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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대한민국 정치상황과 교회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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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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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노용(Noyon)에 있는 칼빈 기념관에 '성경의 무게'라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울을 가운데 두고 왼편에는 가톨릭 사제들이 서 있고 오른편에는 칼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서 있는데, 가톨릭의 사제들이 서 있는 쪽 저울 위에는 천국 열쇠와 함께 교황(?)이 올라서 있고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서 있는 쪽에는 성경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무게의 중심이 성경 쪽으로 기울자 곁에 서 있던 사제와 마귀가 저울이 가톨릭교회 쪽으로 내려오도록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종교개혁 당시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과 가톨릭교회의 성경에 대한 입장을 풍자하는 그림입니다. 즉 성경과 가톨릭교회 중 어느 쪽이 더 권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그림입니다. 저울에 달아보니까 교회보다 성경이 훨씬 권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가톨릭 쪽에서는 그 사실을 인위적으로 바꾸려고 사제 쪽으로 저울이 기울도록 잡아당기고 있는 그림이니까 가톨릭교회로서는 부끄러운 그림입니다. 지금은 그 박물관을 가톨릭교회가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으면서도 그 그림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입니다.

재미있는 유머가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람우상을 섬기고, 개신교회는 종이우상을 섬긴다.’는 유머입니다. 로마교회는 마리아와 교황을 비롯하여 여러 성자들을 우상화 하고 있고, 개신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을 우상화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권위에 갇혀 있던 성경을 해방시킨 것인데, 지금의 개신교회는 또 다시 성경을 교회의 권위 아래 깔고 앉아 있는 형국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성경을 교황의 권위를 높이는 도구로 사용했다면 현대 개신교회는 성경을 교회의 부흥과 선교를 위한 수단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많은 지도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도구로 사용하는 실정입니다. 성경의 도구화는 지금 개신교회 안에서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논문을 쓸 때 저자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신력 있는 사람의 주장을 reference로 사용합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성경은 그 정도의 유용성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교회 부흥을 위한 도구, 성도들의 열심을 이끌어 내기 위한 도구, 선교를 강조하기 위한 도구,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설교나 주장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믿게 하려는 reference로 사용합니다. 이런 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이고, 평신도들이 저지르는 대표적인 잘못은 소위 ‘큐티’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지도자들이 가르친 것입니다. 지금 큐티가 경건생활의 바른 방법으로 교인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언어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만 생각해도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데, 큐티는 역사적 전통 교회가 가르치는 성경에 대한 바른 태도와 방법을 아예 깡그리 무시하는 방법입니다. 상당수의 지도자와 일반 성도들이 성경 계시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도구로 활용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한국교회에서는 성경을 몇 번 읽었느냐로 신앙의 수준을 평가합니다. 심지어 목사 고시 때 성경 몇 번 읽었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암송, 쓰기 등을 강조합니다. 구구단을 외우듯이 성경을 대합니다. 성경 중 중요한 구절 몇 십 개만 외우면 설교, 교육, 전도, 상담 등 걱정할 게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경전을 암송하게 하고 여러 번 읽게 하는 것은 이교나 사교에서 강조하는 방법입니다. 반복해서 경전을 읽거나 주문을 외우는 것이 공로와 지성(至誠)이 되어 그들이 믿는 신이나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을 여러 번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르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은혜 교리는 지성과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거나 기도를 많이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강조하거나 믿는 것은 이교적이고 미신적인 방법입니다. 한국교회 안의 연세 드신 분들 중에는 성경 많이 읽는 것과 기도 많이 하는 것이 신앙의 절대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목사님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목사님들조차 본문을 몇 백 번 읽고 설교를 했노라고 자랑합니다. 본문을 수 백 번 읽고 하는 설교를 들어보면 본문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설교자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에게도 설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설교, 개념 정리가 안 된 단어 사용, 본문이 말씀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좋은 말(은혜, 기도, 선교, 순종, 헌신 등)을 많이 하면서 성도들을 닦달합니다. 거기다가 심리학이나 상담학 같은 것을 적당히 섞어서 설교하면 세련되게 보이고 청중들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니고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의식 있는 불신자들은 이런 설교를 듣고 기독교와 교회 지도자를 무식하다고 비웃습니다. 이런 설교는 한 마디로 성경과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계시와 신학의 역사를 제대로 안다면 성경을 그렇게 취급하지 못합니다. 전통 교회는 이렇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이미 많은 노력을 해 왔고 그 좋은 유산을 우리에게 물러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 성경 읽기입니다.