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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앞에서 살아라(live in His Pre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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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09-10-08

본문

그분 앞에서 살아라(live in His Presence)

현대 기독교 안에서 많은 사역자들, 성도라 일컫는 자들이 죄를 물 마시듯 마시며, 기복신앙,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신앙으로 복음을 변질시켜 가르치고 행한 결과로, 작금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책임을 잘못 가고 있는 소수의 몇몇 대형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전가하려 하고 자신은 이에서 제외되고 의로운 자라 착각하는 태도를 일관한다는 것이다.
 
과연 주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한 형제. 자매, 신령한 의미로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각 지체가 힘을 합쳐 하나님의 지상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연대적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나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런 바리새파 닮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떠난 생활,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개개인이 그분 앞에서 사는 것만이 문제 해결(solution)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인가?

1. 그분과 깨어졌던 사랑의 관계성(실낙원)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

잃었던 낙원을 회복하는 길은 잃었던 사랑의 관계성을 다시 회복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창 1:-3: 참조) 인간은 무엇보다 그분과의 깨어졌던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분의 호흡을 나누어 받은, 하나님 다음으로 존귀하게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며, 이 땅 위의 모든 만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짐과 동시에 그분과 밀접한 사랑의 관계를 나눌 수 있었던 대단한 존재였었다.

그렇게 창조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한순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받아 누리던 권리는 박탈당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은 깨어졌다. 더 이상은 하나님과 대화하며 사랑하던 관계, 존귀한 자가 아닌,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겨우 입에 풀칠이나 면할 수 있는 노동자, 천형의 죄인으로 추락한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아픔, 그 아픔이 우리 모두에게 전가되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피조물은 아무리 높은 지식, 높은 자리, 많은 물질, 선을 쌓는다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의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죄인들이요, (요 3:36절 참조) 저주의 자식으로서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잃어버렸던 낙원과 인간 창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그분과 다시 사랑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가? 다행히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깨어졌던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중재자가 한 분 계시니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것만이 실낙원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영원토록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하나님을 만났으면 그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겨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절 하)”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인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살찌게 하느냐.(삼상 2:29)”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것은:

a) 제물과 예물을 짓밟는 행위다. b)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무엇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제물과 예물이다. 제물과 예물은 그 성격이 현저하게 다르다. 제물은 영어로( Sacrifice)이고 예물은 영어로(offering)이다. 사람들은 이 구분이 잘 되어 있지 않기에 어리석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물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 제물로써, 사람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 드려지는 소나, 양이나 염소, 혹은 비둘기 같은 피를 가진 동물을 의미한다. 이 제물을 드리는 형식은 드리는 자가 자의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물을 받으시는 이(하나님)가 제시한 정확한 규정과 그 요구하심에 어긋나지 않는 제물이어야만 하고 이것이 어그러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받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도리어 크게 진노하심을 알 수 있다. (창 4:4-5, 15:10-14, 삼상 13: 8-14등 참조)

구약의 이 제사 제물은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명 하는 것이다.(요 1:29)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며 진정한 속죄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친히 그 몸으로 제물이 되어 주셨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다른 제물 없고, 예수님 이름 외에는 천하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 없다(행 4:12절 참조)고백하고 믿는 데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서, 나답과 아비후가 주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향로, 금지된 향로에 불을 담아 하나님께 향을 피워 드리려다 오히려 저주를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레10:1-2) 영적으로 주는 교훈은 성도가 다른 이름으로 주께 나가려는 시도는 곧 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경멸히 여기는 태도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물(offering)은: 그 성격이 제물(sacrifice)과는 많이 다르다. 예물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형태로 주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예물(offering)을 드릴 때도, 드리는 자의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드려지는 예물을 어느 단체나 사람에게 준다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예물을 드리는 자가 무슨 예물을 드리든지 그 예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예물드리는 자는 하나님께 드리고 드려진 예물을 관리하며 잘 사용하는 책임은 그 예물을 맡아서 관리하는 자에게 청지기로서의 책임이 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헌금 출납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예수님과 공동체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유능한 자였던 것 같다.

그런 그가 드려진 예물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했기에, 두려움 없이 그 맡긴 돈을 훔쳤다(요 12:3-6절 참조). 그런 행위는 곧 하나님의 예물을 업신여기는 태도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 자의 어두운 한 단면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 자가 바라보는 물질관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자신의 문 앞에 엎드린다고 말씀하신다 (창 4:7절 참조).” 죄가 문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단이 자기 마음의 문에 엎드린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죄는 사단의 속성이기에 사단과 늘 짝하게 된다는 뜻이며, 가룟 유다는 죄와 짝하다가 결국 그 죄의 유혹에 이끌려 스승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기고 영원히 사단에게 속박되고 말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예물을 드릴 때, 많든지 적든지, 자원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을 보태어서 드려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물관이다.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드리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 예물을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드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즐겨내는 예물을 기뻐 받으실 뿐 아니라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말씀하셨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절 말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무엇이 우상임을 알아야 한다.
우상도 1. 실제적인 우상(보이는 우상). 2. 비실제적인 우상 (하나님보다 더사랑하는 그 무엇) 이렇게 두 가지 우상이 있음을 우리 모두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생략하겠다.

3.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절 말씀).” 이 말씀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 이미 마음에 천국이 임해야 하며, 천국이 임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성도가 간과해 버리기 쉬운 말씀이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말씀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론 다음으로 기억해야할 중요한 말씀이다. 구원론이 미래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현재 천국이 미래 천국으로 연결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짝하고 살면서 “나는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 기막히고 어이없는 삶을 연출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이 없다. 어느 독자님이 고백한 대로, 지금은 율법시대가 아니고 은혜시대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그 다음에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과 의로운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삶에서 먼저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그럴 때도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 있는가? 또 내가 어떤 기념비적인 일, 선한 일, 혹은 용감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상급을 나대신 그 누군가가 찬탈했다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무척 화가 나거나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다스릴 수 있는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말을 곧이 듣고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불법을 행동에 옮기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더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주인되심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롬 8: 5, 13-14절 참조)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성령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청결하고 정직한 삶,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걷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죽음의 강을 건널 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늘의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채워주시고 그런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강도가 훨씬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에 꼭 그런 단어는 없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말씀도 있다.

또 순교자도 주께서 힘을 주셔야 순교할 수 있는 것이지,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순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입증된다. 스데반 집사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갈 때를 보라. 죽음 직전에, 그의 영안이 열리고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6절 말씀).” 그렇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섬기던 그 주님, 평소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자기의 사랑받는 종, 스데반이 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셨다. 그리고 스데반을 응원의 눈길로 바라보신다. 이쯤 되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내가 평생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흘린 눈물을 기억해 주시고 내가 오는 것을 환영해 주시려고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신 주님이 보인다면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나 십자가 강도의 죽음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사단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갈기갈기 찢으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고통 중에서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려면 글자 그대로 필사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구원받았다 하여, 나 또한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너무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백성 되기로 마음에 작정한 그날부터 성도는 그분의 통치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계속돼야 하고, 이런 훈련이 계속된 사람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1 5:18절 말씀)

다시 말하지만,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행위나 내 의지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주님을 입술만으로가 아닌 가슴과 행동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자가 됨을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서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 그분을 십자가에 현저히 두 번 못박는 일을 계속하겠다 고집 할 수 없을 것이다.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인 우리도 싫어한다. 하물며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그분 앞에서 내 사랑을 어찌 속일 수 있다는 것일까……그런고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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