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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참 믿음과 먹어 배부르게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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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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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속담에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한국에서는 반상의 차별이 엄격했습니다. 양반은 아무리 어려워도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은 천한 것이기 때문에 양반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했습니다. 동양 뿐 아니라 희랍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희랍 사상에서 노동을 천한 것으로 여기게 된 배경에는 이원론이 있습니다. 이원론에 의하면 정신은 고귀하지만 육체는 천한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로 하는 노동도 천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학문 세계에도 영향을 끼쳐 가장 이론적인 학문이 가장 고상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수학을 가장 이상적인 학문으로 여겼습니다. 순수 수학은 실체가 없는 이론입니다. 삼각형이 어떤 형식적 실체를 갖게 되면 순수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헬라 철학이 영향을 미친 곳에서는 마치 동양에서 그런 것처럼 노동을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노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조건입니다. 그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속담이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입니다.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조선 시대 양반이나 희랍의 철학자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데, 인간이 먹는 음식은 노동을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시 시대나 21세기에나 동일합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인간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학자도 노동자도 시인도 예술가도 심지어 종교인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먹는 것은 노동을 통하여 얻도록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인간 문명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이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먹는 것이 넘쳐나는 풍요로운 형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먹는 문제를 절실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먹는 문제가 가장 절실했습니다. 자식을 양자로 보내는 것이나 시집 장가가는 것까지도 먹는 문제와 직결 되었습니다. 지금도 먹는 문제가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먹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에 그 다음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지 먹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다른 모든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주된 욕망은 먹어 배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은 이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 있습니다. 먹는 것이 풍족한 우리에게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사건은 강한 인상을 심어 준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먹는 문제가 절실했고 그들에게는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이 지배하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는 바로 그들의 조상들이 과거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던 일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 중의 하나는 인간이 노동하지 않고 음식을 얻어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노동을 통해서 먹을 거리를 얻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인데,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외 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먹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건이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노동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그런 이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먹고 살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그러한 믿음이 옳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못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먹어 배부르게 되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만나의 의미 중에는 그것이 일용할 양식이라는 의미도 있고 또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문제를 만나나 오병이어의 방식으로 해결되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참 신앙의 길과 왜곡된 길의 이정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은 과거 모세 시대의 만나 사건을 연상하였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모세의 지도 아래 그런 기적으로 농사나 목축을 할 수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하였습니다. 그러니 만약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임금이 되신다면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에 있었어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군중들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호수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다음날 호수를 건너 가버나움에 머물고 계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군중들은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여기 표적이라는 단어는 기적이라는 뜻도 있지만 ‘표시’, ‘지시’또는 ‘신호’라는 뜻도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먹어 배부르게 하는 떡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지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절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 나라 원리를 배우지 않고 떡을 얻어먹고 배부르게 되는 일에만 집착합니다. 떡을 얻어먹고 배부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 잘 믿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먹어 배부르게 되는 것’은 모든 세대의 인간에게 변하지 않는 욕구입니다. 인간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욕구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나 이 문제는 숙명과도 같은 유혹입니다. 모든 인간은 많이 배웠건 못 배웠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먹고 배불러야 합니다. 원칙적인 면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이며 창조 질서입니다. 먹어야겠다는 욕망이 작동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습니다. 먹고 싶은 욕망이 사라진다면 살 수 없습니다. 그만큼 먹어 배부르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이 먹어 배부르게 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믿는 신앙까지도 먹어 배부르게 되는 일에 매몰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는 것에만 국한 되지 않고 인간의 소유욕 전반에 대한 문제입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그런 욕망에 사로잡히면 결국 먹어 배부르게 되는 것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기업 비리와 강대국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도 결국은 먹는 문제에 몰입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먹어 배부르게 되는 일에 집착하게 될 때 드러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먹어 배부르게 되는 것을 독점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년 다보스 포럼에서도 바로 이 문제가 21세기 인류가 풀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즉 전 세계의 1%의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99%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인간의 소유욕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무한 경쟁에 돌입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인류가 자기 목숨까지 담보하는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먹어 배부르게 하는 것에 집착하는 왜곡된 신앙을 바로 잡아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교회의 메시지가 어쩌다가 자본주의 메시지와 같아졌을까요? 먹어 배부르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것이고 인간의 타락한 욕망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그 생명력이 긴 것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본주의의 성공을 마냥 기뻐할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먹어 배부르게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썩을 양식도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일면 순수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나쁜 의도가 있는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도 먹어 배부르게 되어야 하나님 나라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 함정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한 율법 학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찾아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도“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상당히 이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 교회를 크게 짓거나 선교를 많이 하거나 선행을 많이 하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런 것 자체는 옳고 정당하지만 그런 것에 집착하면 더 중요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윤리나 정의나 질서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 그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로 일종의 목적론적이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왜곡된 신앙을 바로 잡아 주시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온통 어떤 일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그런 것보다 하나님을 잘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하여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맥 빠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핵심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대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지난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언제나 직면 했던 문제가 있습니다. 참 믿음과 하나님 나라 원리를 칼 마르크스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독일 교회는 그런 주장에 힘을 잃고 히틀러를 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행동주의 기복주의 물질주의가 매력적으로 기독교 안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런 현실에 매몰된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을 아무리 바르게 보려고 해도 바르게 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영적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복음을 정직하게 듣지 못하고 신앙을 정직하게 이해하는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언제나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먹어 배부르게 하는 것이었지만, 진정한 문제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 결핍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심리적인 위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그분의 돌보심이 아니면 한 순간도 생명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생산이 극대화 되어 먹어 배부르게 되어도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사람들이 경쟁하고 싸우고 고통당하며 불행하게 되는 이유는 썩을 양식 때문입니다. 먹어 배부르게 되는 일에 집착하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큰일을 하는 것보다 예수님 잘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잘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믿음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어떤 욕망이 달성되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썩을 양식에 목말라 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풍족히 먹고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요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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