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은 절대적이고 나쁜 것은 상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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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6-01-0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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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할 때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를 갖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긍정적인 면이 없다면 희망도 없습니다. 진정한 긍정은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특징입니다. 창조와 복음이 긍정적인 것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 주도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은혜라는 것도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패러다임에서 볼 때 구원은 은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인간 주도로 쟁취하는 것이라면 긍정적인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창조와 구속이 하나님 주도 적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절대 긍정적인 것은 소위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긍정의 힘" 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 교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힘을 믿는 이들은 성경을 자기 확신의 강화를 위한 강장제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타락의 구체적 영향을 외면합니다.
타락과 죄의 영향을 외면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타락의 영향은 창조된 모든 것에 미치고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면서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 사실을 취급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타락과 죄의 영향은 개인이나 국가나 가족이나 온갖 제도와 예술, 학문, 문화, 성, 식욕 같은 육체의 기능에까지 미칩니다. 죄가 이렇게 집요하게 모든 것을 공략하는데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타락과 죄의 영향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란에 동조하고 기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타락이란 존재 자체의 변질이 아니라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을 지향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긍정의 힘이라든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이들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에 미치는 타락으로 말미암은 죄의 영향을 외면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죄의 특성을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죄의 특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생각이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읽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하나님께 반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이들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조심하느라 절대 긍정적인 면을 소홀히 취급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의 키 워드는 “창조”와 “좋았더라.”입니다. 이 두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참으로 엄청납니다. 이 두 단어는 첫째, 모든 존재를 해명하고, 둘째 모든 존재를 평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우리는 다 알 수 없고 따라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 창조하신 한 가지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하늘이 무엇일까요? 어디가 하늘일까요? 하늘이 어디인지, 하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장소인지, 상징적인 개념인지, 경계는 어디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대로 그냥 두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야기 하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고 확실히 아는 것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합니다. 첫째는 그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사실의 토대 위에 세워진 믿음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믿음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이것입니다.
2016년 현재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분쟁, 전쟁, 테러, 사고, 자연재해, 문화, 종교까지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희망을 주거나 소망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들 때문에 실제적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다. 이 모든 문제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결국은 이것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에 담겨 있는 문제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하나님께서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지키시고 돌보시고 보존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세상에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문제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창조물에 대한 이 하나님의 평가는 절대적 평가입니다.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평가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투성이인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먼저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평가는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확실하고 탁월한 평가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평가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무엇을 아는 것은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해 일 부분만 알고는 전체를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전체를 알고 그 아는 것이 확실하고 완전해야 그에 대한 평가도 절대적인 평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평가는 어떤 평가든지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정도의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평가가 다 잘못되고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평가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좋은 기여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평가가 못되기 때문에 참조할 정도의 가치로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은 매스컴이 과대광고와 선전을 하기 때문에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을 믿다가 낭패를 보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화장품 선전, 약 선전, 자동차, 건강식품, 만병통치약, 다이어트 방법, 건강 운동 등, 그런 것들을 선전하는 말이 사실라면 병에 걸릴 사람도 없고, 못 고칠 병도 없고, 비만인 사람도 없고, 거친 피부 때문에 고민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람의 발견과 생각과 경험은 불완전합니다. 만병통치 약, 예뻐지는 화장품, 건강식품, 획기적인 다이어트 방법, 획기적인 운동법, 부자 되는 비결 등등.., 이런 것들은 참고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의 가치들이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평가이기 때문에 참조 정도 해서는 안 되고 전폭적으로 믿어야 하는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 절대적 평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IS는 세계를 위협하고,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 약한 나라들은 등골이 빠지고 허리가 휩니다. 그래도 이곳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풍요를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미국이라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삶의 기본적인 인프라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나라가 부지기수입니다. 자기 집 자기 나라에서 못 살고 떠나야 하는 난민들, 불경기로 인하여 구조조정 때문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난 실직자들, 테러와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생필품을 사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날 각오로 결근까지 하며 가게 앞에서 줄을 서야 하는 사람들, 50년만의 가뭄과 100년만의 홍수로 고통 당하는 이들, 억울한 소송과 고발과 판결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왕따와 갑질에 상처 입은 사람들, 부부 갈등으로 깨어질 위기에 처한 가정들, 부모의 이혼으로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아이들, 사고와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평가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만 해당되는 평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19편은 창조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평가가 그대로 반영된 위대하고 아름다운 시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평가는 그것의 미적 아름다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만물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잘 기능한다는 데 대한 평가입니다.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모든 동물과 생물과 물리적인 법칙과 생명의 법칙과 자연의 질서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100%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그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편 19편 기자가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된 이후로 지구가 거꾸로 돈 적이 없고, 낮과 밤이 바뀐 적이 없고, 물이 높은 곳으로 흐른 적이 없고, 하나님의 특별 개입을 제외하고는 자연 질서와 법칙들이 오작동한 적이 없습니다. 코끼리가 진화하여 사자처럼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성 전환 수술을 하여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창조 질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창조 세계를 보살펴야 하는 책임을 무시하고 남용하여 자연이 오염되는 것이지 환경오염은 창조 질서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평가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불안과 고통은 나쁜 것이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평가는 절대적입니다. 좋은 것이 절대적이고 나쁜 것은 상대적이고 임시적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것이 종말에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돌보시고 섭리하시고 계시지만, 종말에는 우리가 말로 뭐라고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는 완전한 상태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러한 이유와 근거에서 긍정적입니다.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불안과 고통을 주는 많은 요인들 가운데서도 웃을 수밖에 없고, 기뻐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약속 받고 보장 받은 자의 여유와 너그러움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 창 1:31, 시편 19:1 -
