을 몸이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혀지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잘못 이해하면 이원론적 설명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원론을 가르치는 영지주의를 매우 경계하고 싫어합니다. 바울의 설명은 몸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 생명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설명은 이원론도 아니고 어떤 철학적 설명도 아닙니다. 영적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으로 지금의 장막이 무너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신앙고백임과 동시에 복음에 대한 선언이고 설명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은 죽음에 지배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신앙의 경지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수준에서 보면 바울은 오르지 못할 나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바울의 수준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날로 새로워진다는 면에서는 바울이나 우리가 같습니다. 그리고 날로 새로워지는 것은 바울이나 우리나 다 같이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초월적 신앙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신앙은 하늘의 영원한 집에 대한 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광신자의 주장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집을 현실로 경험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늘의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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