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 앞에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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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ㆍ2009-10-2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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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같이 이글거리던 해가 서쪽 산 아래로 막 떨어져 내린 어스럼 하늘가에는 뾰족한 초승달이 내걸리고, 앞마당에는 모기향 대신 피워놓은 모닥불이 매캐한 연기와 함께 은은한 풀 냄새를 뿜어내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저녁식사를 끝낸 어른들은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방금 쪄낸 손가락처럼 가녀린 햇고구마에 구수한 숭늉을 곁들여 마시며 밀렸던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눈다.
서울서 내려온 사촌들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짓 한 번에 우르르 사립문을 밀어젖히고 캄캄한 들판으로 내달린다. 풀숲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 귀뚜라미, 쓰르라미들의 합창이 시작되고, 가까운 개울에서는 개구리들이 뒤질세라 청승을 떨며 굵은 목소리로 베이스를 넣는다. “찌르르 찌르르, 개굴개굴” 생명을 가진 놈들은 모조리 참여를 하는 듯, 합창 소리가 한창 흥겹게 흐르는 캄캄한 들판, 짝을 찾는 개똥벌레(반딧불이)들이 노랗고 따뜻한 불을 꽁무니에 매달고 현란한 춤을 추며 들판을 온통 노란색 불꽃으로 수놓는다.
내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면, 나와 사촌들은 저녁밥 숟갈을 놓기가 무섭게 반딧불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 같다. 엎어지며 자빠지며 노란 불빛을 보고 내달리지만 날아다니는 놈들이라 쉽게 잘 잡혀주지를 않는다, 어찌어찌 하다가 한 마리를 붙잡기라도 하면, 마치 귀한 보석을 손에 넣은 듯, 우리는 조심조심 양쪽 손으로 그 빛을 움켜쥐고 들여다본다. 꼭 움켜진 손가락 사이사이로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 꼬물꼬물 새어나오는 것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따스한 불빛, 나는 그 빛을 막아 보려는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양쪽 손을 꼬옥 움켜쥐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불빛, 내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노란빛을 뿜어내는 작은 요정 같은 개똥벌레, 나는 그 빛이 너무 신기해 마치 꿈을 꾸는듯했고, 그런 때면, 가슴 깊이 숨겨져 있던 행복감이 오색찬란한 무지개로 피어올라 등줄기를 타고 살금살금 흘러내림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고 해도 어둠이 삼킬 수 없고,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 이것이 빛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빛 되신 주님을 영혼에 품은 삶, 어두운 그림자로 덮을 수도 감출 수도 없고, 빛을 품지 않은 채, 빛 된 삶을 살아내기 역시 쉽지가 않을 것이다.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사는 삶, 그리 만만하지도 녹록지도 않다.
필자는 얼마 전, 사랑하는 지인으로부터,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면 편한데....나뭇잎 하나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고...힘든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야곱과 같이 험악한 세월을… 나그네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멜을 받고 공감하며 가슴이 울컥, 눈물이 솟구침을 느낀 적이 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성도가 거대한 세상 속을 살아가노라면 때때로 자신이 너무 작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억지가 버젓이 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든 주님 안에서 바르게 살아보려는 몸부림이 어리석게도 보이고 그런 자신이 한없이 작게 보여지기도 한다. 때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창피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일들을 종교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행하고도 당당한 것을 보면 지금까지 버텨오던 신앙의 힘이 맥없이 무너져내리며 기운이 스르르 빠져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빛의 자녀가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 진리의 길을 걷자고 외쳐보아야 무슨 유익이 있을까…정의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을 믿음으로 맞서 싸우려고 마음을 먹는 것조차 어리석어 보이고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좁은 길을 걸으라 하신다. 캄캄한 밤에 빛을 밝히라 하시고 썩은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명하신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 영혼에 빛을 먼저 품어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12: 46절 말씀).” 주님께서 빛으로 오신 이유가 그 빛을 믿는 자에게도 같은 빛으로 비추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참 빛 되신 주님의 영(성령 하나님께서)이 내 속에 빛으로 들어오신 그 순간에 나는 주님의 빛을 품게 된 사람이다. 내 안에 빛을 품고 있으면 그 빛이 나를 통하여 발산되게 되어 있다. 작은 반딧불이 내 손 안에서 빛을 발하는 동안에는 내가 아무리 그 빛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항상 주위 환경을 탓한다.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 썩었고 종교계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졌다고 탄식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빛이 필요한 시각은 주위가 캄캄했을 때가 아닌가? 방부제 역활의 소금이 필요한 때는 그냥 두면 음식을 썩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망각할 때,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한 체, 의로운 체, 잘 믿는 체, 사랑하는 체, 충성하는 체,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려고 몸부림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부닥치게 되면 낙심하기도 하고 주저앉아 버리기도 하고 더 심하면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외형적 열심파( 골 4:14절 참조)데마도 결국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딤후 4:10절 참조)바울을 떠났음을 볼 수 있다.
