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와 새로운 피조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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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6-04-0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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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너무나 많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북한의 핵 문제만 하더라도 유엔이 주도하고 온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정작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기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북한의 핵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환경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남태평양의 투발루라는 섬나라는 해수면이 상승하여 얼마 있지 않으면 섬 전체가 물속으로 가라앉을 위험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 나라 대통령은 섬 가를 빙 둘러 둑을 쌓을 계획을 가지고 다른 나라의 원조를 얻으러 다닙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땅을 사서 이주를 하라고 권합니다. 전체 국민이 만 오백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니까 그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나라 대통령은 둑을 쌓아 침수를 막겠다고 합니다. 투발루라는 작은 섬나라가 직면한 문제는 전 세계 환경문제로 인한 재난에 있어서 저울 눈금과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자 나라나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오염은 시계의 시침처럼 보이지 않게 서서히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질병 문제도 인류가 언제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의학이 발전하지만 새로운 질병도 계속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에이즈, 에볼라, 구제역, 사스, 메르스, 소두증 등 온갖 신종 질병들이 발전하는 의학을 비웃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자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살은 그 어떤 질병보다 치명적입니다. 사회적 갈등을 심화 시키는 갑을 관계, 청년 실업,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무 말 못하는 임시직 종사자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부조리, 관료주의와 거짓말 문화도 뿌리 깊은 문제입니다.
이곳 미국은 총기 사고가 심각하지만 총기 규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2004년-2013년까지 미국에서 총기 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31만 6,500여 명입니다. 같은 기간에 테러로 죽은 사람은 313명에 불과합니다. 총기 생산업자나 판매업자나 그들에게 정치 후원금을 받는 정치인들은 총기 규제를 결사 반대합니다. 반대 정도가 아니라 총기 사고를 줄이려면 더 많은 사람이 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세계 평화와 인권을 강조합니다.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눅 4:23)는 속담처럼 미국은 다른 나라에게 평화와 인권을 지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국의 평화와 인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기독교적인 정신이 상당할 정도로 지배적이었던 미국이 이 정도이니까 평화와 인권의 문제가 더 심각한 나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나라가 북한이지만 따지고 보면 북한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대한민국이나 핵 문제, 환경 문제, 자살 문제, 갈등과 테러 문제, 인권 문제, 경제 문제, 관료주의 등 어느 것 하나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는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강도를 잡아야 할 경찰이 강도 짓을 하고, 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 놓은 국회의원들이 자기 밥그릇만 챙기고, 경찰 검찰들이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성추행을 하고, 목사나 신부나 교수나 변호사나 의사나 교사들까지 동일한 짓을 저지르는 상황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 정부나 국제연합이나 학자나 사상가나 사업가나 윤리나 철학이나 과학으로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이 세상은 이대로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합니다. 즉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할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실력 있는 정치지도자나 사상가나 학자나 실업가나 희생적 봉사자들이 많지만 그 어떤 탁월한 인간이 출현해도 질병과 죽음, 부의 분배, 정의와 평화, 자유와 인권, 군비 경쟁으로 인한 긴장, 테러와 전쟁, 자원과 환경문제들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셔서 그들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감격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미친 듯이 뛰어들었습니다(고후 5:13-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 수준에서 달라질 수 있는 그런 것 말고 바울처럼 새로운 피조물 된 깨어 있는 인식과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된 후 거친 언행이 좀 달라졌다든가, 술이나 담배를 끊었다든가, 마음이 전보다는 훨씬 더 평화로워졌다든가, 걱정을 덜하게 되었다든가, 병을 고쳤다든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든가,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든가, 돈을 벌었다든가 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있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종교적 열심히 구원과 죄와 그 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율법을 공부했고, 세상 학문도 상당한 수준까지 공부했고, 율법이 명하는 대로 철저하게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30대에 이르러서입니다. 