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들의 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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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ㆍ2017-01-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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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
필자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는 요사이 직원들의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에도 2시간 정도의 교육이 있었고 그래서 참가하여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강사가 필자에게 다가오더니 “ 매일 일상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냐 ?” 라고 갑자기 질문하였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내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라는 대답이 나왔으며 동시에 참가자 대부분인 여자들의 입에서는 “와우~”하는 탄성이 나왔다.
그런데 강사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 그럼 하루에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느냐 ?” 그래서 “평일 날은 아침저녁으로 1시간 정도이며 주말에는 아마도 2시간 이상이다.”라고 답을 했더니 주위의 모든 여자들(거의 백인 중년여자)이 더 큰 탄성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필자에게 아내의 복을 허락하셨음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절실하게 깨닫는 요즈음이다. 그것은 바로 아내가 이야기하기(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누구를 만나도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여 금방 상대를 친구로 만드는 친화력이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필자는 나이가 들어도 일상생활에서 아내의 수다를 들어주며 아내 주위의 친구들과 아내가 접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매일 새롭게 알아가고 그런 와중에서 글 소재도 얻어낼 수 있어 일거양득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어제 아침에는 아내가 필자에게 찬양대에서 연습시간의 막간을 이용한 여자들의 수다를 전해주었다. 다름 아닌 “남편들의 잔소리”이며 이야기를 듣는 중에 글을 쓸 마음이 생겨 이곳에 올린다.
우리 부부가 섬기는 찬양대는 1부 예배의 시온찬양대이며 예배 시간이 아침 8시 반이기에 예배 참가자들도 대부분 장년과 노년충이고 찬양대원들 역시 그러하기에 60대 초반의 필자가 젊은 측(?)에 속하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찬양대의 남자들은 대부분 직장이나 사업을 그만두고 은퇴를 했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남편들의 잔소리가 늘어나며 특히 주방을 조금씩 장악하는 남편들의 잔소리( 왜 이것은 이곳에 놓아야지 그곳에 놓느냐, 냉장고안에 이런 것은 오래됐는데 왜 빨리 먹어치우지 않느냐,,)가 심해짐에 아내들의 언성이 높아지고 그래서 여자들이 모인 찬양대 연습시간에 남편들에 대한 성토대회가 열려 이구동성으로 동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왜 “남편들의 잔소리”가 생겨났으며 그래서 아내들의 성토 대상이 됐을까 ?
남자들은 원래 사전적 정의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라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이다.
자존심은 우리 삶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표현의 한 부분이다. 특히 대한민국 남자는 자존심을 목숨같이 여기는 풍조가 있다. 남자가 가지는 자존심의 가치는 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주요 지표로서 나타난다.
"남자라면 이 정도는 해야(가져야) 자존심이 살지"라는 의미는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남자들이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고민거리다. 이런 자존심을 평생 지니고 살아야하는 남자들의 숙명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며 심지어는 교회의 중직이나 목회자의 삶을 산다고 하여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그런 자존심으로 살아온 남자가 이제 평생 자존심과 긍지의 대명사인 생업을 접었을 때 상실감이 어떤 새로운 대상을 찾게 마련이며 그런 돌파구가 잘못 선정되어 주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제 주방 생활 수십 년의 고수인 아내에게 겁 없이 돌직구를 날렸다가 돌아오는 것은 타박뿐이며 그래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상하려고 잔소리로 무장하여 재도전하는 하는 것이다라는 필자의 추측은 과연 지나친 것일까 ?
과연 그렇다면 남편들은 어떤 돌파구를 선정하는 것이 올바르며 품위(?)있는 노년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
바햐흐로 세상은 여성 상위시대이며 모계사회로 변환하는 과정에 있다. 딸이 노후보장이라며 불과 몇 년 전까지의 아들 선호사상은 박물관의 박제화가 된지 오래고 장모가 득세하여 딸 부부를 조종 하며 여차하면 이혼도 불사하는 위협으로 사위를 조종하여 시부모는 며느리 눈치 보기에 바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구박당하는 새로운 풍속도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육체적인 힘이 경제 단위의 기본적인 힘이었으나 산업화가 가속될수록, 컴퓨터를 비롯한 IT 산업이 발달할수록 육체적인 힘보다는 지능적인 힘이 앞서가며 이런 추세는 여성들에게 경제적인 힘을 실어 주었고 여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한국뿐 아니라 대만에서도 최초의 여성 총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화가 될수록 경제적으로 수입이 늘어나 잘 산다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불안해하고 외로우며 이혼과 불륜이 증가하고 가정이 파괴되며 이혼과 재혼 속에 상처 입는 자녀들이 늘어나고 세상 살기가 더 복잡하여 “그때가 정말 살기 좋았지”하며 과거를 회상하며 살아가게 되는가.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말씀으로 돌아가 해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사탄의 세력은 맘모니즘을 앞세워 세상에서의 성공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남성들은 자신들의 뜻과 목표를 세우고 성공을 좇으며 대부분 가족과 완전 동떨어져서 자신들의 승진과 사업의 성공, 덕망 그리고 존경을 저들의 세상에 있는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찾기에 총력을 기울이나 이미 밖에서 에너지가 고갈되어 집에서는 거의 수동적이고 무심하며 무책임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남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에서의 영적 리더쉽과 가장으로서의 남편들과 아버지들의 참된 모습이 실종된 반면에 여성들은 시대적 조류에 따라 목소리가 점차 커지니 가정마다 흔들리기가 쉽고 타박과 이에 대항하는 잔소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표류하는 남편호가 제 위치로 복귀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