성도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참 빛 되신 그분을 마음속에 모시는 그 길 뿐이다. 그런 다음, 내 속에 계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절 참조) 말씀 하셨다.
종교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마음속에 빛 되신 주님을 모셨는가? 아니면 모신 척 가장 하는가? 이런 차이는 순금과 도금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정말 예수님을 모신 성도라면 그 속에 있는 빛이 희미하게나마 밖으로 발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원리가 적용된다. 작은 반딧불이의 불빛마저 감출 수 없거든 하물며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의 빛을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물론, 성도라고 해도, 이 어둡고 악한 세상에서 늘 승리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코 세상이, 흑암이, 성도를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은 성도의 마음속에 빛 되신 주님,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짜는 다르다. 아무리 껍데기로 잘 믿는 것 같고, 열심을 내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참 빛 되신 주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에 빛을 나타낼 수 없다. 이런 상태는 과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믿음, 도금한 금과 같은, 외형만 번쩍이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삶, 종교인의 삶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세상은 이런 도금한 금과 같은 가짜 성도들을 바라보고 갈팡질팡한다. 이런 잘못된 사람들을 기준 잣대로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시켜 손가락질 한다. 이런 현상은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타남을 보게 된다. 믿음 좋은 사람이 가정에 소홀히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믿음 좋은 사람이 사기 치고, 도적질 하고, 간음하고, 살인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도금한 금과 순금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자칫 외향적인 믿음, 나타내 보이는 열심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큰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로지 참 빛을 그 영혼에 품은 사람을 가리킴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비록 조금씩이나마 삶의 변화와 성장이 따름을 보게 된다. 산 생명을 소유한 모든 사물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자라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질된다. 생명이 없는 것은 변화도 없다.
고로 성도는 오늘 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점점 더 성숙해 지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성화 (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성도의 마음속에 빛으로 내주해 계신 그분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지키시되 그리스도의 그날까지 우리를 견인해 주실 것이다.
“너 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 14-16절 말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6절 말씀).”
서울서 내려온 사촌들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짓 한 번에 우르르 사립문을 밀어젖히고 캄캄한 들판으로 내달린다. 풀숲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 귀뚜라미, 쓰르라미들의 합창이 시작되고, 가까운 개울에서는 개구리들이 뒤질세라 청승을 떨며 굵은 목소리로 베이스를 넣는다. “찌르르 찌르르, 개굴개굴” 생명을 가진 놈들은 모조리 참여를 하는 듯, 합창 소리가 한창 흥겹게 흐르는 캄캄한 들판, 짝을 찾는 개똥벌레(반딧불이)들이 노랗고 따뜻한 불을 꽁무니에 매달고 현란한 춤을 추며 들판을 온통 노란색 불꽃으로 수놓는다.
내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면, 나와 사촌들은 저녁밥 숟갈을 놓기가 무섭게 반딧불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 같다. 엎어지며 자빠지며 노란 불빛을 보고 내달리지만 날아다니는 놈들이라 쉽게 잘 잡혀주지를 않는다, 어찌어찌 하다가 한 마리를 붙잡기라도 하면, 마치 귀한 보석을 손에 넣은 듯, 우리는 조심조심 양쪽 손으로 그 빛을 움켜쥐고 들여다본다. 꼭 움켜진 손가락 사이사이로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 꼬물꼬물 새어나오는 것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따스한 불빛, 나는 그 빛을 막아 보려는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양쪽 손을 꼬옥 움켜쥐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불빛, 내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노란빛을 뿜어내는 작은 요정 같은 개똥벌레, 나는 그 빛이 너무 신기해 마치 꿈을 꾸는듯했고, 그런 때면, 가슴 깊이 숨겨져 있던 행복감이 오색찬란한 무지개로 피어올라 등줄기를 타고 살금살금 흘러내림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고 해도 어둠이 삼킬 수 없고,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 이것이 빛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빛 되신 주님을 영혼에 품은 삶, 어두운 그림자로 덮을 수도 감출 수도 없고, 빛을 품지 않은 채, 빛 된 삶을 살아내기 역시 쉽지가 않을 것이다.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사는 삶, 그리 만만하지도 녹록지도 않다.
