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 복음과 영지주의 접목 시도 경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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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6-04-1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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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구별 짓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밖에도 부활이나 내세 사상이 있습니다. 부활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라면 혼란이 없겠지만 다른 종교나 철학에도 부활이나 내세 사상이 있기 때문에 자칫 하면 기독교가 전하는 부활과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부활을 혼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신약의 거의 모든 서신서들은 이 위험에 대해 매우 경계하면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부활신앙에 심각한 위협이 된 것이 페르시아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부활과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 사상입니다. 그 외에 고대 이집트나 인도의 힌두교에도 내세 사상이 있지만 그것들은 기독교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와 인도의 종교와 문명에는 나름의 내세관이 현저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기독교가 그런 이방종교나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도 힌두교의 내세는 부활이 아닌 환생입니다. 환생은 인간이 반드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 짐승이나 곤충이나 다른 여러 생물로 환생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환생은 끝없이 되풀이 되는데, 이생에서의 행위를 업(karma)으로 규정해서 현세의 윤리적 행위를 강조합니다. 불교의 내세 사상도 이 사상을 응용한 것입니다.
이집트 종교의 내세 사상은 아주 구체적이고 매우 정교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이란 육체와 카(Ka)·바(Ba)·아크(Akh)의 결합입니다. 카는 영혼이며, 바는 인격이고(타자와 구별되는), 아크는 가장 높은 정신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인격은 죽은 뒤에도 육체에 남는 것으로 믿습니다. 영혼은 육체에 있을 때 영양을 섭취하기 때문에 사후에도 제사 음식을 받아먹는다고 믿습니다.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문명에는 짐승이나 새 몸뚱이에 사람 머리를 한 존재나 짐승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한 존재에 대한 상상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인간 이해나 내세 사상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부활이란 영혼과 인격이 합쳐져서 위대한 정신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이고, 인격은 죽은 뒤에도 육체에 남는 것으로 믿는데, 죽은 육체를 미라로 보존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선악과 결부해서 사후 세계를 강조합니다. 이슬람교는 바로 이 조로아스터교를 밀어내고 세력을 잡았지만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처럼 유일신 종교이기 때문에 관대하게 대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부활 사상과 희랍 철학의 내세관이 초기 기독교에 미친 영향입니다. 페르시아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부활과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 사상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영향이란 기독교가 조로아스터교나 희랍 철학에 의하여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복음이 왜곡되거나 오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비기독교 학자들은 유대교나 기독교가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어떤 학자는 오히려 반대로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견지해야 할 중요한 입장은 유대교나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기원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교나 기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부터 구약 바벨론 포로 시대와 유대 사회의 묵시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일신론을 믿으면서 또한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에게 유일신은 아후라 마즈다이고, 아후라 마즈다가 쌍둥이 형제 앙그라 마이뉴와 스펜다 아이뉴를 창조하여 각각 빛과 어둠, 선과 악을 지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신론을 인정하지만 아후라 마즈다가 최고의 신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믿음은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강조한 세 가지, 즉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한데 아후라 마즈다의 길을 따른다면 좋은 생각이 곧 좋은 말을 낳고, 다른 이들에게 좋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강조점은 아후라 마즈다의 가르침을 따라 도덕적으로 행하면 가난하던 사람이 잘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조로아스터교 창시자인 차라투스트라 생전에 그가 방문한 마을이나 그를 만나 가르침을 받은 개인은 모두 거지같은 삶에서 잘 살게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과 너무 흡사해서 혼동하기 쉬우나 그들의 철저한 이원론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의 부활이 이방 종교의 부활과 다른 점은 단순히 영생 불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영원히 사느냐 하는 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두 번째 부활할 우리가 첫 부활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부활은 어느 이방 종교나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랍 철학의 내세 사상은 복음이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게 전파되었을 때에 기독교의 부활과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설이 같은 것이라는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교부들까지 기독교 부활과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설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어떤 교부는 복음이 희랍 철학 못지않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이들이 성경과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에 의존해야 하지만 또한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희랍 철학과 영지주의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초기 기독교 복음이 증거 된 시기와 지역은 희랍의 철학과 영지주의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조로아스터교와 희랍 철학이 만나서 형성된 사상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받은 가장 강력한 위협과 도전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서신서는 거의가 영지주의를 경계하면서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의 본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지주의를 파악하지 못하고는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지주의는 인간의 몸을 부정하고 영의 영원성을 강조합니다. 몸을 부정한다는 것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몸의 죽음은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에 부정될 수 없지만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상에 기대어 죽음을 부정하거나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설이나 이방 종교의 부활 사상은 결국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육체의 죽음을 피하고 싶은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고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욕망이 만들어 낸 사상입니다.
