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 복음과 영지주의 접목 시도 경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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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6-04-2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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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부활이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를 부활공동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초대교회 안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부활이 없다는 주장은 너무나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될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고전 15:12-19). 초대교회 안에서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영지주의 자들인데,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였습니다.
철학에서는 영지주의를 가리켜 신플라토니즘의 한 유형이라 합니다. 헬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들이 영지주의(Gnosticism)를 기독교 신앙과 접목시켜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시도인지 모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철학과 사상이 기독교의 복음과 교리적으로 접목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점에서 엄청난 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시도가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든지 영지주의는 아주 오랫동안 초기 기독교에서 큰 세력을 떨쳤습니다.
영지주의는 철저한 영육이원론에 입각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영지주의에 의하면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합니다. 영은 무한하고 육체는 유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육체적으로는 죽지만 영적으로는 죽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소위 그 유명한 희랍철학의 영혼불멸설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영혼불멸성을 믿는 이들도 나름대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를 얻는 사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대 철학자답게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사약을 받아들고 제자에게 자기가 이웃집에서 빌린 닭 한 마리를 갚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육체적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자라야 보일 수 있는 초월적인 자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영지주의 신자들은 육체로는 죽지만 영혼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이란 영지를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바울이 설명하는 기독교의 부활과 비슷합니다. 기독교나 영지주의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습니다. 다만“죽은 자”라는 개념만 다릅니다. 이 차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 이런 부활 사상을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그런 차이로 서로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초기 기독교는 이런 차이를 대충 봉합하는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요한은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했고 그들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한 예수님의 부활을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육체를 지닌 분이 아니라고 주장입니다. 가현설(假現說)을 도케티즘(Docet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도케티즘은 헬라어로 도케오(δοκέω)인데 이는 "보이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몸은 환상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가현설은 예수님이 사람의 탈을 쓰고 왔으므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일 뿐이며, 예수님은 육체를 지니지 않았으므로 죽는 것도 실제가 아니고 부활도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가현설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발생한 극단적인 교리입니다. 요한은 이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서와 서신서는 철저하게 가현설이나 이원론을 정죄합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도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 때문입니다. 요한 서신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인 것을 부인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영지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보다 영지주의의 주장이 더 어필하고 매력적입니다. 죽음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나 일상에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 실제가 아닌 관념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영지주의가 매력적이었다면 현대는 자연과학과 자본주의가 매력적입니다. 기독교가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비전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되고 형통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지 모릅니다. 국가와 기업과 과학은 인간이 영원히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상상을 하도록 날마다 우리에게 암시를 보내고 있습니다. 100세 인생이라는 유행가가 의외로 많은 이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실질적으로 믿는 구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과학이나 자본주의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막연한 기대인지 믿음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죽음을 직시하지도 직면하지도 않고 우회하거나 회피하여 사는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인사말로 사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왜 하필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느냐고 못마땅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직면할 때 죽음의 본질을 알게 되고 죽음으로부터 자유 하게 되는 길을 만나게도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할 때 죽음은 최종적인 승리자입니다. 죽음은 자폭 테러리스트의 몸에 부착한 폭탄과도 같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박살내고 해체시킵니다. 내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무용지물이 되게 합니다. 그것들과의 관계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듭니다. 삼성의 그 많은 재산이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이건희 씨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식물이 들으면 매우 자존심 상할 말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한국의 새누리당, 국민의 당, 더불어 민주당 안에서 세력 다툼에 온갖 허접한 모습을 드러내는 국회의원들, 마치 자신들만 약한 자 편인 양 주장하는 노동운동, 자기들이 아니면 온 국민이 먹고 살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대기업 오너들,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한류 스타들, 대기업 오너보다 부를 누리는 대형 교회 지도자들, 천문학적인 연봉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스포츠 스타들... 이들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들에게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을 대비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죽음이 최종 승자입니다. 인류가 그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죽음은 최종 승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고상하고 중요하고 행복해도 그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너무나 분명한 세력이기 때문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부활신앙입니다. 철학이나 이방 종교는 이원론으로 죽음을 우회하여 피해가려 하였습니다. 현대에는 사람들이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에 기대어 죽음을 회피하거나 부정하려 합니다. 그런데 교회조차 자연과학이나 자본주의에 기대어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강조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이게도 내세 지향적인 교리를 강조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실종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내세를 이원론적으로 취급하고 적용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와 절묘하게 접목시켜 예수 잘 믿어 천국에도 가고 이 세상에서도 복 받고 잘 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금년에도 텃밭에 고추를 심을 예정입니다. 어린 고추가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어 점점 자라 색깔이 붉어지면 맏물 고추를 따게 됩니다. 그것이 첫 열매입니다. 농부는 첫 열매를 따면서 그 다음 두 번째 열매를 따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첫 열매가 없다면 당연히 두 번째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가 견실하다면 두 번째 열매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의심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첫 열매를 수확하고 두 번째 열매를 믿고 기대하는 농부처럼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가 두 번째 열매로 부활할 것을 확신하며 기다립니다. 우리의 부활은 단순히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일어나는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어떤 종교도 철학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비로운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초대교회 때는 영지주의 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오해 되었으며 현대에는 복음을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와 접목하려는 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오해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고전 15:12-15 -
철학에서는 영지주의를 가리켜 신플라토니즘의 한 유형이라 합니다. 헬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들이 영지주의(Gnosticism)를 기독교 신앙과 접목시켜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시도인지 모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철학과 사상이 기독교의 복음과 교리적으로 접목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점에서 엄청난 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시도가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든지 영지주의는 아주 오랫동안 초기 기독교에서 큰 세력을 떨쳤습니다.
