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 - 사람과 사람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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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ㆍ2017-01-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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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21
사람이 세월이 지나가고 나이가 들면 관계에서 오는 상처나 실망이나 이러저러한 연유로 교제 폭이 좁아진다더니 금년 봄에는 그런 사실을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더욱이 매년 4월의 연례행사로 아내마저 한국으로 떠나 집에서 대화 상대가 없어졌고 설상가상으로 한국 식품점에서 사온 음식이 상해서인지 이틀간을 그야말로 토사곽란을 한 터라
집 밖의 봄날은 화창한데 필자의 마음에는 아직 봄이 실감이 안되었다.
어제는 쉬는 날이라 뉴저지의 패터슨을 다녀왔다. 이번이 세 번째의 방문이다. 사연인즉슨 3주 전엔가 필자가 가끔 들여다보는 ‘헤이코리안’이라는 중고품 매매 사이트에서 “30년 엔틱 컬렉션을 팝니다”라는 제목을 보고 30년이라는 세월의 모습을 보고자 집에서 조금 멀지만 호기심에 아내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50년이나 된 고색창연한 고택에 그야말로 온갖 엔틱으로 지하실부터 3층까지 장식된 집을 돌아보며 집주인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식사시간까지 거르며 6시간 정도를 이야기했다)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어제까지 세 번이나 방문하며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엔틱 데스크와 안락의자와 서재등과 램프등을 구입한 것도 즐거움이었지만 더불어 집주인과의 대화가 필자를 즐겁게 만들었다.
인간(人間) -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무료하고 심심하니까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친구를 찾는다면 그건 '우정'일 수 없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찾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시간을 살리기 위해 만나는 친구야말로 믿을 수 있는 좋은 친구 사이다
또한 진정한 친구란 두 개의 육체에 깃들인 하나의 영혼이란 말이 있다. 그런 친구 사이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척에 살면서도 일체감을 함께 누릴 수 없다면 그건 진정한 친구일 수 없다.
그런 관계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
‘거문고가 된 오동나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느 날 아궁이에서 오동나무가 타고 있었다. 채옹이라는 선비는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만 듣고도 곧바로 알아차린다. ‘좋은 재목이로구나!’ 채옹은 아궁이에 불을 때던 사람에게 돈을 주고 곧바로 오동나무를 산다. 타들어간 자국이 아직 남은 그 오동나무는 결국 멋진 거문고가 된다. 과연 그 소리는 상상한 대로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채옹이 아니었다면 땔감으로 끝나버렸을 오동나무는 훌륭한 거문고가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채옹이 만든 거문고를 초미금(焦尾琴)이라 한다. 꼬리가 그을린 거문고라는 뜻의 이 초미금은 ‘하마터면 땔감으로 끝날 뻔한 그을림의 흔적’을 안고 있었기에 더욱 특별한 사연을 품은 악기가 되었다.
만약 그때 신나게 타오르는 오동나무를 그저 ‘잘 타고 있구먼’ 하고 지켜보기만 했다면 오동나무는 영원히 악기가 될 축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 또한 ‘내 안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봐 준 아멘넷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졸필이나마 이곳에 칼럼을 올리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필자에게 ‘글쟁이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터 준 아멘넷에 항상 고마운 마음이 화인(火印)처럼 가슴에 박혀 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다시금 느낀 것이 이번 엔틱 주인과의 만남이었다. 비록 물품 거래 때문에 만난 사이였지만 처음부터 대화가 거리낌 없이 여러 시간이 계속된 것은 아마도 서로간의 마음속의 거문고 소리를 깨달음이었음이 만날수록 새로워진다.
필자보다 연장자이고 사회경험도 다양하며(지역 한인단체장을 역임하고 시 정치인, 그리고 한국의 정치인들과도 교류가 빈번하다.) 재정적으로도 넉넉한 분으로서 필자를 절친으로 대하는 겸손함과 인격과 태도가 그러함을 느끼게 한다.
행복이란 말 자체가 사랑이란 표현처럼 범속으로 전락된 세태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행복이란, 가슴속에 사랑을 채움으로써 오는 것이고, 신뢰와 희망으로부터 오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데서 움이 튼다.
그러니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베어 있을 때 친구도 만냐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필자가 차에 물건을 다 싣고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이 분께서 다시 부르더니 삽을 들고 집주위의 텃밭으로 인도했다. 그리고는 그곳의 당귀와 딸기와 박하나무등을 삽으로 파서 박스와 봉투에 담아 주며 집에 가서 심는 법까지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런 연후에도 돌아서는 모습 속에서도 다시금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순간 따뜻한 마음과 고마움이 교차하며 이런 관계를 소중하게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필자에게 다가왔다.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어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우리의 삶이 신앙적인 삶의 바탕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인간적인 친구를 통해서도 삶의 바탕을 가꾸어갈 수 있다면 비록 나이가 들어가도 잔잔한 행복이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할 것이다.