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이나 교리가 다 신학적 성경 읽기의 일환입니다. 교리와 신학 없이 성경을 읽는 것이 매우 순수한 것 같지만 한 편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신학과 신학자들을 영적으로 메마르고 소위 영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은 신앙과는 아무 상관없는 인문학의 한 분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학적’이라는 말이 가장 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을 소홀히 한 한국교회는 자신의 정체성도 경건의 능력도 상실하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소위 최순실 게이트로 국가적 위기에 직면 해 있습니다. 세월호 문제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문제인 것과 이번 최순실 사건이 사이비 종교와 깊은 연관 관계에서 저질러진 문제라는 점에서 한국교회는 자신의 무능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한기총이나 대교단의 이단이나 사이비에 대한 무능한 분별력과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불법과 비윤리적인 범죄들은 한국교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유병언이나 최태민 같은 자들의 사이비 종교의 농간이 먹혀 들어가는 대한민국 기독교와 정치판의 수준을 생각하면 화가 나고 속이 상합니다. 대통령이 법과 정의와 윤리와 보편적 가치 질서의 토대에 서 있었다면 그의 사적인 인간관계가 공공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야당 지도자를 비롯하여 정치지도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최순실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아닌데 그가 국정에 대해 농간을 하였다면 그 책임은 정치 지도자들과 재벌들과 나아가서는 국민 모두에게 있습니다. 최순실의 농간이 먹혀 드는 토양이 지금의 대한민국 교회, 종교, 정치, 기업 나아가서는 국민인데 모든 지도자와 국민들이 모두 남 탓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순실이 아무리 수단이 좋고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혼자 나쁜 짓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아무리 바르게 잘 하려고 해도 사고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발생했다면 법과 질서를 따라 신중하게 문제를 수습하고 죄 지은 자를 가려내어 처벌해야 합니다. 문제가 심각할수록 냉정하게 법을 따라 이성적으로 수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정치권과 언론이 문제의 심각성에 걸맞게 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권과 언론이 불신을 조장하는 발언과 보도를 앞 다투어 쏟아내고 있습니다. 최순실이 초 법적으로 행동했듯이 정치권과 언론과 분노한 국민들이 너나 할 것이 없이 모두가 초법적 분노와 증오심의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이 국민을 빙자하며 그 일을 하는데, 국민은 정치와 안보와 경제적 보호를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그 국민의 생각과 판단이 늘 옳고 바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문제만 발생하면 국민을 거리로 내몰아 혼란을 부추기는 것은 바로 국가 안녕과 질서를 담보로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정치인과 언론의 너무나 저질적이고 수준 낮고 의도가 나쁜 행태입니다. 정치인이 국민을 위한다고, 언론이 국민을 위한다고 믿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그들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들에 의해 농간을 당하는 것이 불쌍한 국민입니다.

이번 최순실 사태를 통하여 확인 된 것은 교회가 국가를 위하는 일이 교회의 바른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참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왔다면 유병언이나 최태민 같은 이들이 그렇게 많은 문제를 저지르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신학교수들이나 대형교회 목사들이 돈에 눈이 먼 것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한국의 몇몇 대형교회의 행태를 보면 최순실이 교회 안에서 그런 짓을 했어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사이비와 이단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대통령이나 정치인이나 기업인이나 교수들이나 사회 지도자들이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은 바로 대한민국 교회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가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바른 교회의 존재 자체는 사이비와 이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바른 교회와 사이비나 이단을 불신자들이 보아서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의 하나는 윤리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윤리를 무시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교회에도 윤리가 무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불신자들이 바른 종교와 사이비나 이단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교회들이 사이비나 이단들과 너무나 비슷해졌기 때문에 교단 안에서조차 분별이 안 되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불신 대통령을 최순실의 사교에 휘둘렸다고 나무라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신학교 교수들이나 신학생들이 최순실 사태에 대해 시국선언을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신을 모르는 유치하고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상황이 정치판보다 더 엉망진창인데,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번 사태에 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이번 사태에 대해 무슨 일을 한다고 나서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결과만 만들 것입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인데 그렇게 할 능력마저 없는 것 같아 절망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성경책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루터나 칼빈처럼 공부하고 깨닫고 사랑하고 지키고 실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 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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