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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픔을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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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2010-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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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이 한해의 여정을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에 이르러 이제는 입을 열어 나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이유는 이런 나의 아픔이 유독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딱 13 년의 세월이었다. 멀리가는 것이 싫다고 불평하는 가족(아내와 두아들)들을 달래고 설득하며 먼 거리의 교회를 다닌 시간이. 나 자신을 포함하여 식구들을 이끌은 대의명분은 단 한가지였다. 담임 목사의 성경을 해석하는 실력과 설교였다. 그 하나에 모든 것을 희생하며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오가는 길을 불평하는 가족들을 위해 미니 밴을 사면서까지 나름대로 최대로 헌신했던 결과로 돌아온 것은 충격 - 그 자체였다.

위키백과는 '충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충격(衝擊)은 어떠한 종류의 놀라움을 느껴, 정신상태가 공황에 빠진 감정을 의미한다."

이 글에서 장로 임직된지 한달만에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굳이 언급하고 싶지않다. 왜냐하면 그런 사례는 우리 주위의 교회에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글을 올리는 더 중요한 이유는 현대 교회의 그런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근본적인 원인과, 나름대로 대책을 제시하며 아멘넷의 논객들과 이에 대한 토론을 통해 객관적이고도 균형잡힌 결론을 도출하기를 원한다.

먼저 글 서두에 언급한 부분이다.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며 먼 교회를 고집했던 이유 - 담임 목사의 성경을 해석하는 실력과 설교. 다시 말해서 '설교 중독증'이다.

한국 감리교의 슈퍼 삼형제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중에서 금년 한해 감리교를 뒤흔든 김국도 목사의 행적을 잠시 모 신문의 기사에서 인용한다.

"한국 감리교는 지난 9월 25일 감독회장 선거를 했다. 선거 전날 서울지방법원은 '감독회장 후보로 출마한 김국도 목사는 자격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01년 명예훼손으로 100만 원 벌금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형인 김홍도 목사가 2001년 한 여성과 문제가 생기자, 김국도 목사는 이 여성이 18번의 전과가 있는 사람이라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기감 선거법 제13조 6항에는 "교회 재판법이나 사회 재판법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실이 없는 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김국도 목사는 후보 자격을 상실하게 됐다. 신경하 당시 감독회장은 김 목사가 후보 자격이 없다는 점을 밝혔다. 그러나 장동주 선거관리위원장이 이를 무시하고 선거를 진행했다. 표는 김국도 목사가 가장 많이 나왔으나, 감리교 본부는 고수철 목사가 감독회장이라고 발표했고, 이로 인해 선거가 끝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김국도 목사는 지난 9월 3일 감독회장 후보 토론회를 마련한 CBS 토론회가 다른 후보들의 불참으로 열리지 못하자, 카메라 감독 등 스텝들에게 "여기 스텝 30명 되지? 10만 원 짜리 밥 먹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담당 PD가 돈을 받지 않자, 사목에게 받으라고 강요했다. 사목 역시 돈을 거절하자, "너 이 바닥에서 목회하기 싫으냐"라는 말도 했다."

그 형인 김홍도 목사는 어떠한가?

"2005년, 동남아시아에서 지진 해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1월 12일, "동남아시아 쓰나미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발언을 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2006년 4월에는 교회 돈 31여억원을 횡령한 혐의에 대해 대법원에서 유죄확정판결이 내려졌다. 2008년에는 18대 대통령 선거 때 특정후보를 지지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6월 5일 서울특별시 연지동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소강당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경찰, 검찰, 기무사, 국정원을 동원해 대공 분야를 강화시켜서 빨갱이들을 잡아들여라. 그러면 그 사람들(촛불시위 하는 사람들)이 쑥 들어가고 국민들 지지율이 다시 올라온다", "나처럼 이명박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나. 당신을 밀어준 사람이 우파지 좌파가 아니다", "왜 MBC, KBS 저러는데 가만히 있느냐. 빨갱이 잡아들이면 쑥 들어가버린다. 눈치보니까 더 기승을 부리는 것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을 후계 담임목사로 추대해 세습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형제 목사는 이런 범법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에서, 그리고 교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멀리 볼 필요없이 뉴욕의 교회에서도 모습은 다르지만 대소사건을 통해 보통 사람은 이해못할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뉴장 사건을 인용하고 싶다.

삼년전에 취임했던 안민성 목사는 모두가 인정하는 영적 , 인격적인 지도력으로 교회를 잘 이끌어 왔다. 그리고 위에 인용했던 슈퍼 삼형제와는 정반대로 그야말로 신실한 목사로 동 교회의 교인들의 영적 지도자로 전적인 신뢰 속에 목회를 해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금년 8월에 마지막 설교로 교회를 사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글에서 뉴장 교인도 아닌 필자로서는 그 시비를 가르는 글을 쓸 자격이 없음을 알린다. 다만 그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다.