그가 그렇게 늦게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지를 선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변화나 개혁이나 혁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좀 달라졌다거나 인격이 수양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학문이 깊어지고 이해하는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변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간증을 들으면 뭐가 좀 달라졌다는, 아니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그런 변화도 따라 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새로운 피조물 된 경험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입니다. 문화나 교육이나 예술이나 드라마나 경제나 정치를 통해서도 그런 변화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그런 변화와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경험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보다 세속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참 기독교와 복음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종교적 현상에 기울게 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당 활동, 환경운동, 건강식품, 기, 명상, 데모, 노동운동, 예능, 드라마,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대체 종교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도 나름 약간의 유익은 있지만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심각한 것은 그런 것을 마치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참 복음을 들을 기회를 빼앗깁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믿음까지도 대체종교 수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대적 변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변화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미국인들은 중에는 북한을 비롯한 가난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나 아프리카 여러 나라 국민들보다 경제적으로 10배도 더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삶의 환경이 나아지는 것이 믿음의 증거일 수 있으나 그런 증거로 믿음의 확신을 갖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도 그런 증거에만 집착하다가 잘 못된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재벌의 후손이 10년 후에 노숙자가 될 수도 있고 지금의 노숙자가 10년 후에 재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실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믿지 않을 때는 가난했지만 믿고 난 후 부자가 된 이들도 있고, 반대로 믿기 전에는 부자였으나 믿은 후에 가난하게 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가변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믿음을 이야기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에게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인간 실존과 역사의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바울은 감격과 기쁨으로 외칩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그런데 실제로 이런 경험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과 화목하면 가능합니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볼 때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세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햇빛, 비, 눈, 바람, 풀, 이름 없는 들꽃, 뛰노는 아이들, 시장의 상인들, 일렁이는 파도, 무지개, 풀잎 위의 달팽이, 공중을 나는 새, 아이스크림, 피자, 자장면, 된장찌개, 늘 입는 옷, 신발 머리털 하나까지 달라집니다. 날마다 뜨는 태양도 날마다 부는 바람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고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게 됩니다. 형편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기쁨이 평화로 작용합니다. 사랑하는 여인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복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화목의 이치를 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된 확실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창조와 구속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의 선취(先取)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후 5:17 -
환경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남태평양의 투발루라는 섬나라는 해수면이 상승하여 얼마 있지 않으면 섬 전체가 물속으로 가라앉을 위험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 나라 대통령은 섬 가를 빙 둘러 둑을 쌓을 계획을 가지고 다른 나라의 원조를 얻으러 다닙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땅을 사서 이주를 하라고 권합니다. 전체 국민이 만 오백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니까 그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나라 대통령은 둑을 쌓아 침수를 막겠다고 합니다. 투발루라는 작은 섬나라가 직면한 문제는 전 세계 환경문제로 인한 재난에 있어서 저울 눈금과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자 나라나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오염은 시계의 시침처럼 보이지 않게 서서히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질병 문제도 인류가 언제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의학이 발전하지만 새로운 질병도 계속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에이즈, 에볼라, 구제역, 사스, 메르스, 소두증 등 온갖 신종 질병들이 발전하는 의학을 비웃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자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살은 그 어떤 질병보다 치명적입니다. 사회적 갈등을 심화 시키는 갑을 관계, 청년 실업,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무 말 못하는 임시직 종사자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부조리, 관료주의와 거짓말 문화도 뿌리 깊은 문제입니다.