타락과 죄의 영향을 외면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타락의 영향은 창조된 모든 것에 미치고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면서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 사실을 취급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타락과 죄의 영향은 개인이나 국가나 가족이나 온갖 제도와 예술, 학문, 문화, 성, 식욕 같은 육체의 기능에까지 미칩니다. 죄가 이렇게 집요하게 모든 것을 공략하는데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타락과 죄의 영향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란에 동조하고 기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타락이란 존재 자체의 변질이 아니라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을 지향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긍정의 힘이라든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이들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에 미치는 타락으로 말미암은 죄의 영향을 외면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죄의 특성을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죄의 특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생각이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읽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하나님께 반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이들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조심하느라 절대 긍정적인 면을 소홀히 취급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의 키 워드는 “창조”와 “좋았더라.”입니다. 이 두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참으로 엄청납니다. 이 두 단어는 첫째, 모든 존재를 해명하고, 둘째 모든 존재를 평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우리는 다 알 수 없고 따라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 창조하신 한 가지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하늘이 무엇일까요? 어디가 하늘일까요? 하늘이 어디인지, 하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장소인지, 상징적인 개념인지, 경계는 어디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대로 그냥 두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야기 하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고 확실히 아는 것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합니다. 첫째는 그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사실의 토대 위에 세워진 믿음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믿음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이것입니다.
2016년 현재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분쟁, 전쟁, 테러, 사고, 자연재해, 문화, 종교까지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희망을 주거나 소망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들 때문에 실제적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다. 이 모든 문제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결국은 이것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에 담겨 있는 문제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하나님께서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지키시고 돌보시고 보존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세상에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문제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창조물에 대한 이 하나님의 평가는 절대적 평가입니다.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평가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투성이인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먼저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평가는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확실하고 탁월한 평가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평가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무엇을 아는 것은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해 일 부분만 알고는 전체를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전체를 알고 그 아는 것이 확실하고 완전해야 그에 대한 평가도 절대적인 평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평가는 어떤 평가든지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정도의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평가가 다 잘못되고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평가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좋은 기여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평가가 못되기 때문에 참조할 정도의 가치로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은 매스컴이 과대광고와 선전을 하기 때문에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을 믿다가 낭패를 보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화장품 선전, 약 선전, 자동차, 건강식품, 만병통치약, 다이어트 방법, 건강 운동 등, 그런 것들을 선전하는 말이 사실라면 병에 걸릴 사람도 없고, 못 고칠 병도 없고, 비만인 사람도 없고, 거친 피부 때문에 고민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람의 발견과 생각과 경험은 불완전합니다. 만병통치 약, 예뻐지는 화장품, 건강식품, 획기적인 다이어트 방법, 획기적인 운동법, 부자 되는 비결 등등.., 이런 것들은 참고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의 가치들이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평가이기 때문에 참조 정도 해서는 안 되고 전폭적으로 믿어야 하는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 절대적 평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IS는 세계를 위협하고,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 약한 나라들은 등골이 빠지고 허리가 휩니다. 그래도 이곳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풍요를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미국이라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삶의 기본적인 인프라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나라가 부지기수입니다. 자기 집 자기 나라에서 못 살고 떠나야 하는 난민들, 불경기로 인하여 구조조정 때문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난 실직자들, 테러와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생필품을 사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날 각오로 결근까지 하며 가게 앞에서 줄을 서야 하는 사람들, 50년만의 가뭄과 100년만의 홍수로 고통 당하는 이들, 억울한 소송과 고발과 판결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왕따와 갑질에 상처 입은 사람들, 부부 갈등으로 깨어질 위기에 처한 가정들, 부모의 이혼으로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아이들, 사고와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평가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만 해당되는 평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19편은 창조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평가가 그대로 반영된 위대하고 아름다운 시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평가는 그것의 미적 아름다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만물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잘 기능한다는 데 대한 평가입니다.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모든 동물과 생물과 물리적인 법칙과 생명의 법칙과 자연의 질서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100%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그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편 19편 기자가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된 이후로 지구가 거꾸로 돈 적이 없고, 낮과 밤이 바뀐 적이 없고, 물이 높은 곳으로 흐른 적이 없고, 하나님의 특별 개입을 제외하고는 자연 질서와 법칙들이 오작동한 적이 없습니다. 코끼리가 진화하여 사자처럼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성 전환 수술을 하여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창조 질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창조 세계를 보살펴야 하는 책임을 무시하고 남용하여 자연이 오염되는 것이지 환경오염은 창조 질서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평가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불안과 고통은 나쁜 것이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평가는 절대적입니다. 좋은 것이 절대적이고 나쁜 것은 상대적이고 임시적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것이 종말에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돌보시고 섭리하시고 계시지만, 종말에는 우리가 말로 뭐라고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는 완전한 상태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러한 이유와 근거에서 긍정적입니다.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불안과 고통을 주는 많은 요인들 가운데서도 웃을 수밖에 없고, 기뻐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약속 받고 보장 받은 자의 여유와 너그러움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 창 1:31, 시편 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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