성경은 남편의 제 위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2-24)”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33절)”
그러면 어떻게 남편들은 나날이 변해가는 세상에서 아내에게 이런 복종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가 ?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28,29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이며, 영적인 리더라는 것인데 현대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맘모니즘이 극대화될수록, computer를 필두로 IT 산업이 발달하여 아내들의 경제권이 강화될수록 남편들의 머리가 수구러들고 입지가 좁아져서 가정에서 조차 발붙일 곳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자세히 보니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feeds and care)’ 이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남편이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하여야 아내에게서의 자발적인 복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남편들이 자신의 생업을 통하여 재화를 생산하고 이것을 아내에게 갖다 주는 육적인 양육 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양육이 병행하여야 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보호하기를’이란 단어가 가능한데 이는 어미 새가 새끼 새들을 끌어안고 그 깃털로 따뜻하고 아늑하게 보호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아내가 온유하고 조용한 영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아내에게 따뜻한 둥지를 제공하고, 안전하게 지지하고 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자가 강하고 독립적으로 자라도록 북돋우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여자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고 온유하고 순한 영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안전한 둥지와 영적 힘과 따스함을 공급하려면 남편의 엄청난 영적 리더쉽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감사하게도 필자는 큰돈은 못 벌어도 일용할 양식은 가능하며 20대 초반에 시작한 주일학교 교사를 필두로 성경 공부 교사를 수십 년 한 덕택에 아내에게는 육적 양식뿐만이 아니라 매일 가정예배에서 “매일성경”을 읽으며 영적인 양식도 나누고 있다.
이 세상이 점차로 ‘돈’의 위력에 끌려가는 세대이며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대이기에 교회 안에서 조차 영적인 질서가 흔들리는 가정들을 흔히 보고 접하는 요즈음이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영적인 질서가 올바르게 서있고 남편이 영적인 리더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면 “남편의 잔소리”도 관심이 있어 나오는 “사랑의 소리”가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 “남편의 잔소리”는 수십 년 주방의 고수 면전에서 소위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할 것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는 요사이 직원들의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에도 2시간 정도의 교육이 있었고 그래서 참가하여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강사가 필자에게 다가오더니 “ 매일 일상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냐 ?” 라고 갑자기 질문하였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내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라는 대답이 나왔으며 동시에 참가자 대부분인 여자들의 입에서는 “와우~”하는 탄성이 나왔다.
그런데 강사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 그럼 하루에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느냐 ?” 그래서 “평일 날은 아침저녁으로 1시간 정도이며 주말에는 아마도 2시간 이상이다.”라고 답을 했더니 주위의 모든 여자들(거의 백인 중년여자)이 더 큰 탄성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필자에게 아내의 복을 허락하셨음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절실하게 깨닫는 요즈음이다. 그것은 바로 아내가 이야기하기(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누구를 만나도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여 금방 상대를 친구로 만드는 친화력이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필자는 나이가 들어도 일상생활에서 아내의 수다를 들어주며 아내 주위의 친구들과 아내가 접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매일 새롭게 알아가고 그런 와중에서 글 소재도 얻어낼 수 있어 일거양득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어제 아침에는 아내가 필자에게 찬양대에서 연습시간의 막간을 이용한 여자들의 수다를 전해주었다. 다름 아닌 “남편들의 잔소리”이며 이야기를 듣는 중에 글을 쓸 마음이 생겨 이곳에 올린다.
우리 부부가 섬기는 찬양대는 1부 예배의 시온찬양대이며 예배 시간이 아침 8시 반이기에 예배 참가자들도 대부분 장년과 노년충이고 찬양대원들 역시 그러하기에 60대 초반의 필자가 젊은 측(?)에 속하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찬양대의 남자들은 대부분 직장이나 사업을 그만두고 은퇴를 했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남편들의 잔소리가 늘어나며 특히 주방을 조금씩 장악하는 남편들의 잔소리( 왜 이것은 이곳에 놓아야지 그곳에 놓느냐, 냉장고안에 이런 것은 오래됐는데 왜 빨리 먹어치우지 않느냐,,)가 심해짐에 아내들의 언성이 높아지고 그래서 여자들이 모인 찬양대 연습시간에 남편들에 대한 성토대회가 열려 이구동성으로 동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왜 “남편들의 잔소리”가 생겨났으며 그래서 아내들의 성토 대상이 됐을까 ?
남자들은 원래 사전적 정의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라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이다.