이곳 미국은 총기 사고가 심각하지만 총기 규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2004년-2013년까지 미국에서 총기 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31만 6,500여 명입니다. 같은 기간에 테러로 죽은 사람은 313명에 불과합니다. 총기 생산업자나 판매업자나 그들에게 정치 후원금을 받는 정치인들은 총기 규제를 결사 반대합니다. 반대 정도가 아니라 총기 사고를 줄이려면 더 많은 사람이 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세계 평화와 인권을 강조합니다.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눅 4:23)는 속담처럼 미국은 다른 나라에게 평화와 인권을 지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국의 평화와 인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기독교적인 정신이 상당할 정도로 지배적이었던 미국이 이 정도이니까 평화와 인권의 문제가 더 심각한 나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나라가 북한이지만 따지고 보면 북한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대한민국이나 핵 문제, 환경 문제, 자살 문제, 갈등과 테러 문제, 인권 문제, 경제 문제, 관료주의 등 어느 것 하나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는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강도를 잡아야 할 경찰이 강도 짓을 하고, 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 놓은 국회의원들이 자기 밥그릇만 챙기고, 경찰 검찰들이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성추행을 하고, 목사나 신부나 교수나 변호사나 의사나 교사들까지 동일한 짓을 저지르는 상황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 정부나 국제연합이나 학자나 사상가나 사업가나 윤리나 철학이나 과학으로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이 세상은 이대로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합니다. 즉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할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실력 있는 정치지도자나 사상가나 학자나 실업가나 희생적 봉사자들이 많지만 그 어떤 탁월한 인간이 출현해도 질병과 죽음, 부의 분배, 정의와 평화, 자유와 인권, 군비 경쟁으로 인한 긴장, 테러와 전쟁, 자원과 환경문제들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셔서 그들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감격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미친 듯이 뛰어들었습니다(고후 5:13-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 수준에서 달라질 수 있는 그런 것 말고 바울처럼 새로운 피조물 된 깨어 있는 인식과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된 후 거친 언행이 좀 달라졌다든가, 술이나 담배를 끊었다든가, 마음이 전보다는 훨씬 더 평화로워졌다든가, 걱정을 덜하게 되었다든가, 병을 고쳤다든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든가,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든가, 돈을 벌었다든가 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있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종교적 열심히 구원과 죄와 그 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율법을 공부했고, 세상 학문도 상당한 수준까지 공부했고, 율법이 명하는 대로 철저하게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30대에 이르러서입니다. 그가 그렇게 늦게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지를 선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변화나 개혁이나 혁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좀 달라졌다거나 인격이 수양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학문이 깊어지고 이해하는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변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간증을 들으면 뭐가 좀 달라졌다는, 아니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그런 변화도 따라 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새로운 피조물 된 경험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입니다. 문화나 교육이나 예술이나 드라마나 경제나 정치를 통해서도 그런 변화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그런 변화와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경험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보다 세속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참 기독교와 복음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종교적 현상에 기울게 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당 활동, 환경운동, 건강식품, 기, 명상, 데모, 노동운동, 예능, 드라마,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대체 종교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도 나름 약간의 유익은 있지만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심각한 것은 그런 것을 마치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참 복음을 들을 기회를 빼앗깁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믿음까지도 대체종교 수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대적 변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변화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미국인들은 중에는 북한을 비롯한 가난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나 아프리카 여러 나라 국민들보다 경제적으로 10배도 더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삶의 환경이 나아지는 것이 믿음의 증거일 수 있으나 그런 증거로 믿음의 확신을 갖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도 그런 증거에만 집착하다가 잘 못된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재벌의 후손이 10년 후에 노숙자가 될 수도 있고 지금의 노숙자가 10년 후에 재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실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믿지 않을 때는 가난했지만 믿고 난 후 부자가 된 이들도 있고, 반대로 믿기 전에는 부자였으나 믿은 후에 가난하게 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가변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믿음을 이야기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에게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인간 실존과 역사의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바울은 감격과 기쁨으로 외칩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그런데 실제로 이런 경험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과 화목하면 가능합니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볼 때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세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햇빛, 비, 눈, 바람, 풀, 이름 없는 들꽃, 뛰노는 아이들, 시장의 상인들, 일렁이는 파도, 무지개, 풀잎 위의 달팽이, 공중을 나는 새, 아이스크림, 피자, 자장면, 된장찌개, 늘 입는 옷, 신발 머리털 하나까지 달라집니다. 날마다 뜨는 태양도 날마다 부는 바람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고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게 됩니다. 형편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기쁨이 평화로 작용합니다. 사랑하는 여인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복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화목의 이치를 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된 확실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창조와 구속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의 선취(先取)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후 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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