영지주의는 철저한 영육이원론에 입각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영지주의에 의하면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합니다. 영은 무한하고 육체는 유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육체적으로는 죽지만 영적으로는 죽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소위 그 유명한 희랍철학의 영혼불멸설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영혼불멸성을 믿는 이들도 나름대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를 얻는 사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대 철학자답게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사약을 받아들고 제자에게 자기가 이웃집에서 빌린 닭 한 마리를 갚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육체적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자라야 보일 수 있는 초월적인 자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영지주의 신자들은 육체로는 죽지만 영혼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이란 영지를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바울이 설명하는 기독교의 부활과 비슷합니다. 기독교나 영지주의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습니다. 다만“죽은 자”라는 개념만 다릅니다. 이 차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 이런 부활 사상을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그런 차이로 서로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초기 기독교는 이런 차이를 대충 봉합하는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요한은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했고 그들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한 예수님의 부활을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육체를 지닌 분이 아니라고 주장입니다. 가현설(假現說)을 도케티즘(Docet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도케티즘은 헬라어로 도케오(δοκέω)인데 이는 "보이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몸은 환상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가현설은 예수님이 사람의 탈을 쓰고 왔으므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일 뿐이며, 예수님은 육체를 지니지 않았으므로 죽는 것도 실제가 아니고 부활도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가현설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발생한 극단적인 교리입니다. 요한은 이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서와 서신서는 철저하게 가현설이나 이원론을 정죄합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도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 때문입니다. 요한 서신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인 것을 부인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영지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보다 영지주의의 주장이 더 어필하고 매력적입니다. 죽음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나 일상에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 실제가 아닌 관념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영지주의가 매력적이었다면 현대는 자연과학과 자본주의가 매력적입니다. 기독교가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비전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되고 형통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지 모릅니다. 국가와 기업과 과학은 인간이 영원히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상상을 하도록 날마다 우리에게 암시를 보내고 있습니다. 100세 인생이라는 유행가가 의외로 많은 이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실질적으로 믿는 구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과학이나 자본주의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막연한 기대인지 믿음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죽음을 직시하지도 직면하지도 않고 우회하거나 회피하여 사는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인사말로 사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왜 하필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느냐고 못마땅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직면할 때 죽음의 본질을 알게 되고 죽음으로부터 자유 하게 되는 길을 만나게도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할 때 죽음은 최종적인 승리자입니다. 죽음은 자폭 테러리스트의 몸에 부착한 폭탄과도 같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박살내고 해체시킵니다. 내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무용지물이 되게 합니다. 그것들과의 관계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듭니다. 삼성의 그 많은 재산이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이건희 씨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식물이 들으면 매우 자존심 상할 말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한국의 새누리당, 국민의 당, 더불어 민주당 안에서 세력 다툼에 온갖 허접한 모습을 드러내는 국회의원들, 마치 자신들만 약한 자 편인 양 주장하는 노동운동, 자기들이 아니면 온 국민이 먹고 살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대기업 오너들,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한류 스타들, 대기업 오너보다 부를 누리는 대형 교회 지도자들, 천문학적인 연봉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스포츠 스타들... 이들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들에게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을 대비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죽음이 최종 승자입니다. 인류가 그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죽음은 최종 승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고상하고 중요하고 행복해도 그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너무나 분명한 세력이기 때문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부활신앙입니다. 철학이나 이방 종교는 이원론으로 죽음을 우회하여 피해가려 하였습니다. 현대에는 사람들이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에 기대어 죽음을 회피하거나 부정하려 합니다. 그런데 교회조차 자연과학이나 자본주의에 기대어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강조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이게도 내세 지향적인 교리를 강조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실종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내세를 이원론적으로 취급하고 적용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와 절묘하게 접목시켜 예수 잘 믿어 천국에도 가고 이 세상에서도 복 받고 잘 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금년에도 텃밭에 고추를 심을 예정입니다. 어린 고추가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어 점점 자라 색깔이 붉어지면 맏물 고추를 따게 됩니다. 그것이 첫 열매입니다. 농부는 첫 열매를 따면서 그 다음 두 번째 열매를 따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첫 열매가 없다면 당연히 두 번째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가 견실하다면 두 번째 열매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의심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첫 열매를 수확하고 두 번째 열매를 믿고 기대하는 농부처럼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가 두 번째 열매로 부활할 것을 확신하며 기다립니다. 우리의 부활은 단순히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일어나는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어떤 종교도 철학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비로운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초대교회 때는 영지주의 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오해 되었으며 현대에는 복음을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와 접목하려는 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오해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고전 15: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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