고대인들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낸 사상은 영지주의 같은 것이지만, 현대인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까요?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방식은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한 돈을 들여 자기의 무덤을 햇볕 잘 드는 전망 좋은 곳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면에 들어갔다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후에 깨어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가 아니라 죽음을 부인하고 피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사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죽음 앞에 신앙적 자세를 잃지 않고 부활신앙으로 당당하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 고전 15:12 -
기독교의 부활신앙에 심각한 위협이 된 것이 페르시아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부활과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 사상입니다. 그 외에 고대 이집트나 인도의 힌두교에도 내세 사상이 있지만 그것들은 기독교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와 인도의 종교와 문명에는 나름의 내세관이 현저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기독교가 그런 이방종교나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도 힌두교의 내세는 부활이 아닌 환생입니다. 환생은 인간이 반드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 짐승이나 곤충이나 다른 여러 생물로 환생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환생은 끝없이 되풀이 되는데, 이생에서의 행위를 업(karma)으로 규정해서 현세의 윤리적 행위를 강조합니다. 불교의 내세 사상도 이 사상을 응용한 것입니다.
이집트 종교의 내세 사상은 아주 구체적이고 매우 정교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이란 육체와 카(Ka)·바(Ba)·아크(Akh)의 결합입니다. 카는 영혼이며, 바는 인격이고(타자와 구별되는), 아크는 가장 높은 정신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인격은 죽은 뒤에도 육체에 남는 것으로 믿습니다. 영혼은 육체에 있을 때 영양을 섭취하기 때문에 사후에도 제사 음식을 받아먹는다고 믿습니다.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문명에는 짐승이나 새 몸뚱이에 사람 머리를 한 존재나 짐승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한 존재에 대한 상상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인간 이해나 내세 사상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부활이란 영혼과 인격이 합쳐져서 위대한 정신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이고, 인격은 죽은 뒤에도 육체에 남는 것으로 믿는데, 죽은 육체를 미라로 보존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선악과 결부해서 사후 세계를 강조합니다. 이슬람교는 바로 이 조로아스터교를 밀어내고 세력을 잡았지만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처럼 유일신 종교이기 때문에 관대하게 대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부활 사상과 희랍 철학의 내세관이 초기 기독교에 미친 영향입니다. 페르시아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부활과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 사상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영향이란 기독교가 조로아스터교나 희랍 철학에 의하여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복음이 왜곡되거나 오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비기독교 학자들은 유대교나 기독교가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어떤 학자는 오히려 반대로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견지해야 할 중요한 입장은 유대교나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기원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교나 기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부터 구약 바벨론 포로 시대와 유대 사회의 묵시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일신론을 믿으면서 또한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에게 유일신은 아후라 마즈다이고, 아후라 마즈다가 쌍둥이 형제 앙그라 마이뉴와 스펜다 아이뉴를 창조하여 각각 빛과 어둠, 선과 악을 지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신론을 인정하지만 아후라 마즈다가 최고의 신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믿음은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강조한 세 가지, 즉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한데 아후라 마즈다의 길을 따른다면 좋은 생각이 곧 좋은 말을 낳고, 다른 이들에게 좋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강조점은 아후라 마즈다의 가르침을 따라 도덕적으로 행하면 가난하던 사람이 잘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조로아스터교 창시자인 차라투스트라 생전에 그가 방문한 마을이나 그를 만나 가르침을 받은 개인은 모두 거지같은 삶에서 잘 살게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과 너무 흡사해서 혼동하기 쉬우나 그들의 철저한 이원론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의 부활이 이방 종교의 부활과 다른 점은 단순히 영생 불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영원히 사느냐 하는 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두 번째 부활할 우리가 첫 부활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부활은 어느 이방 종교나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랍 철학의 내세 사상은 복음이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게 전파되었을 때에 기독교의 부활과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설이 같은 것이라는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교부들까지 기독교 부활과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설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어떤 교부는 복음이 희랍 철학 못지않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이들이 성경과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에 의존해야 하지만 또한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희랍 철학과 영지주의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초기 기독교 복음이 증거 된 시기와 지역은 희랍의 철학과 영지주의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조로아스터교와 희랍 철학이 만나서 형성된 사상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받은 가장 강력한 위협과 도전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서신서는 거의가 영지주의를 경계하면서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의 본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지주의를 파악하지 못하고는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지주의는 인간의 몸을 부정하고 영의 영원성을 강조합니다. 몸을 부정한다는 것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몸의 죽음은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에 부정될 수 없지만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상에 기대어 죽음을 부정하거나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희랍 철학의 영혼불멸설이나 이방 종교의 부활 사상은 결국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육체의 죽음을 피하고 싶은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고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욕망이 만들어 낸 사상입니다.
고대인들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낸 사상은 영지주의 같은 것이지만, 현대인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까요?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방식은 자연과학과 자본주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한 돈을 들여 자기의 무덤을 햇볕 잘 드는 전망 좋은 곳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면에 들어갔다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후에 깨어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가 아니라 죽음을 부인하고 피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사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죽음 앞에 신앙적 자세를 잃지 않고 부활신앙으로 당당하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 고전 1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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