사람이 세월이 지나가고 나이가 들면 관계에서 오는 상처나 실망이나 이러저러한 연유로 교제 폭이 좁아진다더니 금년 봄에는 그런 사실을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더욱이 매년 4월의 연례행사로 아내마저 한국으로 떠나 집에서 대화 상대가 없어졌고 설상가상으로 한국 식품점에서 사온 음식이 상해서인지 이틀간을 그야말로 토사곽란을 한 터라
집 밖의 봄날은 화창한데 필자의 마음에는 아직 봄이 실감이 안되었다.
어제는 쉬는 날이라 뉴저지의 패터슨을 다녀왔다. 이번이 세 번째의 방문이다. 사연인즉슨 3주 전엔가 필자가 가끔 들여다보는 ‘헤이코리안’이라는 중고품 매매 사이트에서 “30년 엔틱 컬렉션을 팝니다”라는 제목을 보고 30년이라는 세월의 모습을 보고자 집에서 조금 멀지만 호기심에 아내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50년이나 된 고색창연한 고택에 그야말로 온갖 엔틱으로 지하실부터 3층까지 장식된 집을 돌아보며 집주인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식사시간까지 거르며 6시간 정도를 이야기했다)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어제까지 세 번이나 방문하며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엔틱 데스크와 안락의자와 서재등과 램프등을 구입한 것도 즐거움이었지만 더불어 집주인과의 대화가 필자를 즐겁게 만들었다.
인간(人間) -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무료하고 심심하니까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친구를 찾는다면 그건 '우정'일 수 없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찾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시간을 살리기 위해 만나는 친구야말로 믿을 수 있는 좋은 친구 사이다
또한 진정한 친구란 두 개의 육체에 깃들인 하나의 영혼이란 말이 있다. 그런 친구 사이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척에 살면서도 일체감을 함께 누릴 수 없다면 그건 진정한 친구일 수 없다.
그런 관계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
‘거문고가 된 오동나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느 날 아궁이에서 오동나무가 타고 있었다. 채옹이라는 선비는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만 듣고도 곧바로 알아차린다. ‘좋은 재목이로구나!’ 채옹은 아궁이에 불을 때던 사람에게 돈을 주고 곧바로 오동나무를 산다. 타들어간 자국이 아직 남은 그 오동나무는 결국 멋진 거문고가 된다. 과연 그 소리는 상상한 대로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채옹이 아니었다면 땔감으로 끝나버렸을 오동나무는 훌륭한 거문고가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채옹이 만든 거문고를 초미금(焦尾琴)이라 한다. 꼬리가 그을린 거문고라는 뜻의 이 초미금은 ‘하마터면 땔감으로 끝날 뻔한 그을림의 흔적’을 안고 있었기에 더욱 특별한 사연을 품은 악기가 되었다.
만약 그때 신나게 타오르는 오동나무를 그저 ‘잘 타고 있구먼’ 하고 지켜보기만 했다면 오동나무는 영원히 악기가 될 축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 또한 ‘내 안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봐 준 아멘넷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졸필이나마 이곳에 칼럼을 올리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필자에게 ‘글쟁이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터 준 아멘넷에 항상 고마운 마음이 화인(火印)처럼 가슴에 박혀 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다시금 느낀 것이 이번 엔틱 주인과의 만남이었다. 비록 물품 거래 때문에 만난 사이였지만 처음부터 대화가 거리낌 없이 여러 시간이 계속된 것은 아마도 서로간의 마음속의 거문고 소리를 깨달음이었음이 만날수록 새로워진다.
필자보다 연장자이고 사회경험도 다양하며(지역 한인단체장을 역임하고 시 정치인, 그리고 한국의 정치인들과도 교류가 빈번하다.) 재정적으로도 넉넉한 분으로서 필자를 절친으로 대하는 겸손함과 인격과 태도가 그러함을 느끼게 한다.
행복이란 말 자체가 사랑이란 표현처럼 범속으로 전락된 세태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행복이란, 가슴속에 사랑을 채움으로써 오는 것이고, 신뢰와 희망으로부터 오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데서 움이 튼다.
그러니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베어 있을 때 친구도 만냐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필자가 차에 물건을 다 싣고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이 분께서 다시 부르더니 삽을 들고 집주위의 텃밭으로 인도했다. 그리고는 그곳의 당귀와 딸기와 박하나무등을 삽으로 파서 박스와 봉투에 담아 주며 집에 가서 심는 법까지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런 연후에도 돌아서는 모습 속에서도 다시금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순간 따뜻한 마음과 고마움이 교차하며 이런 관계를 소중하게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필자에게 다가왔다.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어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우리의 삶이 신앙적인 삶의 바탕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인간적인 친구를 통해서도 삶의 바탕을 가꾸어갈 수 있다면 비록 나이가 들어가도 잔잔한 행복이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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