뜻하지 않은 사건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뉴장 교인중 안 목사를 따르는 분들은 그 와중에도 한마음으로 자신들의 뜻과 바램을 표시한 것을 아멘넷이나 뉴스엔조이를 통해 쉽게 볼 수가 있었다. 나 자신이 그런 방황을 했던 사람이기에 그 분들의 아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를 필자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필자가 관리하며 눈여겨보던 독자게시판에 어떤 분이 올렸던 안성민 목사의 이멜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알게 됐다. 즉 , 그야말로 인격적인 안목사는 임시로 머물던 메릴랜드까지 찾아온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에게 자신이 뉴욕에서 개척을 한다면 뉴욕장로교회에 영향을 줄것은 당연하므로 (우리는 그 실례를 LA의 강준민 목사의 사건을 통해 알고 있지 않는가?) 이곳을 떠나 LA로 갈것을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안 목사를 그야말로 믿고 따랐던 교인들에게는 어떤 선택이 있을 것인가?(안목사의 결정에 대한 시비가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야말로 심한 허탈감과 영적인 공황이 올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앞서 예를 들었던 슈퍼 삼형제가 그런 범법 사실에도 불구하고 담임했던 교회에서 아무런 저항이 없던 것이나 뉴장 교인들에 일어났고 진행중인 사건들 속에서 그 교인들에게 미쳤던 영적인 충격을 미쳤던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필자가 교회를 옮겨야 했던 시점부터 줄곳 생각했던 주제는 "설교 중독증"이다. 우리는 흔히 말을 하며 또한 듣게 되는 것이 있다.

"우리 교회 목사님 설교가 너무 좋아 은혜를 받았어."
"우리 교회 목사님 설교를 한번 들어 보세요."

어떤 경우에는 인터넷을 서치해서 소위 스타 목사들의 설교까지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왜 벌어지는가 ?

소위 좋은 설교를 계속 듣다보면 그 설교의 수준이 마치 자신의 신앙 수준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가 설교에 대한 강조를 의미하고 말씀의 권위가 설교자들의 권위로 등치되는 순간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 무한한 권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새로운 도그마가 등장한다

초대 교회사를 조금만 읽어도 그당시 삼백년 동안의 예배의 중심은 성찬식이었지 설교가 아니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수 있다. 게다가 개신교가 종교 개혁을 이룩한 후에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나 개신교가 한국으로 유입된 이래 특유의 샤머니즘과 유교적 사상이 혼합되어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한국형 무소불위의 권위를 지닌 목사 제도가 모습을 드러내어 이제 변질된 목회자들의 막장 설교("나를 거역하면 십년안에 알거지가 된다"), 성추문, 재정 비리등등의 모습으로 개신 교인의 숫자가 줄어 들고 새신자 전도가 힘들어 지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진리를 오늘 우리는 이곳 저곳의 교회에서 쉽게 보게 된다. 그 대책은 과연 무엇인가 ?

예배를 예배답게 회복하자!

뉴욕의 모 대형 교회의 주일 대예배에 우연히 참석했을때 놀란 일이 있었다. 예배 시작부터 모든 순서를 그야말로 초스피드로(찬송을 인도하는 인도자의 손박자도 어찌나 빠른지) 진행하더니 설교 시간이
되자 전혀 다른 스피드가 - 시간의 흐름에 전혀 상관을 안하는 - 전개되는 것이었다.

많은 교회에서 예배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오직 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예배의 주인은 설교자가 아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시고 그야말로 은혜를 주신다. 대표 기도자의 간절한 기도중에서, 찬양대의 헌신된 찬양 중에서, 성실한 삶에서 벌어들인 헌금을 바치는 심령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은혜를 주신다.

설교 중독에 걸린 사람들의 다른 증상이 또 있다. 설교를 통한 깨달음이 자신의 행함에는 전혀 영향을 못미쳐 주일날과 월요일 부터의 한주간 삶이 별개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일찌기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를 하지 않았는가 ?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2;17-20)"

초대 교회에서는 말과 삶이 분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례를 받는 자들에 대해서도 한동안 그의 삶을 지켜보는 과정이 있다지 않는가 ?

우리가 설교 중독증에 있는지 , 나의 세상 삶과 주일날의 모습이 괴리가 있는지를 항상 체크하는 것은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이런 깨달음이 있다면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영적인 방황이나 공황은 별개의 문제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주님의 이런 준엄한 말씀 앞에 온전히 설 수가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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