필자는 얼마 전, 사랑하는 지인으로부터,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면 편한데....나뭇잎 하나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고...힘든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야곱과 같이 험악한 세월을… 나그네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멜을 받고 공감하며 가슴이 울컥, 눈물이 솟구침을 느낀 적이 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성도가 거대한 세상 속을 살아가노라면 때때로 자신이 너무 작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억지가 버젓이 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든 주님 안에서 바르게 살아보려는 몸부림이 어리석게도 보이고 그런 자신이 한없이 작게 보여지기도 한다. 때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창피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일들을 종교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행하고도 당당한 것을 보면 지금까지 버텨오던 신앙의 힘이 맥없이 무너져내리며 기운이 스르르 빠져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빛의 자녀가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 진리의 길을 걷자고 외쳐보아야 무슨 유익이 있을까…정의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을 믿음으로 맞서 싸우려고 마음을 먹는 것조차 어리석어 보이고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좁은 길을 걸으라 하신다. 캄캄한 밤에 빛을 밝히라 하시고 썩은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명하신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 영혼에 빛을 먼저 품어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12: 46절 말씀).” 주님께서 빛으로 오신 이유가 그 빛을 믿는 자에게도 같은 빛으로 비추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참 빛 되신 주님의 영(성령 하나님께서)이 내 속에 빛으로 들어오신 그 순간에 나는 주님의 빛을 품게 된 사람이다. 내 안에 빛을 품고 있으면 그 빛이 나를 통하여 발산되게 되어 있다. 작은 반딧불이 내 손 안에서 빛을 발하는 동안에는 내가 아무리 그 빛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항상 주위 환경을 탓한다.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 썩었고 종교계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졌다고 탄식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빛이 필요한 시각은 주위가 캄캄했을 때가 아닌가? 방부제 역활의 소금이 필요한 때는 그냥 두면 음식을 썩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망각할 때,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한 체, 의로운 체, 잘 믿는 체, 사랑하는 체, 충성하는 체,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려고 몸부림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부닥치게 되면 낙심하기도 하고 주저앉아 버리기도 하고 더 심하면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외형적 열심파( 골 4:14절 참조)데마도 결국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딤후 4:10절 참조)바울을 떠났음을 볼 수 있다.
성도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참 빛 되신 그분을 마음속에 모시는 그 길 뿐이다. 그런 다음, 내 속에 계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절 참조) 말씀 하셨다.
종교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마음속에 빛 되신 주님을 모셨는가? 아니면 모신 척 가장 하는가? 이런 차이는 순금과 도금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정말 예수님을 모신 성도라면 그 속에 있는 빛이 희미하게나마 밖으로 발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원리가 적용된다. 작은 반딧불이의 불빛마저 감출 수 없거든 하물며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의 빛을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물론, 성도라고 해도, 이 어둡고 악한 세상에서 늘 승리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코 세상이, 흑암이, 성도를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은 성도의 마음속에 빛 되신 주님,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짜는 다르다. 아무리 껍데기로 잘 믿는 것 같고, 열심을 내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참 빛 되신 주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에 빛을 나타낼 수 없다. 이런 상태는 과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믿음, 도금한 금과 같은, 외형만 번쩍이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삶, 종교인의 삶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세상은 이런 도금한 금과 같은 가짜 성도들을 바라보고 갈팡질팡한다. 이런 잘못된 사람들을 기준 잣대로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시켜 손가락질 한다. 이런 현상은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타남을 보게 된다. 믿음 좋은 사람이 가정에 소홀히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믿음 좋은 사람이 사기 치고, 도적질 하고, 간음하고, 살인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도금한 금과 순금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자칫 외향적인 믿음, 나타내 보이는 열심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큰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로지 참 빛을 그 영혼에 품은 사람을 가리킴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비록 조금씩이나마 삶의 변화와 성장이 따름을 보게 된다. 산 생명을 소유한 모든 사물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자라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질된다. 생명이 없는 것은 변화도 없다.
고로 성도는 오늘 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점점 더 성숙해 지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성화 (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성도의 마음속에 빛으로 내주해 계신 그분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지키시되 그리스도의 그날까지 우리를 견인해 주실 것이다.
“너 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 14-16절 말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6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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