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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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6-08-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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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이해의 대상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철학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 능력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만약 소나 말이 신을 그린다면 신을 소나 말처럼 그렸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올림프스의 신들은 성질이 고약해서 질투와 시기와 외도와 강간과 심지어 근친상간이나 동성애를 하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그리스는 기라성 같은 현명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또한 민주주의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리스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남자들은 여자들을 억압한 상태에서 첩을 거느리고 여자 노예와 창녀들과 자유롭게 정사를 나누고, 잘 생긴 소년들과 사랑을 나누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런 생각과 삶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그리스 신들의 방종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온갖 권력을 쥐락펴락하고, 인간을 종처럼 부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그리스의 신들이 방종한 신들로 묘사 된 것은 인간 욕망의 투사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소나 말이 신들을 그렸다면 소나 말처럼 그렸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이는 방종한 그리스의 신들은 방종한 그리스인의 반영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방종한 그리스의 신들은 방종한 그리스인들의 반영이고 또한 방종한 신들은 그리스인들의 방종을 정당화 하고 심화시켰다는 지적입니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나 헤시오도스의 신통기가 “인간들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을 모두 신들에게 전가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리스 신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신들도 권모술수와 살육을 밥 먹듯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도의 가장 유명한 영웅 신 중 하나인 크리슈나는 부인만 1만 6천명을 둔 호색한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인간 계급의 카스트 제도가 있고 최고의 계급은 브라만이고 맨 아래는 노예 같은 수트라가 있고, 수트라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 전체 인구의 15%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다 그들의 그릇된 신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가나안의 신 바알도 방종의 신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쁜 짓 하는 신은 나쁜 짓은 하는 인간의 반영으로 인간이 만든 신이지만 그 나쁘게 만들어진 신은 인간을 더욱 나쁘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이 하나님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희랍의 신들이나 인도의 신 같이 방종의 신이 아니라 고도의 윤리와 정의와 사랑의 신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도 강조하지만 그 절대주권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때문에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자상하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보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을 염려하셔서 십계명으로도 경고하셨고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주의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 가장 하나님을 잘 반영하고 계시하는 존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을 계시할 때도 의인화의 방법을 통해 설명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도 인간처럼 입, 눈, 귀, 손, 얼굴이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기뻐하시고 진노하시고 슬퍼하시고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당신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시면서도 가장 엄히 경계하신 점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하나님을 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십계명을 통해서도 이 점을 강조하고 다른 여러 곳에서도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심오한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이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나타내는 반응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만난 이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이들은 이해와 납득과 동의가 아니라 경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든 일을 통한 계시든 놀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와 뜻과 행하심이 사람의 예상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뜻과 행하심은 사람의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없이 불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하기 전 약 30여 년 어간 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바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돌아오라고 권하고 책망하고 경고하였지만 그들은 끝끝내 듣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시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심판을 내리십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끝내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일단 북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은 여간 감사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백성에게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는 이유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죄인을 심판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은 호세아를 통하여 진노를 나타내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 호세아의 역할이 끝날 때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논리적으로 또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역사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용서 하시고, 때로는 용서를 기대했는데 심판을 내리시기도 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은 민족과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 현실감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시간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당신 이스라엘은 사람이 만든 신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인간 욕망이 만든 신입니다. 가나안 인들은 바알숭배를 통해 가난안의 번영을 이룩했다고 믿었고 주변 나라들은 부러워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바알숭배가 약속하는 번영을 믿고 선택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아무리 설득하고 책망하고 경고를 해도 듣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철학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 능력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만약 소나 말이 신을 그린다면 신을 소나 말처럼 그렸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올림프스의 신들은 성질이 고약해서 질투와 시기와 외도와 강간과 심지어 근친상간이나 동성애를 하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그리스는 기라성 같은 현명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또한 민주주의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리스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남자들은 여자들을 억압한 상태에서 첩을 거느리고 여자 노예와 창녀들과 자유롭게 정사를 나누고, 잘 생긴 소년들과 사랑을 나누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런 생각과 삶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그리스 신들의 방종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온갖 권력을 쥐락펴락하고, 인간을 종처럼 부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그리스의 신들이 방종한 신들로 묘사 된 것은 인간 욕망의 투사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소나 말이 신들을 그렸다면 소나 말처럼 그렸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이는 방종한 그리스의 신들은 방종한 그리스인의 반영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방종한 그리스의 신들은 방종한 그리스인들의 반영이고 또한 방종한 신들은 그리스인들의 방종을 정당화 하고 심화시켰다는 지적입니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나 헤시오도스의 신통기가 “인간들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을 모두 신들에게 전가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리스 신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신들도 권모술수와 살육을 밥 먹듯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도의 가장 유명한 영웅 신 중 하나인 크리슈나는 부인만 1만 6천명을 둔 호색한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인간 계급의 카스트 제도가 있고 최고의 계급은 브라만이고 맨 아래는 노예 같은 수트라가 있고, 수트라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 전체 인구의 15%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다 그들의 그릇된 신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가나안의 신 바알도 방종의 신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쁜 짓 하는 신은 나쁜 짓은 하는 인간의 반영으로 인간이 만든 신이지만 그 나쁘게 만들어진 신은 인간을 더욱 나쁘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이 하나님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희랍의 신들이나 인도의 신 같이 방종의 신이 아니라 고도의 윤리와 정의와 사랑의 신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도 강조하지만 그 절대주권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때문에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자상하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보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을 염려하셔서 십계명으로도 경고하셨고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주의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 가장 하나님을 잘 반영하고 계시하는 존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을 계시할 때도 의인화의 방법을 통해 설명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도 인간처럼 입, 눈, 귀, 손, 얼굴이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기뻐하시고 진노하시고 슬퍼하시고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당신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시면서도 가장 엄히 경계하신 점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하나님을 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십계명을 통해서도 이 점을 강조하고 다른 여러 곳에서도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심오한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이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나타내는 반응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만난 이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이들은 이해와 납득과 동의가 아니라 경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든 일을 통한 계시든 놀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와 뜻과 행하심이 사람의 예상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뜻과 행하심은 사람의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없이 불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하기 전 약 30여 년 어간 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바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돌아오라고 권하고 책망하고 경고하였지만 그들은 끝끝내 듣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시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심판을 내리십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끝내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일단 북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은 여간 감사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백성에게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는 이유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죄인을 심판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은 호세아를 통하여 진노를 나타내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 호세아의 역할이 끝날 때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논리적으로 또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역사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용서 하시고, 때로는 용서를 기대했는데 심판을 내리시기도 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은 민족과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 현실감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시간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당신 이스라엘은 사람이 만든 신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인간 욕망이 만든 신입니다. 가나안 인들은 바알숭배를 통해 가난안의 번영을 이룩했다고 믿었고 주변 나라들은 부러워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바알숭배가 약속하는 번영을 믿고 선택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아무리 설득하고 책망하고 경고를 해도 듣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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