자존심은 우리 삶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표현의 한 부분이다. 특히 대한민국 남자는 자존심을 목숨같이 여기는 풍조가 있다. 남자가 가지는 자존심의 가치는 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주요 지표로서 나타난다.
"남자라면 이 정도는 해야(가져야) 자존심이 살지"라는 의미는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남자들이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고민거리다. 이런 자존심을 평생 지니고 살아야하는 남자들의 숙명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며 심지어는 교회의 중직이나 목회자의 삶을 산다고 하여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그런 자존심으로 살아온 남자가 이제 평생 자존심과 긍지의 대명사인 생업을 접었을 때 상실감이 어떤 새로운 대상을 찾게 마련이며 그런 돌파구가 잘못 선정되어 주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제 주방 생활 수십 년의 고수인 아내에게 겁 없이 돌직구를 날렸다가 돌아오는 것은 타박뿐이며 그래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상하려고 잔소리로 무장하여 재도전하는 하는 것이다라는 필자의 추측은 과연 지나친 것일까 ?
과연 그렇다면 남편들은 어떤 돌파구를 선정하는 것이 올바르며 품위(?)있는 노년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
바햐흐로 세상은 여성 상위시대이며 모계사회로 변환하는 과정에 있다. 딸이 노후보장이라며 불과 몇 년 전까지의 아들 선호사상은 박물관의 박제화가 된지 오래고 장모가 득세하여 딸 부부를 조종 하며 여차하면 이혼도 불사하는 위협으로 사위를 조종하여 시부모는 며느리 눈치 보기에 바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구박당하는 새로운 풍속도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육체적인 힘이 경제 단위의 기본적인 힘이었으나 산업화가 가속될수록, 컴퓨터를 비롯한 IT 산업이 발달할수록 육체적인 힘보다는 지능적인 힘이 앞서가며 이런 추세는 여성들에게 경제적인 힘을 실어 주었고 여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한국뿐 아니라 대만에서도 최초의 여성 총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화가 될수록 경제적으로 수입이 늘어나 잘 산다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불안해하고 외로우며 이혼과 불륜이 증가하고 가정이 파괴되며 이혼과 재혼 속에 상처 입는 자녀들이 늘어나고 세상 살기가 더 복잡하여 “그때가 정말 살기 좋았지”하며 과거를 회상하며 살아가게 되는가.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말씀으로 돌아가 해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사탄의 세력은 맘모니즘을 앞세워 세상에서의 성공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남성들은 자신들의 뜻과 목표를 세우고 성공을 좇으며 대부분 가족과 완전 동떨어져서 자신들의 승진과 사업의 성공, 덕망 그리고 존경을 저들의 세상에 있는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찾기에 총력을 기울이나 이미 밖에서 에너지가 고갈되어 집에서는 거의 수동적이고 무심하며 무책임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남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에서의 영적 리더쉽과 가장으로서의 남편들과 아버지들의 참된 모습이 실종된 반면에 여성들은 시대적 조류에 따라 목소리가 점차 커지니 가정마다 흔들리기가 쉽고 타박과 이에 대항하는 잔소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표류하는 남편호가 제 위치로 복귀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
성경은 남편의 제 위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2-24)”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33절)”
그러면 어떻게 남편들은 나날이 변해가는 세상에서 아내에게 이런 복종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가 ?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28,29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이며, 영적인 리더라는 것인데 현대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맘모니즘이 극대화될수록, computer를 필두로 IT 산업이 발달하여 아내들의 경제권이 강화될수록 남편들의 머리가 수구러들고 입지가 좁아져서 가정에서 조차 발붙일 곳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자세히 보니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feeds and care)’ 이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남편이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하여야 아내에게서의 자발적인 복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남편들이 자신의 생업을 통하여 재화를 생산하고 이것을 아내에게 갖다 주는 육적인 양육 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양육이 병행하여야 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보호하기를’이란 단어가 가능한데 이는 어미 새가 새끼 새들을 끌어안고 그 깃털로 따뜻하고 아늑하게 보호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아내가 온유하고 조용한 영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아내에게 따뜻한 둥지를 제공하고, 안전하게 지지하고 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자가 강하고 독립적으로 자라도록 북돋우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여자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고 온유하고 순한 영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안전한 둥지와 영적 힘과 따스함을 공급하려면 남편의 엄청난 영적 리더쉽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감사하게도 필자는 큰돈은 못 벌어도 일용할 양식은 가능하며 20대 초반에 시작한 주일학교 교사를 필두로 성경 공부 교사를 수십 년 한 덕택에 아내에게는 육적 양식뿐만이 아니라 매일 가정예배에서 “매일성경”을 읽으며 영적인 양식도 나누고 있다.
이 세상이 점차로 ‘돈’의 위력에 끌려가는 세대이며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대이기에 교회 안에서 조차 영적인 질서가 흔들리는 가정들을 흔히 보고 접하는 요즈음이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영적인 질서가 올바르게 서있고 남편이 영적인 리더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면 “남편의 잔소리”도 관심이 있어 나오는 “사랑의 소리”가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 “남편의 잔소리”는 수십 년 주방의 고수 면전에서 소위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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